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군의 3·1운동은 장날인 3월 3일 기독교측의 최승택(崔昇澤)·박상현(朴尙鉉)·박의현(朴義鉉)·홍석찬(洪錫燦) 등과 천도교측의 이진식(李鎭植)·김병주(金炳疇)·황재호(黃在鎬)·변경식(邊景植)·송현건(宋賢健) 등이 주동, 4천여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전개되었다.
이 날 오전 10시경,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삼창한 군중은 곧 만세시위에 들어갔다. 그러나 일본이 헌병·경찰·군대를 출동시켜 군중에게 총격을 퍼부어, 현장에서 9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수십 명이 검거되었다.
한편, 증산면에서는 3월 2일 용덕리(龍德里)·오흥리(吳興里)·두만리(斗滿里) 등 여러 동리 주민들이 모여 집룡리(集龍里) 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밖으로 나와 만세를 부른 것을 시작으로, 3월 4일에도 기독교인 등 5백여 명의 군중이 모여 독립선포식을 거행하고 만세시위운동을 벌였다.
이 때 일본 헌병대가 이를 해산시키려고 하자, 군중이 헌병주재소를 파괴하고 헌병 1명과 헌병보조원 3명을 죽이고 헌병보조원의 집을 불태웠다.
반석면의 사천장터에서는 3월 4일 일본 헌병의 총격에 맞선 투석전이 벌어져, 13명이 죽고 40여 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함종에서는 3월 8일 강기팔(姜基汃)·김용수(金龍洙)·이능훈(李能勳)·오영선(吳永善) 등이 주동이 되어, 2000여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들은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시위행진에 들어가기에 앞서 군중에게 끝까지 무저항주의로 나아가자고 호소하는 한편, 일본 헌병출장소 소장에게도 그 뜻을 전달하고 무력으로 개입하지 말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평화적인 만세시위운동이 끝날 무렵 헌병이 총격을 퍼부어 1명이 죽고 1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40여 명이 붙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