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은 영주(令州) · 김상철(金相徹) · 김재두(金在斗). 경상북도 고령 출신이다.
1917년 3월 서울의 경신학교(儆新學校)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하였다. 1918년 도쿄[東京]에서 세이소쿠영어학교에 입학했다가 7월에 퇴학당했다. 와세다[早稻田]대학 정치경제학과를 다녔다고 하나, 확인되지 않는다.
1919년 2월 8일 최팔용(崔八鏞) · 백관수(白寬洙) · 김도연(金度演) 등과 조선독립청년단(朝鮮獨立靑年團) 대표로 도쿄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東京 YMCA회관)에서 2·8독립선언을 하고 독립선언서를 국내에 있는 유지들에게 보낸 뒤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1919년 3월 21일 동경지방재판소에서 금고형을 선고받고, 2심에서 공소기각되었다.
출옥 후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동방혁명대표자대회(東方革命代表者大會)에 한국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가하였다. 1923년 1월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서 개조파(改造派)로서 선언서 수정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국민대표회의가 실패하자 1924년 봄 길림성 반석현(磐石縣)으로 가 김동삼(金東三) 등과 재만농민동맹(在滿農民同盟)을 조직하고, 그 집행위원으로 기관지인 『농민보(農民報)』를 간행하였다.
이후 정의부(正義府)에 참가했지만, 1928년 정의부를 비롯한 참의부(參議府) · 신민부(新民府)의 통합회의가 결렬되자, 김동삼을 따라 혁신의회(革新議會)에 참여해 집행위원을 맡았다.
1932년 한국독립당의 당군(黨軍)인 한국독립군 참모를 거쳐, 1933년 한국독립당 중앙대회의 결정에 따라 신숙(申肅)과 함께 난징[南京]에 파견되어 한중연합군을 조직하기 위해 중국 정부와 교섭하였다.
난징에서 1934년 3월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 창당에도 참여하여 당무위원에 뽑히기도 하였다. 한편, 1920년대 말부터 의열단(義烈團)의 김원봉(金元鳳)과 연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5년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 창당에 참여해 서기부원이 되었고, 중앙집행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42년 조선민족혁명당이 임시정부에 참여하자 11월 임시의정원의원에 선임되었으며, 1943년 4월 임시정부에서 구성한 선전위원회 15인 위원의 한 사람으로 뽑히기도 하였다.
이 해에 「조선민족혁명당창립경과급기약사(朝鮮民族革命黨創立經過及其略史)」를 쓰기도 하였다. 1944년 4월 임시정부의 학무부차장(1944년 6월부터는 문화부차장), 1945년 3월 문화부장으로 활동하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제1차 임시정부귀국단으로 11월 23일 환국하였다.
이후 비상국민회의(非常國民會議) 대의원과 독립촉성국민회(獨立促成國民會) 총무부장,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총무부장 등을 역임하였고, 1947∼1948년에는 모교인 경신중학교 교장직도 맡았다. 1948년 5월의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민족통일총본부 후보로 고향인 고령에서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제헌국회에서는 1948년 10월에 구성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 후보로 고령에서 입후보하였으나 떨어졌다. 6·25전쟁 때 납북되어 그 뒤의 상황은 알려져 있지 않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