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춘원(春園)이다. 아명은 이보경(李寶鏡)이며, 필명으로는 장백산인(長白山人) · 고주(孤舟) · 외배 · 올보리 · 노아자 · 닷뫼 · 당백 · 경서학인(京西學人) 등을 썼다.
1892년 2월 1일(음력) 평안북도 정주(定州) 출생으로, 1899년 향리의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1902년 8월 콜레라로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되어 누이동생 둘과 함께 외가와 재당숙 집에서 자랐다. 1903년 동학(東學)에 입도하여 천도교의 박찬명(朴贊明) 대령(大領)의 집에 기숙하며 서기 일을 맡았다.
1905년 8월 일진회(一進會)의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으로 건너가 1906년 3월 다이세중학[大城中學]에 입학하였으나 학비 곤란으로 같은 해 11월 귀국하였고, 1907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 3학년에 편입하였다. 메이지학원 동창회보인 『백금학보(白金學報)』 제19호에 일본어로 쓴 「사랑인가」를 발표하며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다.
1910년 『소년』에 신체시 「우리 영웅」을 발표하였고, 『대한흥학보(大韓興學報)』 제11호에 평론 「문학의 가치」와 단편소설 「무정」을 발표하였다. 3월 메이지학원 보통부 중학 5학년을 졸업하고 귀국해 정주 오산학교(五山學校)의 교원이 되었으며, 7월 백혜순(白惠順)과 중매로 혼인하였다.
1911년 오산학교 학감으로 취임하였으며, 1913년 스토(Harriet Beecher Stowe) 부인의 「검둥이의 설움」을 초역해 신문관에서 간행하고, 시 「말 듣거라」를 『새별』에 발표하였다. 11월 세계여행을 위해 오산학교를 그만두었고, 상하이[上海]에 들러 홍명희(洪命熹) · 문일평(文一平) · 조소앙(趙素昻) 등과 함께 지냈다. 1914년 미국에서 발간되던 『신한민보(新韓民報)』의 주필로 내정되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미국에 가지 못하고 귀국하였다.
1915년 9월 김성수(金性洙)의 후원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예과에 편입하였다. 1917년 1월 1일부터 5월 14일까지 『매일신보』에 장편소설 「무정」을 연재하였고, 이어「소년의 비애」 · 「윤광호」 · 「방황」 등의 단편 소설을 『청춘』에 발표하였다. 같은 해 와세다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였다.
1917년 두 번째 장편 「개척자」를 『매일신보』에 연재하기 시작해 청년층으로부터 호평을 받았으나 1918년 폐병이 재발하였다. 병상에서 허영숙(許英肅)의 간호가 인연이 되어 결혼을 약속하고, 1918년 10월 허영숙과 베이징[北京]으로 도피하였다. 이 시기 전통적인 가부장 제도를 비판하고, 자유로운 결혼생활을 등을 주장한 「신생활론」 · 「자녀중심론」등의 글을 발표해 당시 사회에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1918년 11월 중순경 파리평화회의 개최 소식을 듣고귀국하였다가, 12월 일본으로 건너갔다. 1919년 1월 일본에서 조선청년독립단에 가담해 「2 · 8독립선언서」를 작성한 뒤 상하이로 넘어가 신한청년당에 가담하였다. 7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료편찬위원회 주임을 맡았고, 8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이 되었다. 1920년 4월 흥사단에 입단하였다.
1921년 3월 상하이에서 귀국한 후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으나 곧 불기소 처분되었으며, 같은 해 허영숙과 정식으로 혼인하였다.
1922년 종학원(宗學院) 교사로 초빙되어 철학 · 논리학을, 경성학교와 경신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5월 『개벽』에 조선 민족에 대한 전면적 개조의 필요성을 강조한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였다. 이 무렵 단편 「할멈」 · 「가실(嘉實)」을 집필하였고, 김성수 · 송진우(宋鎭禹)의 권고로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였으나, 1924년 『동아일보』에 연재하던 「민족적 경륜」의 내용이 사회적 논란을 일으켜 퇴사하였다.
