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첩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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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내 공산주의자들의 활동 감시, 북한정권의 대남간첩활동 조사, 대북 첩보 · 정보수집 등 반공 · 방첩 · 정보업무을 수행하는 동시에, 이승만정부에 반대하는 정치세력에 대한 사찰 · 탄압 등을 담당한 군사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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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방첩대는 남한 내 공산주의자들의 활동 감시, 북한정권의 대남간첩활동 조사, 대북 첩보·정보수집 등 반공·방첩·정보업무을 수행하는 동시에, 이승만정부에 반대하는 정치세력에 대한 사찰·탄압 등을 담당한 군사기구이다. 1948년에 조선경비대총사령부 정보처의 특별조사과로 창설되었는데, 방첩대로 개편되었고, 특무대로 변경되었다. 한국현대사에서 방첩 업무를 담당하는 부대 전체를 포괄하는 대명사로 쓰이고 있다. 1960년 4·19혁명 이후 ‘육군방첩부대’, 1968년에는 ‘육군보안사령부’, 1977년 ‘국군보안사령부’, 1991년 ‘국군기무사령부’로 개칭되었다.

목차
정의
남한 내 공산주의자들의 활동 감시, 북한정권의 대남간첩활동 조사, 대북 첩보 · 정보수집 등 반공 · 방첩 · 정보업무을 수행하는 동시에, 이승만정부에 반대하는 정치세력에 대한 사찰 · 탄압 등을 담당한 군사기구.
개설

1948년 5월 27일 조선경비대총사령부 정보처의 특별조사과(Special Investigation Section)로 창설되어, 이후 ‘특별정보대’를 거쳐 방첩대로 개편되었고, 나중에는 ‘특무대’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방첩대(CIC, Counter Intelligence Corps)라는 명칭이 사용된 시기는 1949년 10월부터 1950년 10월에 이르는 1년여에 불과하지만, 이 기간만의 국군정보부대 명칭에 국한되지 않고 한국현대사에서 방첩 업무를 담당하는 부대 전체를 포괄하는 대명사로 쓰이고 있다.

미군정기의 미군방첩대 조직과 운용 방식 등을 기반으로, 이에 KDRK(Keep Dr. Rhee Korea) · 대한관찰부(Korean Research Bureau) · 방호국 · 사정국 · 통일사(TIS) · 대한정치공작대 등 이승만 대통령의 사조직 성격이 강했던 정보기구를 계승하는 성격도 함축되어 있다.

특별조사과 창설 당시 대장은 김안일이었고, 주요 도시에 파견대를 두었다. 주요 임무는 주요 인물에 대한 뒷조사, 남한 내 공산주의자들의 활동 감시, 북한정권의 대남간첩활동 조사, 대북 첩보 · 정보수집 등이었다. 대한민국정부 수립 이후에는 육군본부 정보국(국장: 백선엽) 1 · 2 · 3과로 개편되었고, 1949년 1월 당시 전국 주요도시에 15개의 파견대가 설치되었다.

내용

정보국의 활동이 확장 · 강화된 데에는 4 · 3제주도 민중항쟁, 여순반란사건 등으로 인한 위기감이 주요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여순사건 발생 직후인 1948년 11월 1일 정보국 특별조사과는 특별정보대(Special Intelligence Service)로 개칭되었고, 권한도 강화되었다. 특별정보대는 본격적인 숙군작업에 착수하여, 제3과장 김안일의 지휘 하에 김창룡 · 이세호 등이 이끄는 특별조사반의 주도 하에 1948년 11월부터 이듬해 9월 사이에만도 · 좌익 혐의를 받은 570여 명의 군인과 민간인 85명을 검거했다.

또 김창룡 중령과 오제도 검사 등이 참여한 ‘군 · 검 · 경 합동수사대’를 조직하여, 김종석 · 오일균 등 고위급 장교를 체포하였으며, 거물간첩 성시백을 체포하였고, 간첩활동 연루 혐의로 민간인 135명을 검거하였다. 이 과정에서 특별정보과는 정보수집 · 색출 · 검거 및 증거수집 등의 능력이 한 단계 상승되는 등 정보기관으로서의 역량이 향상되었다. 1949년 10월 특별정보대는 제2과 방첩대로 개칭되었고, 군 · 검 · 경 합동수사대를 예하로 편입하였다.

