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은 괴산군과 보은군, 서쪽은 세종특별자치시, 남쪽은 대전광역시, 북쪽은 진천군, 증평군, 충청남도 천안시와 접하고 있다. 동경 127°16′∼127°46′, 북위 36°24′∼36°46′에 위치한다. 면적은 940.31㎢이고, 인구는 83만 1912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4개 구, 3개 읍, 10개 면, 30개 행정동(82개 법정동)이 있다. 시청은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북문로3가에 있다. 2014년 청원군과 통합하여 통합 청주시가 되었다.
동부의 산지는 노령산맥의 지맥으로 괴산군의 좌구산(座龜山, 657m)에서 분기한 상당산(上黨山, 491m), 선도산(先到山, 546m) · 선두산(先頭山) · 관봉(冠峰) · 태봉(胎峰)의 순서로 남주하고 상당산에서 분기한 우암산(牛巖山, 349m)이 남서 방향으로 뻗어 시가지 동쪽에 급사면을 이루고 있다. 서부는 부모산(父母山, 282m) · 팔봉산(八峰山, 291m) · 망일산(望日山) · 국사봉(國師峰, 281m) · 봉무산(鳳舞山, 346m) · 작두산(鵲頭山, 429m) · 노고봉(老姑峰, 305m) 등의 잔구성 산지가 산재하고 있다.
상당구 낭성면 국절봉(564m)에서 발원한 무심천(無心川)이 북류하면서 시가지 중앙부를 통과해 청주시 흥덕구 원평동에서 미호천에 합류하고 있다. 무심천은 동쪽의 산지와 서쪽의 구릉지를 끼고 남북 방향으로 곡저평야를 형성하게 되었고 대부분의 평야는 범람원으로 비옥한 충적평야를 이루고 있다.
시역 내의 평지는 거의 시가지화되었으나 남쪽의 방서리 부근의 대머리평야와 북쪽의 무심천 하류의 오창평야는 비옥한 곡창지대를 이루고 있다. 상당산에서 발원한 금천(金川: 쇠내)이 서류하면서 용암동 명암지(明岩池)를 이루고 석교동 부근에서 무심천과 합류하고 있으나 부근의 대부분의 지역은 시가지화되었다.
지형이 풍수지리상 행주형(行舟形)이므로 용두사 철당간을 세워 청주의 발전을 도모했다고 하며 청주를 주성(舟城)이라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무심천은 동부와 서부를 구분하는 랜드마크(land mark)로서 유구한 역사와 더불어 청주를 키워준 생명선이며 맑고 깨끗한 청주의 이미지를 나타내는 청주시민의 친숙한 하천인데 고수분지와 주차장 시설이 있어 시민의 축제가 열리는 장소를 제공하고 있다.
내륙분지에 위치하고 있어 한서의 차가 심한 대륙성 기후를 나타내고 있으며 대청댐의 조성으로 안개가 가끔 끼고 있다. 연평균 기온은 13.3°C, 1월 평균 기온 –1.5°C, 7월 평균기온 27.7°이며, 연 강수량은 1,012㎜이다.
구석기시대의 뗀석기가 개신동 · 명암동 · 율양동에서 발견되었고, 신석기시대의 유물 · 유적이 내덕동 · 율양동에서 발견되어 이 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시대부터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한 나라가 이곳에 있었다.
삼국시대에는 백제가 먼저 이곳을 차지해 상당현(上黨縣) 혹은 낭비성(娘臂城) · 낭자곡(娘子谷)이라 했으며, 군사상 요충지로서 백제와 신라의 각축장이 되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인 685년(신문왕 5) 서원소경(西原小京)을 두고 아찬(阿飡) 원태(元泰)로 사신(仕臣)을 삼았으며, 689년 서원경성(西原京城)을 쌓았다.
757년(경덕왕 16) 서원경으로 승격되어 정치 · 군사적으로 중요시되었으며, 그 후 중부지방의 웅도로서 지방문화의 중심이 되었고, 770년(혜공왕 6)에는 왕이 순행(巡幸)하기도 하였다.
