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당남(塘南). 함경남도 홍원 출신. 2·8독립선언의 조선청년독립단대표 중의 한 사람이다.
1910년 봄에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몇 달 뒤 일제에 조국이 강점당하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오성중학교(五星中學校)를 졸업하였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치과에 입학하고, 재일유학생단체에서 조국광복을 위해 활동하였다.
1918년 4월 13일 동경에 있는 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개최된 각 대학 웅변대회에 나가 조국 광복의 희망을 강력히 역설하였다. 이후 재일유학생들의 지도적 구실을 하였는데, 특히 조선유학생학우회 기관지로 발행된 『 학지광(學之光)』의 편집국장을 맡으면서, 편집위원이던 최승만(崔承萬)과 독립운동에 관하여 상의하였다.
이 해 12월 1일 동경에서 발행되던 『저팬 애드버타이저(Japan Advertiser)』 영자신문에 실린 이승만(李承晩) · 민찬호(閔瓚鎬) · 정한경(鄭翰景)의 파리파견 기사와, 15일자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의 샌프란시스코 교민의 독립운동자금 모금기사를 읽고 더욱 고무되었다.
12월 하순 조선유학생학우회가 주최한 웅변대회에서 독립운동에 대한 의견을 교환, 독립선언문과 결의문을 작성하기로 하였다. 송계백(宋繼白) · 백관수(白寬洙) · 김철수(金喆壽) · 이광수(李光洙) · 최근우(崔謹愚) · 김도연(金度演) · 윤창석(尹昌錫) · 김상덕(金尙德) · 이종근(李琮根) · 서춘(徐椿) 등이 대표위원으로 선출되었고, 독립선언문과 결의문은 이광수가 작성하되, 최팔용이 대표가 되어 영어와 일본어로 번역, 일본 조야와 외국 공관에 보내기로 하였다.
또한 이 운동을 국내에까지 파급시키기 위해 송계백을 국내로 보냈고, 거사를 하루 앞둔 2월 7일 저녁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조선유학생학우회총회라는 명목으로 400여 명의 남녀 유학생들이 동경 기독교청년회관에 모였다. 동경 경시청에서도 이미 눈치를 채고 정 · 사복 경찰을 그 곳에 파견하였다.
식이 진행되어 회장이 개회선언을 한 뒤 연단에 올라가 조선청년독립단을 발족할 것을 건의하여 찬성을 얻었다. 이어서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낭독이 끝나고 서춘이 연설하려 할 때, 일본 경찰에 의해 검거되어 1년간의 금고형을 받고 귀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