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 3·1운동

  • 역사
  • 사건
  • 일제강점기
1919년 3·1운동 때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김진봉 (충북대학교, 한국사)
  • 최종수정 2023년 02월 07일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1919년 3·1운동 때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내용

강서군의 3·1운동은 장날인 3월 3일 기독교측의 최승택(崔昇澤)·박상현(朴尙鉉)·박의현(朴義鉉)·홍석찬(洪錫燦) 등과 천도교측의 이진식(李鎭植)·김병주(金炳疇)·황재호(黃在鎬)·변경식(邊景植)·송현건(宋賢健) 등이 주동, 4천여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전개되었다.

이 날 오전 10시경,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삼창한 군중은 곧 만세시위에 들어갔다. 그러나 일본이 헌병·경찰·군대를 출동시켜 군중에게 총격을 퍼부어, 현장에서 9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수십 명이 검거되었다.

한편, 증산면에서는 3월 2일 용덕리(龍德里)·오흥리(吳興里)·두만리(斗滿里) 등 여러 동리 주민들이 모여 집룡리(集龍里) 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밖으로 나와 만세를 부른 것을 시작으로, 3월 4일에도 기독교인 등 5백여 명의 군중이 모여 독립선포식을 거행하고 만세시위운동을 벌였다.

이 때 일본 헌병대가 이를 해산시키려고 하자, 군중이 헌병주재소를 파괴하고 헌병 1명과 헌병보조원 3명을 죽이고 헌병보조원의 집을 불태웠다.

반석면의 사천장터에서는 3월 4일 일본 헌병의 총격에 맞선 투석전이 벌어져, 13명이 죽고 40여 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함종에서는 3월 8일 강기팔(姜基汃)·김용수(金龍洙)·이능훈(李能勳)·오영선(吳永善) 등이 주동이 되어, 2000여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들은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시위행진에 들어가기에 앞서 군중에게 끝까지 무저항주의로 나아가자고 호소하는 한편, 일본 헌병출장소 소장에게도 그 뜻을 전달하고 무력으로 개입하지 말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평화적인 만세시위운동이 끝날 무렵 헌병이 총격을 퍼부어 1명이 죽고 1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40여 명이 붙잡혔다.

참고문헌

  • - 『독립운동사』 2(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 - 『독립운동사자료집』 6(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3)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콘텐츠 이용 안내

콘텐츠 수정 요청

필수 입력 항목입니다.

주제
0 / 500자
근거 자료
첨부된 파일이 없습니다
파일선택

최대 5개, 전체 용량 30Mb 첨부 가능

작성 완료되었습니다.

작성글 확인

다운로드가 완료되었습니다.

다운로드할 미디어를 선택해주세요.

모든 필수 항목을 입력해주세요.

다운로드할 미디어가 선택되지 않았습니다.

다운로드 중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미디어 다운로드

  • 이용 목적을 상세히 작성하여 주세요.
    서비스 개선에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출처 표기 : [사진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필수 입력 항목입니다.

이용목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