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김시창(金時昌). 평양 출생. 1931년 평양고등보통학교 5학년 재학 중 졸업을 불과 몇 달 앞두고 일본군 배속장교 배척운동을 벌이다 퇴교, 일본으로 건너가 사가고등학교[佐賀高等學校]를 거쳐 도쿄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독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36년 동인지 『제방(堤防)』을 발간하여 이 잡지에 일본어로 쓴 그의 처녀작 「토성랑(土城廊)」을 발표하였고, 프롤레타리아문학운동에 가담하여 활동하던 중 사상불온으로 경찰에 검거되었다.
석방 후 『문예수도(文藝首都)』 동인이 되어 「기자림(箕子林)」·「산(山)의 신(神)들」 등의 일문소설(日文小說)을 통하여, 한국 농촌의 하층민생활을 생생히 그렸다. 1940년 『조광』에 장편소설 「낙조」를 연재하기 시작하였고, 같은 해에 재일 조선인 교사와 조일혼혈(朝日混血) 조선인 소년의 정체성 찾기의 과정을 그린 단편소설 「빛 속에서」가 일본의 ‘아쿠타가와상(芥川賞)’ 후보에까지 오르기도 하였다.
1940년 첫번째 일본어 소설집 『빛 속에서』가 도쿄에서 발간되었고, 1942년 두번째 일본어 소설집 『고향』이 교토(京都)에서 발간되었다. 1941년 일본에서 ‘사상범예방구금법’에 의해 예비 검속되어 50일간 구류를 살 때 남방군의 종군작가가 될 것을 강요받았지만 거부하였다.
1943년 『국민문학(國民文學)』에 연재한 「태백산맥(太白山脈)」은 조선 후기의 격동기 때 난리를 피하여 화전민이 된 작중 인물들의 삶에 대한 의지와 정의감과 사랑을 그린 그의 대표적인 장편이다.
어지러운 세상을 피하여 산중으로 도망한 한 무리의 화전민들이 험준한 태백산맥을 배경으로 삶에 대한 가열한 의지를 불태우며 젊은이의 정의감과 정열, 화적떼의 난무, 사교도들의 음모, 자연의 위력 등과 어울려 민족의식과 향토애를 잘 드러낸 작품이다.
한편 대표적 단편 「물오리섬」(국민문학, 1942.1)은 대동강 유역을 배경으로 벼랑에 내몰린 한민족의 삶을 역설적인 미학으로 승화시킨 작품으로 설화와 민요의 전통적 분위기를 살린 것이었다. 1943년 귀국 후 일본군의 보도반(報道班)으로 북부 중국에 파견되었다가 연안(延安)으로 탈출하여 팔로군의 종군기자로 참여하였다.
광복이 되자 조선의용군 선견대에 가담하여 귀국한 후 북한으로 돌아왔다. 1946년 3월 북조선예술가총연맹의 국제문화부 책임자가 되었고, 6월 노동법령의 실시에 따라 평양 시내 10대 공장의 하나인 특수화학공장에 파견되었으며, 6월 29일 평안남도 예술연맹 재조직에 따라 위원장에 취임하였다.
1947년 해방 2주년을 기념하여 장편보고문학 『노마천리』를 평양 양서각에서 발행하였고, 1948년에는 조선인민출판사에서 『풍상』을 간행하였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종군작가로서 조선인민군과 함께 참가하였으나 인민군의 1차 후퇴 때 강원도 원주 부근에서 심장병으로 낙오한 뒤 소식이 끊어졌으나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