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독립당은 1947년 10월 19일 홍명희 등 중간파 세력이 결성한 정당이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될 조짐을 보이자 홍명희 등 중간세력 중 ‘진정한 우익’을 자임하는 세력들에 의해 결성되었다. 남한단독선거 결정에 따른 유엔임시위원단 파견, 미소양군동시철수안 입장에서 안재홍의 지지파(단선수용파)와 홍명희 등의 반대파(단선반대파)로 내부 갈등이 표출되었다. 결국 안재홍의 지지파가 탈당하고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며 남북협상에 참가하기 위해 북으로 갔다. 남북협상으로 균열이 일어나 와해 위기에 있던 정당은 결국 1948년 9월 하순에 해체되었다.
1947년 8월말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될 조짐을 보이자, 중간세력 중에서 ‘진정한 우익’을 자임하는 세력들에 의해 결성되었다. 홍명희(洪命憙)가 준비위원장에 선임되었고, 9월 18일에는 7인( 안재홍 · 김병로 · 홍명희 · 김호 · 박용희 · 이극로 · 김원용) 간부회의가 열렸고, 21일 정례 준비위원회의에서는 당명을 민주독립당으로 결정하였다.
9월 23일에는 ‘선거권 만20세 이상’, ‘피선거권 만25세 이상(남녀동등)’, ‘언론 · 집회 등 모든 자유권 확립’, ‘토지개혁’, ‘근대산업의 확립’, ‘중요 경제기관은 국가경영 또는 국가관리’ 등 22개 조항의 정책초안을 발표하였다.
1947년 10월 19∼20일 양일간 천도교강당에서 창당대회가 거행되었다. 첫째 날은 준비위원장 홍명희의 개회사에 이어, 홍명희 · 박용희 · 김원용 · 김호 · 이극로 5인을 의장으로 선임하였고, 홍기문의 선언 · 강령 낭독, 김기환의 정책 낭독, 미소공동위원회 미국측 수석위원 브라운 소장, 김규식, 인민공화당 대표 김원봉의 축사가 대독되었다. 둘째 날에는 홍명희 · 박용희 · 김호 · 이극로 · 김원용 · 홍기문 등 170명의 중앙집행위원과 30명의 감찰위원을 선임하였다.
강령에서는 ‘민주주의 국가로 완전 통일독립의 실현을 목적으로 한다’, ‘일제의 잔재를 일소하고, 진정한 민주주의 수행을 약속한다’, ‘봉건적 유폐를 숙청하고, 역사발전 조류에 순응한다’, ‘정치 · 경제 · 사회를 혁신하여, 진보적 체제의 확립을 기한다’, ‘선진문화를 수용하여, 세계문화 발전에 공헌하며 세계평화에 기여한다’고 선언하였다.
당시 중도 성향의 신문은, 향후 우익정계는 한국독립당 · 한국민주당 · 민주독립당의 ‘3각전’으로 재편될 것이라고, 창당의 의의를 높이 평가하였다. 반면에 좌익의 민주주의민족전선은 “민주독립당은 중간정당 기치 하에 발족한 모양이나, 원래 조선과 같은 정세에서는 중간당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비판적으로 논평하였다.
10월 28∼29일 상무위원회의에서는 중앙부서를 정하고, 홍명희를 ‘당대표’로 선임하였다. 이날 홍명희는 기자회견에서 “민족통일의 주장을 민중에게 깊이 인식시켜 본당의 민족자주노선이 민중 속에 명백히 나타나도록 할” 것임을 다짐하였다.
그러나 11월 14일 유엔총회에서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전제로 한 유엔임시위원단의 파견을 결정한 사실을 놓고, 안재홍의 지지파(단선수용파)와 홍명희 등의 반대파(단선반대파)의 갈등이 표출되었으며, ‘미 · 소 양군 동시철수안’에 대한 입장에서도 갈등이 표출되었다. 결국 1948년 1월 25일 안재홍의 측근인 엄우룡 상무위원 등 단독선거 수용파가 탈당함으로써, 민주독립당의 정체성은 보다 명확해졌다.
