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12월초 재일동경유학생들은 미국에 있는 우리 민족대표들이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이와 함께 국내의 일부 친일파들이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총독통치지지문서를 작성중이라는 정보도 입수하였다. 이에 그들은 “세계조류인 민족자결의 대원칙에 따라 우리 민족은 반드시 자주독립을 해야 할 것이며, 이를 쟁취하기 위한 거국적 표시의사가 없으면 우리 대표의 호소가 수포로 돌아갈 것이니 우리 모두 총궐기해야 한다”는 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그리고 대학생인 최팔용(崔八鏞) · 서춘(徐椿) · 백관수(白寬洙) · 이종근(李琮根) · 김상덕(金尙德) · 전영택(田榮澤) · 김도연(金度演) · 윤창석(尹昌錫) · 송계백(宋繼白) · 최근우(崔謹愚) · 이광수(李光洙) · 김철수(金喆壽) 등 10여 명의 유학생들이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 항일투쟁을 추진하였다. 먼저 유학생 대표 송계백을 국내에 잠입시켜 민족지도자들에게 거사계획을 알리고 국내에서도 일시에 궐기할 것을 요청하는 한편, 독립운동의 해외거점인 중국 상해(上海)에도 대표를 파견하였다.
1919년 2월 8일 2시 동경 시내 중심지 YMCA강당에서 동경유학생학우회 임시총회라는 명목의 학생회를 개최하였는데, 개회 즉시 회의내용을 조선청년독립단대회로 변경하였다. 그리고 항일투쟁사상 최초의 조선독립선언식을 거행하면서 2 · 8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낭독하였다. 낭독이 끝난 뒤 400여 명의 남녀 한국인 유학생들이 가두시위에 들어가려 하자 출동하려고 대기 중인 경찰대에 의해 저지, 강제 해산되었다. 이때 주동자 30명이 검거, 투옥되었고 일부 회원들은 귀국하여 국내의 3 · 1운동에 합류하였다. 또는 많은 회원들은 상해로 망명,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