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지역 독립운동단체였던 정의부(正義府)에서 발행하였다. 현재 신문이 남아 있지 않아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일본측의 보고문이 있어 어느 정도의 내용을 살필 수 있다. 정의부는 교육과 산업의 향상을 중시하여 도처에 학교를 설립하고 농민조합이나 농업공사(農業公司)를 설치하였다.
뿐만 아니라 교민과 군인의 사상과 문화계몽에 진력하여 1926년 9월 대동민보사를 설치하고 『대동민보』를 발행하였다. 일제의 조사에 의하면 『대동민보』의 창간호는 1926년 9월 15일자로 발행되었으나, 실제로는 10월 1일에 간행되었다고 한다. 4절 크기의 8면으로 발행되어, 신문이라기보다는 팸플릿에 가까웠던 것 같다.
발행소는 남경(南京)으로 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정의부가 있던 길림성(吉林省)반석현(磐石縣)에서 편집되어 원고를 국문활자가 있는 상해(上海)의 독립신문사(獨立新聞社)에서 인쇄한 다음, 길림으로 보내졌다.
정의부의 지도층이었던 양기탁(梁起鐸)과 고활신[高豁信, 일명: 고할신(高轄信)] 등이 신문발간에 관여하였다고 하는데, 뒤에 확대되어 김이대(金履大)와 박범조(朴凡祚, 이명 金鍾範)·김탁(金鐸)의 3인을 책임사원으로 선임하였다고 한다.
이 신문은 민족주의를 내세운 정의부에서 발행하였지만, 독립운동에 관한 기사뿐 아니라 사회혁명에 관한 기사도 적지 않아 공산주의의 색채도 부분적으로 보인다고 일제는 평가하였다. 일제는 그 이유로 정의부에 반대하는 자들의 증가와 시대사조에 순응하여, 민심에 영합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창간호에 실린 기사 가운데 <만주운동가와 주민>·<국내운동자대검거> 등에서는 악덕부호·경찰·밀정 및 제2차 조선공산당검거사건 담당 경찰·관리·검사 등의 암살과 일본 대도시에의 방화 등을 주장하였다고 한다.
제2호는 12월 1일, 제3호는 1927년 1월 1일자로 발행되었으나 그 뒤의 발행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또, 정의부에서는 『대동민보』 이외에 1927년 1월부터 『전우(戰友)』라는 잡지를 역시 김이대·박범조 등이 주관하여 발행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