즉 같은 해 2월 3일에는 “단선 · 단정을 주장하는 일부에서는 남북요인회담과 양군 철퇴의 비현실성을 운운하나, 단선 · 단정은 현 단계에 있어서 민족과 국토를 분열할 뿐 아니라, 우리 민족의 유일한 목적인 통일 독립에 이르는 한 단계가 절대로 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총의가 남북통일과 완전 자주독립에 있는 것을 국제적으로 반영시켜야 한다”는 요지의 성명서를 발표하여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반대하는 입장을 천명하였다.
이후 2월 29일 종로지부 결성식에서 홍명희는 “민독당이 당리(黨利)로 본다면 남조선총선거에 참가할 것이나, 국토와 민족의 분열을 방지하고, 조국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전취하는 남북통일을 원하므로 불참한다. 민독당 일부 당원은 단선에 참가하여 그 안에서 투쟁 운운하나, 이것은 굴복을 의미하는 것이다”라고 함으로써, 단독선거 반대와 남한만의 총선거에 불참한다는 의사를 확인하였다.
그리고 3월 30일에는 “우리의 독립은 원래 민족자결 원칙에서 해결되어야 하며, 이 원칙이 관철되자면 남북회담은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바이다. 우리는 이번 남북회담 제안을 적극 이를 추진시키기에 노력하고자 한다. 남북통일 · 자주독립을 위하여는 이 어려운 사업을 기어이 성공시키고야 말겠다. 이를 성공시키기 위하여는 우선 충분한 예비회담부터 가져야 할 것이다”라고, 남북협상 추진 의사를 밝히며, 민족자주연맹(民族自主聯盟) 등과 보조를 맞춰, ‘남북요인회담’의 개최를 주장하였다.
이해 4월 19일 저녁 민주독립당 대표 홍명희 외 9인은 “나는 민족과 강토의 분열을 차마 앉아보지 못하여, 남북회담에 참가코자 평양으로 향한다. 땅의 남북으로써 민족적 이해를 달리하는 것이 아니라, 피차간 백지로 만나 이 회담을 진행시키고자 한다. 나는 남에서 고집하던 나의 출장을 북에 가서도 고집할 작정이다. 이번의 남북회담이 성공되고 실패될 것은 예단치 못하지마는 우리 민족의 역사로는 한 단계의 진전을 이룰 것을 확신한다”는 담화를 발표하고, 남북협상에 참석하기 위해 북행길에 올랐다.
5·10 총선거 이후인 1948년 7월 21일, 한독당과 민족자주연맹을 중심으로 통일독립촉진회(統一獨立促進會)를 결성하였는데, 여기에 민주독립당 잔류파도 참여하였다. 이 단체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통일지향세력의 느슨한 형태의 협동전선 성격을 띠었는데, 친북 성향의 통일운동세력도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제2차 남북협상’을 계기로 “진보적 민족주의와 남북통일, 자주정부 수립 노선을 확고 지향하여 오던 바, 지난번 남북협상 이후 동 당내에는 자연 당 노선 견지파와 북한정권 지지파와의 균열”이 현실화되어, “동당 대표인 홍명희씨는 제1차 남북협상 이후로 의연히 북한에 체류하여 제2차 남북협상에도 참가하고 있으며, 동당 상무위원 7명 중 이극로(李克魯) · 신진우(申鎭雨) 양씨는 역시 북한에 체류 중이고, 박용희(朴容羲) · 오하영(吳夏英) · 신의경(辛義卿) 씨 등은 이미 사퇴하였는데, 게다가 동당의 주동인물인 유석현(劉錫鉉) 씨마저 탈퇴하였다. 그러므로 동당의 기능은 실질상 마비상태에 놓여 있다”( 『경향신문』1948년 8월 24일)는 기사처럼, 남북협상을 기폭제로 하여, 민주독립당은 와해 상황으로 치달았다.
결국 1948년 9월 하순에 이르러서는 ‘중앙집행위원 및 감찰위원 각 지부 책임위원 374명 서명’으로 “당대표를 비롯하여 일부 당 간부가 북조선 선거를 계기로 당 노선과 배치되는 길을 걷고 있으므로, 우리들은 … …(중략) 부득이 민주독립당으로부터 이탈할 것을 결정”하였다는 성명서를 발표함에 따라, 해체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