이후 한국전쟁 초기 이적성이 우려되는 집단인 좌익전향자로 구성된 보도연맹원과 정치범으로 간주된 형무소의 수용자의 학살을 주도하는 등 반공 좌익세력 척결의 최선봉 역할을 하였다.

1950년 8월 낙동강전선까지 밀린 전황을 배경으로, 종래의 부산지구 방첩대는 경남지구 방첩대로 개칭되었고, 김창룡 중령이 부대장에 임명되었다. 서울수복 후에는 경인지구 방첩대가 발족하여 군 · 검 · 경 합동수사본부를 설치하고(본부장: 김창룡, 1950. 10. 7∼1951. 5. 25), 북한군 점령기간의 적극적인 부역자 색출작업을 주도하였다.

합동수사본부 활동을 통해 김창룡을 위시한 정보장교들은 막강한 권력을 손에 넣었다. 1951년 5월 국회의 규탄에 의해 합동수사본부는 해체되었지만, 김창룡은 부역자 처벌의 공로를 인정받아 육군특무부대장으로 영전하였다. 학살현장을 목격하고 기억하는 주민들에게 방첩대는 경찰과 함께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방첩대는 정보를 빼내기 위해 많은 야만적인 수단을 사용했고, 민간인을 강탈하기도 했다.

변천

1950년 10월에는 제2과(방첩과)를 정보국에서 분리하여 육군본부 직할부대로서 특무부대(Special Operation Unit) 본부가 설치되었다. 일명 ‘1348부대’로 불렸고, 김형일이 초대 부대장에 임명되었다. 1951년 3월 당시 본부 인원 400여 명과 파견대의 민간정보원 190여 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본부 조직으로, 제1팀(특수작전팀)은 군 내부와 지역에 대한 특별감시 활동, 제2팀(정치경제팀)은 문화 · 예술 · 언론 · 라디오 분야의 정보수집과 정당활동 조사, 제3팀(조사안보팀)은 주요 인물의 배경 조사와 신분증명 파일 조사 등을 맡았고, 총무팀에 해당하는 제5팀이 있었다.

이와 함께 전국 주요지역( 안양 · 청주 · 대전 · 전주 · 광주 · 대구 · 포항 · 부산 · 마산 · 제주 · 영주)에 하부조직이 배치되었고, 육군 3개 군단 및 전방사령부와 각 군단 · 사단 별로 파견대가 배치되었다. 또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3월에는 북파공작을 임무로 하는 첩보부대(HID, Headquater of Intelligence Detachment)가 정보국으로부터 분리되었다.

1951년 5월 특무대장에 임명된 김창룡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직보하는 등 특무대장은 참모총장보다 큰 권력을 행사하였다. 1956년 특무대에는 특무과 · 조사과 · 재정과 등 5개 과가 있었고, 특무대 본부는 ‘1928부대’로 불렸다. 1956년 3월 1일 현재 소속 인원은 4,083명이었고, 전국 요충지역에 27개의 지부를 운영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으며 전국적인 정보망을 갖춘 특무대는 큼직큼직한 정치적 사건을 모의 · 주도하는 등 경무대의 비밀경찰 역할을 수행하였다.

1960년 4 · 19혁명 이후 ‘육군방첩부대’, 1968년에는 ‘육군보안사령부’, 1977년 ‘국군보안사령부’, 1991년 ‘국군기무사령부’로 개칭되었다.

참고문헌

「한국전쟁 전후 육군 방첩대(CIC)의 조직과 활동」(김득중, 『사림(史林)』36, 2010)
「해방직후 주한미군 방첩대의 조직체계와 활동」(정용욱, 『한국사론』53, 2007)
「한국전쟁 전후 국가정보기관의 형성과 활동」(김학재, 『제노사이드연구』2, 2007)
「전쟁을 전후한 첩보부대의 조직과 활동」(조성훈, 『한국전쟁사의 새로운 연구』,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02)
「1946년 이승만의 사설정보기관 설치와 단독정부 수립운동」(김혜수, 『한국근현대사연구』5, 1996)
집필자
한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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