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식이 그의 글 일부를 문집체제로 직접 정리해 둔 것으로 보인다. 서간문과 의견서, 설(說)·의(議)·서(序)·기(記)·전(傳) 등 32편의 글이 실려 있다.
문집과 유사한 체제를 갖추고는 있으나, 아직 문집체제로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수록된 글도 모두 1900년을 전후한 시기의 것이고, 양도 적다.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에서 1975년에 편찬한 『박은식전서(朴殷植全書)』 중권에 영인되어 있다.
목차의 대강을 보면 「상의제민상서(上毅齊閔尙書)」·「의상학부대신서(擬上學部大臣書)」·「여김창강서(與金滄江書)」, 「무술의견서(戊戌意見書)」·「신축의견서(辛丑意見書)」, 「흥학설(興學說)」·「황실학교사의(皇室學校私議)」·「종교설(宗敎說)」·「학계(學誡)」, 「송심재이상서관찰평안북도서(送心齋李尙書觀察平安北道序)」·「송황해감리성암전군서(送黃海監理成庵全君序)」, 「우당기(愚堂記)」·「국암기(菊庵記)」·「제삼천홍직각문(祭三泉洪直閣文)」·「김유신전(金庾信傳)」·「김충선전(金忠善傳)」 등이다.
이 『겸곡문고』에는 한말 박은식의 사상을 살필 수 있는 「흥학설」과 「종교설」 등이 수록되어 주목된다. 1901년 학부(學部)에 건의한 「흥학설」은 민족과 국가의 존망이 교육에 있음을 강조하면서, 유교를 기반으로 한 교육개혁을 논의하였다.
즉 박은식은 외국의 흥학의 예를 소개하고 국문 장려를 논의한 다음, 구체적인 흥학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종교의 유지, 외국유학의 장려 및 외국인 교사의 고빙, 학교 설립, 서적 발간, 교수법 강구 등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학도의 게으름을 경계하기 위해 벌칙 사용을 주장하였다.
이런 내용은 박은식이 1904년에 출간한 『학규신론(學規新論)』의 주장과도 다르지 않다. 특히 그는 「흥학설」에서 유교를 기반으로 하여 향교를 교화적 기능으로 재건하고 강화하되, 외국유학을 장려하고 신식학교를 설립하여 근대교육을 보급해야 한다고 하였다.
바로 신학(新學)과 구학(舊學)의 절충을 내건 이른바 개신유학자(改新儒學者)의 관심을 드러냈던 것이다. 의무교육과 사범교육에 관심을 두고 강조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종교설」은 유교의 종교화를 주장한 것으로, 종교를 도덕으로 교육을 경제술(經濟術)로 이해하면서 소학(小學)과 사서(四書)를 국문으로 번역하여 읽히면 이교(異敎)에 입교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 밖에 「김유신전」과 「김충선전」이 포함되어 있다. 「김유신전」은 불교와 도교적인 내용을 바로잡기 위해 작성한 것이다. 김충선은 임진왜란 때 조선에 귀화한 일본인 장수이다.
『겸곡문고』는 1900년대 전반기에 박은식이 유교를 기반으로 신학과 구학의 절충을 강조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