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8월부터 집필하여 1944년 11월 2일에 완성되었다.
이 자서전은 상편 176면, 하편 97면의 노트에 기록된 자필본이다. 계봉우는 함경북도 영흥(永興) 출신으로 유학(儒學)을 수학하고 북간도와 연해주에서 독립운동과 교육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한국사와 한국어에 관한 많은 저술을 남긴 바 있다.
이 책은 1940년 회갑을 맞은 계봉우가 부인 및 4남 1녀와 대화를 하면서 자신의 생애를 회고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자서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원인분석이나 경과도 담겨 있다. 더욱이 그 자신이 독립운동에 직접 관여한 만큼 그러한 부분의 서술은 사료적 가치도 갖는다.
계봉우는 관노(官奴) 가문에서 태어났다. 가난 속에서 14세까지 서당(書堂)에 나가 한학(漢學)에 몰두하였으며, 이후 독학을 하다 방황과 방랑에 나섰다고 한다. 10년 만에 영흥에 돌아와 을사조약(乙巳條約)의 강제체결을 접하고 새롭게 작심하여 이후 별세할 때까지 교육활동과 저술활동을 계속하였다.
북간도와 연해주에서 활동하다가 1916년에는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년 간 금고처분을 받아 영종도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3·1운동 시위에 참여한 뒤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도 관여하였으며 『독립신문』에 여러 글을 연재한 바 있다.
1920년 4월 한인사회당에 입당한 이후 사회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23년 이래 이만과 블라디보스토크 등지에서 교편을 잡았다. 1930년부터 1933년까지는 하바로프스크 동방공산대학의 조선어교수로 재임하였다. 1937년 강제이주로 카자흐스탄 끄즐오르다에 정착하였다.
이 책은 그러한 계봉우의 생애를 대화식으로 풀어 나간 자서전이다. 매우 개인적인 내용부터 3·1운동의 원인을 분석한 학술적인 내용도 포함되어 있어 참고할 만한 자료 가치도 지닌다. 이 자서전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1996년 영인하여 발간한 『북우계봉우자료집(北愚桂奉瑀資料集)』 I에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