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실중학교(英實中學校) 교사 김경하(金京河)·정준(鄭雋), 명신학교(明新學校) 회계 한봉민(韓奉珉) 등이 천도교 간부들과 영실중학교 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한 뒤 4월 8일을 거사일로 잡았다.
이날 군중 수천명이 남장대(南將臺) 예배당의 종소리를 신호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배포하며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때 출동한 일본 기마헌병의 무차별사격으로 4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피검자 중 29명이 신의주감옥으로 압송되었다.
그 밖에 3월 3일 입관면(立館面)에서는 천도교인 수백명이 모여, 만세를 부르며 독립선언서를 살포하다가 헌병에 의하여 해산당하고 20여 명이 검거되었으며, 4월 16일 어뢰면(漁雷面) 풍룡리(豊龍里)에서도 수천명이 만세시위를 벌이다가, 출동한 일본 헌병대에 의하여 10여 명이 현장에서 피살되고, 20여 명이 붙잡혔다.
그 뒤 만주로부터 국내에 침투해 들어오는 독립군과 해외로 망명하는 독립운동자들이 이곳을 경유하여 압록강을 건너야 했기 때문에 강계군은 일본의 경계가 전시하의 계엄지구와 같았다.
그런 경계 속에서도 10월 24일에는 만주의 독립군이 종남면사무소(終南面事務所)를 습격하고, 헌병분견소와 압록강연안의 감시초소 20여 개소를 불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