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천도교 곽산교구장이었던 김경함(金庚咸)은 정주읍내에서 김진팔(金鎭八)이 주재한 천도교 간부들의 비밀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와, 영창학교(永昌學校) 직원들과 거사를 준비하여 3월 3일에 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이날 천도교측이 「독립선언서」를 역과 주변 각 동리에 배부하고, 기독교측이 태극기를 제작하여 집집마다 나누어준 뒤 집회를 열자 읍내에 모인 군중은 1,000여 명이 되었다. 김경함이 먼저 우리나라의 독립에 관한 연설을 한 뒤, 군중은 만세를 부르며 시가를 행진하였다.
그러나 이 때 일본군이 출동하여 긴 칼과 쇠갈퀴를 휘두르며 군중을 붙잡아 악형을 가하였다. 군중이 안의리(安義里)에 이르렀을 때 헌병보조원 등이 농민 박지협(朴志協)을 때려죽이자 이에 격분한 군중이 세 곳의 면사무소를 불태워버렸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은 교회당에 불을 지르고 남녀 청년 다수를 검거해갔다. 이 지역의 당시 상황은 3월 3일부터 5월 말까지 만세시위 12회, 참가인원 5,500여 명, 부상자 9명, 피검자 111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