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평안북도 정주(定州) 출생으로, 호는 오봉(五峰)이다.
정주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졸업하고 도쿄고등사범학교[東京高等師範學校] 박물학과에 입학했다가 중퇴하였다. 도쿄고등사범학교 재학 중 조선유학생학우회(朝鮮留學生學友會)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1919년 2·8독립선언 당시 실행위원 11인 중 한사람으로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 명의로 발표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독립시위를 전개하다 체포되어 금고 9월형을 받았다. 출옥 후 도요대학[東洋大學] 철학과를 거쳐 1926년 교토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 경제학부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귀국해 1926년 10월 동아일보사에 입사, 경제부장과 조사부장을 역임하였고, 언론매체에 경제 시평과 해설, 강연 등의 평론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7년 7월 근우회(槿友會) 학술강연 연사로 선임되었고, 1928년 7월 조선농민사 교양부가 주최한 농촌문제대강연회에서 「농민의 지식 계발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1929년 4월 출판노동조합이 주최한 신춘 대강연회, 5월 평양상공회의소가 주최한 경제강연회에 연사로 선정되었다.
1933년 8월 조선일보사 주필 겸 경제부장을 지냈으며, 1934년 5월 조선물산장려회 선전부 이사를 맡았다. 1934년 12월부터 1937년 11월까지 『조선일보』 주필을 역임하였다.
1937년 1월 방송교화선전협의회 강사, 7월 조선교화단체연합회 주최 시국대응강연회 연사, 8월 조선총독부 사회교육과 주최 시국강연반과 방송반 강사 등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12월 ‘남경함락 전첩(戰捷) 봉고제’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1938년 8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후원을 위해 결성된 목요회에 회원으로 참가하기도 하였다.
『녹기』 1939년 3월호에 내선일체 실현을 위한 방법을 제안하는「조선에서의 애국운동[朝鮮に於ける愛國運動]」을 기고하였으며, 4월 ‘징병·의무교육·총동원’ 문제관련 좌담회에 참석하였다. 같은 해 5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참사, 6월 조선문화사 사장, 7월 배영동지회 평의원과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기관지 『총동원』의 편찬위원 등을맡았다.
1940년 9월부터 1942년까지 『매일신보』 주필을 지내면서 시국강연 강사와 매일신보사가 주최한 전국순회시국강연반에 강사로 활동하였고, 1941년 1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사상부 참사와 선전부 이사, 3월 국민연극연구소 강사, 5월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출판부문 연락계를 맡았다. 같은 해 9월부터 10월에는 조선임전보국단의 경성지역 발기인과 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신시대』 1941년 2월호에 「조선과 총력운동」, 『조선』 1942년 3월호에 「조선 동포의 대동아전쟁관」 등의 글을 기고하였으며,1942년 5월 인문사(人文社) 창립 기념사업 ‘징병제 실시 기념논문’ 현상 모집의 심사위원을 맡았다.
1943년부터 매일신보사 주필로서 취체역을 겸하였으며, 같은 해 9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선전부 문화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고, 경성익찬위원회가 조직되자 그 산하 종로익찬위원회의 호별(戶別)방문대에 참가하였다.
1944년 4월 매일신보 주필로 재직 중 사망하였다. 서춘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제2조 제6·7·9·19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8: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261~302)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해방 후인 1963년 도쿄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에 참여한 공적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나, 전시체제기 행적이 논란이 되어 1996년 서훈이 취소되었다. 이후 대전 현충원에 있던 묘가 2004년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