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택은 일제강점기 「독약을 마시는 여인」, 「K와 그 어머니의 죽음」, 「화수분」 등을 저술한 소설가이자 목사이다. 문예지 『창조』의 동인이 되어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1919년 단편 「혜선의 사」를 『창조』에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23년 아오야마학원 신학부를 졸업, 서울 감리교신학대학 교수를 지냈다. 「화수분」은 인간의 원시적 온정과 생명에 대한 외경을 사실적·상징적으로 그려냈다. 전영택은 식민지 시대의 사회 문제와 개인의 삶이 무너지는 것을 다루는 작품으로 출발했으며, 광복 이후에는 기독교적 신앙으로 삶의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작품에 담아냈다.
본관은 담양(潭陽). 호는 늘봄 · 추호(秋湖) · 불수레 · 장춘(長春). 평양 출생. 전석영(田錫永)의 셋째 아들이다.
1910년 평양 대성중학(大成中學) 3년을 중퇴하고 1918년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문학부를 졸업하였으며, 이 학교 신학부에 다시 입학하였다. 김동인(金東仁) · 주요한(朱耀翰) · 김환(金煥) 등과 문예지 『창조(創造)』의 동인이 되어 문단 활동을 시작하였다. 1919년 단편 「혜선(惠善)의 사(死)」를 『창조』 창간호에 발표함으로써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1923년 아오야마학원 신학부를 졸업하였고, 서울 감리교신학대학 교수를 지냈으며, 1930년에는 미국 패시픽신학교에 입학하는 한편 흥사단에도 입단하였다.
1932년에 귀국하여 황해도 봉산감리교회 목사, 1938년 평양 요한학교 및 여자성경학교 목사, 1942년 평양 신리교회 목사, 1948년 중앙신학교(中央神學校) 교수 등을 지냈다. 한편, 문교부 편수국 편수관(1946), 재일본 동경한국복음신문 주간(1952), 대한기독교 문서출판협회, 기독선교회 편집국장(1952) 등 학계 · 언론계에도 종사하면서 1961년에는 한국문인협회 초대 이사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1963년 대한민국 문화포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대표작으로 「천치(天痴)? 천재(天才)?」(1919) · 「독약을 마시는 여인」(1921) · 「K와 그 어머니의 죽음」(1921) · 「흰닭」(1924) · 「화수분」(1925) · 「소」(1950) · 「새벽종」(1955) · 「쥐 이야기」(1956) · 「집」(1957) · 「아버지와 아들」(1957) 등의 단편이 있다. 또한 「하늘을 바라보는 여인」(1958) · 「한마리 양(羊)」(1959) · 「해바라기」(1959) · 「금붕어」(1959) · 「크리스마스 전야의 풍경」(1960) · 「거꾸로 맨 성경」(1961) · 「모든 것을 바치고」(1961) · 「생일파티」(1964) · 「말없는 사람」(1964) 등의 단편과 「생명의 봄」(1920) 등의 중편, 「청춘곡(靑春曲)」(1938) 등의 장편, 성극(聖劇) 「순교자(殉敎者)」(1938), 설교수필집인 『인격주의(人格主義)』(1959) 등이 있다.
그의 문학은 식민지시대의 사회 문제와 개인의 삶이 무너지는 것을 다루는 것으로 출발하여 광복이 되기까지 민족적 수난이나 가난을 동포애로 감싸는 인간 의식을 그렸다. 광복 이후에는 주로 기독교적 신앙으로 삶의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보여 민족과 개인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사실주의적 수법으로 그려 종교인이자 작가로서의 정신 세계를 구현하였다.
「화수분」은 당시 신경향파 작가들이 즐겨 다루는 소재였음에도 도식적인 사건 처리가 아닌 인간의 원시적 온정과 생명에 대한 외경(畏敬)을 사실적 · 상징적으로 그려낸 그의 대표작이다. 「소」는 특히 광복 후 두드러지기 시작한 그의 박애 정신을 구현한 농촌소설로, 「크리스마스 전야의 풍경」은 허위와 가식에 찬 교회의 한 모습을 비판한 것으로 각각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밖에 논설집 『생명(生命)의 개조(改造)』(1926), 전기(傳記) 『유관순전』(1953), 수필집 『의(義)의 태양(太陽)』(1955), 창작집 『하늘을 바라보는 여인』(1958) · 『전영택창작집』(1965) 등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