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양산 출신. 1918년 일본 게이오대학[慶應大學] 유학생으로, 유학생단체인 조선학회 간사로 활동하였다. 또한, 학우회주최 웅변대회나 망년회, 유학생환영회 등을 통해 민족의식과 항일정신을 고취시켰다.
1919년 1월, 2·8학생독립운동 준비를 위한 11인 대표위원으로 선출되어 1919년 2월 8일 동경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거행된 조선독립선언식을 주동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지방재판소에서 금고 9월을 언도받고 동경형무소에서 복역, 1920년 4월에 출옥하였다.
귀국하여 1920년 12월 조선청년회연합회 창립총회에서 의사(議事)로 선출되었으며, 조선청년회연합회 제3회 대회에서는 의장으로 선출되고 이어서 상무위원에 선임되었다.
이후 각지 청년회의 연합운동과 강연회 등을 통한 문화·계몽운동에 힘썼다. 1923년 1월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 경리부원으로 선임되어 물자절약과 조선물자사용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1924년 4월 종로 중앙청년회관에서 거행된 조선청년총동맹 창립대회의 주도적 임무를 맡았으며, 중앙집행위원 및 중앙검사위원 선출을 위한 10인전형위원에 선임되었다. 그해 9월 중앙청년회관에서 개최된 한해대책강구회(旱害對策講究會)를 주도하였다.
이어서 조선기근대책강구회(朝鮮饑饉對策講究會)를 발기, 9인준비위원으로 선출되어 전국적인 한해민구제사업을 전개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8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