1926년 1월 수양동우회 발족에 참여하였고, 11월 동아일보 편집국장에 취임하였다. 『동아일보』에 1924년 「재생」, 1927년 「마의태자」, 1928년 「단종애사」, 1930년 「혁명가의 아내」, 1931년 「이순신」, 1932년 「흙」 등을 연재하였다. 1932년 7월 조선문필가협회 발기인 및 집행위원을 맡았고, 1933년 8월 조선일보사 부사장에 취임해 1934년 5월까지 활동하였다.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투옥되었다가 6개월 후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며, 1938년 11월 수양동우회 사건의 예심을 받던 중 전향을 선언하였다.
1938년 12월 전향자 중심의 좌담회 ‘시국유지원탁회의’에 참석하였고, 1939년 11월 조선문인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해 회장에 선출되었다. 같은 달 20일 조선문인협회 회장으로 협회 주체 전선(戰線) 병사 위문대 · 위문문 보내기 행사를 주도하였다.
1940년 2월 15일자 『매일신보』에 「국민문학의 의의」를 게재하고 황민화운동을 지지하였으며, 2월 20일자 『매일신보』의 「창씨(創氏)와 나」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향산광랑(香山光郞)으로 바꾼 이유를 밝히고, 일제의 창씨개명 정책을 지지하기도 하였다. 3월부터 7월까지 『녹기(綠旗)』에 「진정 마음이 만나서야말로」를 연재하였으며, 9월 직접 작사한 노래 「지원병 장행가(壯行歌)」가 경성중앙방송국 제2방송에서 방송되었다. 12월에는 『국민총력』에 지원병훈련소 참관기인 「지원병훈련소의 하루」를 발표하였고, 황도학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41년 일본어 산문집 『동포에 부침』이 박문서관(博文書館)에서 간행되었다. 8월 임전대책협의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1941년 9월 3∼5일자 『매일신보』에 「반도민중의 애국운동」을 게재해 일본의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지지하였다. 12월 조선임전보국단 전시생활부장으로, 영미타도대강연회에서 ‘사상 함께 영미를 격멸하라’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1942년 5월 조선임전보국단이 주최한 징병제도 연설회에서는 ‘획기적 대선물’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으며, 『신시대』 1942년 4월호 「징병과 여성」을 게재해 징병제 실시를 환영하는 입장을 보였다. 6월 조선문인협회 주최의 ‘일본 군인이 되는 마음가짐’을 듣는 좌담회, 11월 도쿄에서 열린 제1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가하였다.
1943년 4월 조선문인보국회 이사로 선출되었고, 11월 임시특별지원병제도 경성익찬회 종로위원회 실행위원과 연사로 활동하였다. 같은 달 최남선 등과 함께 일본 내 한국인 유학생들의 입대를 권유하는 ‘선배 격려대’에 참여하였다.
1944년 6월 조선문인보국회 평의원, 결전태세즉응(決戰態勢卽應) 재선(在鮮) 문학자 총궐기대회 의장을 맡았다. 8월 적국항복 문인대강연회에서 ‘전쟁과 문학’이란 제목으로 강연을하였으며, 11월 제3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석하였다. 1945년 2월 대화동맹 준비위원 겸 이사, 6월 조선언론보국회 명예회원과 대의당(大義黨) 위원이 되었다.
해방 후, 1946년 9월부터 광동중학교에서 영어와 작문을 가르쳤다. 1947년 1월 도산 안창호기념사업회의 의뢰로 집필을 시작해 5월 『도산 안창호』를 출간하였으며, 6월 『꿈』을 출간하였다. 1949년 12월에는 일제강점기 자신의 행적에 대한 경위와 맥락을 밝힌 『나의 고백』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1949년 2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3월 병보석 되었고, 8월 불기소 처분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7월 납북되었다가 10월 25일 사망하였다. 사망 후 1962년 2월 전기 『춘원 이광수』, 1963년 11월 『이광수 전집』이 출간되었다.
이광수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제2조 제11 · 13 · 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11: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762~857)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