김도연은 일제강점기 2·8독립운동, 조선어학회사건 등과 관련된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1894년 경기도 양천군 출생으로 1919년 게이오 대학 이재학부를 수료했다. 유학 시절 2·8독립운동을 주도하다 9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 1922년 미국 유학 후 1931년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한인사회의 발전과 해외동포 구제를 위해 노력하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약 2년간 옥고를 치렀다. 1946년 이후 다수의 의원직을 역임하였으며, 1967년 숙환으로 사망하였다. 1991년 독립운동의 공로를 인정해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1894년 6월 16일 경기도 양천군(陽川郡) 출생으로, 본관은 영천(永川), 호는 상산(常山)이다. 보성중학교를 수료하고, 1913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에서 영어 · 일어 등을 공부했다. 1914년 긴죠[錦城]중학교 3학년에 입학하였고, 1919년 게이오[慶應]대학 이재학부(理財學部)를 수료했다. 도쿄 유학 시절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2 · 8독립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9개월의 금고형을 선고받고 동경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 4월 출옥하였고, 1921년 일본에서 흥사단에 가입했다.
1922년 학업과 항일운동을 위해 미국으로 유학, 웨슬리안대학교 3학년에 입학하여 경제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뉴욕의 컬럼비아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1927년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1931년 워싱턴의 아메리칸대학 대학원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유학 초기부터 북미한인유학생총회 등의 단체에 가입하여 주도적으로 학생운동을 펼치는 한편, 한인사회의 발전과 해외동포 구제를 위해 노력했고, 특히 1927년부터 윤치영(尹致暎), 장덕수(張德秀) 등과 함께 대한인동지회 가입, 『삼일신보(三一申報)』 창간 등을 통해 이승만(李承晩) 지지 활동을 전개했다.
1932년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 강사를 지내다, 1934년 조선흥업주식회사를 창립했다. 1942년 일제가 조작한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 체포되어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의 선고를 받았고, 함흥형무소에서 석방될 때까지 약 2년간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여운형(呂運亨)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참여 권유를 거부한 장덕수와 함께 한국민주당 건설에 주력하며 미군정의 정책에 적극 참여했으며, 1946년 남조선 민주의원 의원과 남조선 과도 입법의원에 당선되었다.
1948년 5월 제헌국회 총선거 때 한국민주당 소속으로 서대문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국회 초대 재정경제분과 위원장에 선출되었고, 1948년 8월부터 1950년까지 초대 재무부 장관으로 활동했다. 1954년 제3대 민의원, 1958년 제4대 민의원, 1960년 5대 민의원에 당선되었다. 4·19혁명 직후인 1960년 8월 국무총리에 지명되었으나 국회의 인준투표에서 부결되었고, 민주당 구파동지회를 결성해 신민당(新民黨)을 창당하였으나,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의원자격이 상실되었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전국구 의원이 되었다. 6대 국회에서는 야당의 참패하였는데, 한일협정 문제가 사회 이슈로 등장하자 강력한 야당 출현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1965년 5월 자유민주당과 민정당이 합당, 민중당이 탄생하게 되었다. 김도연은 같은 해 6월 민중당 대표 최고위원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8월 한일협정 비준에 반대해 의원직을 사퇴했다.
이후 제7대 국회에서 신민당 소속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1967년 7월 19일 숙환으로 사망해 북한산 순국선열 묘역에 안장되었다. 저서로 회고록인 『나의 인생백서』와 박사학위 논문인 『한국농촌경제』 등이 있다. 1991년 대한민국 정부는 조국 독립운동의 공로를 인정하여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