1933년 일본의 쇼소원(正倉院)에서 발견된 「신라촌락문서(新羅村落文書)」는 통일신라 때 서원경의 사해점촌(沙害漸村) · 살하지촌(薩下知村) 등 4개 촌의 호구수와 토지 결수 등을 기록하고 있어 당시 사회경제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이용되고 있다.
후삼국 때에는 태봉(泰封)과 후백제의 국경으로 군사상 요충지였으며, 청주시 및 주변 지역의 많은 산성터들이 대부분 이 무렵에 축성된 것으로 보여 당시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대변해준다.
940년(태조 23) 처음으로 주(州) · 부(府) · 군(郡) · 현(縣)의 명칭이 개정되면서 지금 이름인 청주(淸州)로 고쳐졌다. 983년(성종 2) 전국에 12목(牧)이 설치되면서 청주목으로 승격되었으며, 995년 12목이 폐지되고 10도(道) ·12절도사(節度使) 체제로 개편될 때 전절군(全節軍)이라는 절도사가 파견되고 중원도(中原道)에 속하였다.
1011년(현종 2) 거란의 침입으로 왕이 나주로 피난했다가 개경으로 돌아갈 때 이곳에 들러 행궁(行宮)에서 연등회(燃燈會)를 베풀기도 하였다. 다음해 절도사를 혁파하고 대신 안무사(安撫使)를 파견했으며, 1018년 전국에 8목을 설치할 때 다시 청주목으로 되었다.
그 뒤 5도 · 양계(兩界)의 지방제도가 정착되자 양광도(楊廣道)에 속했고, 연산군(燕山郡: 文義) · 목주(木州: 木川) · 진주(鎭州: 鎭川) · 전의현(全義縣) · 청천현(淸川縣) · 도안현(道安縣) · 청당현(靑塘縣) · 연기현(燕岐縣) · 회인현(懷仁縣) 등을 속현으로 거느렸다.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복주(福州: 安東)로 피난했다가 다음해 이곳으로 옮겨 7개월간 머물렀는데, 이곳이 삼도(三道)의 요충으로서 곡식을 운반하기 쉽고 바다와 멀리 떨어져 있어 가장 안전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근래 운천동에서 발견된 흥덕사(興德寺)터는 1377년(우왕 3)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인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직지심경)이 인쇄된 곳으로서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청주목으로 존속했으며, 1395년(태조 4) 한양 천도와 동시에 양광도 일부가 경기에 이속되고 나머지 지역이 충청도로 개칭되면서 충주목과 함께 그 계수관(界首官)이 되었다. 1449년(세종 31) 충청도관찰사로서 판목사(判牧事)를 겸하게 했다가 곧 폐지했고, 세조 때에는 진(鎭)을 설치했으며 2개 군, 10개 현을 관할하였다.
1505년(연산군 11) 이곳 출신 사람이 환관 이공신(李公臣)을 죽인 사건으로 청주목을 나누어 이웃 고을들에 분속시켰다가, 중종 때 청주목으로 복구하였다.
1591년(선조 24) 해미에 있던 병사(兵使)를 청주로 옮겨와 읍성 안에 머무르게 하고, 1594년 옥천에서 진을 옮겨와 영장(營將)은 성 밖에, 우후(虞候)는 상당산성에, 찰방(察訪)은 율봉역(栗峰驛)에 각각 주재했으며. 다음해 원균(元均)이 병사로 부임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왜장 구로다[黑田長政]에게 점거당했는데, 박춘무(朴春茂)가 맨 먼저 복대동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조헌(趙憲)과 영규(靈圭)의 의병이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1656년(효종 7) 종 억이(億伊)가 주인을 죽인 사건으로 말미암아 서원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667년(현종 8) 복구되었으며, 1680년(숙종 6)에도 생원 박상한(朴尙韓)의 기우제 제문 가운데 반역의 뜻이 있다 하여 서원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689년 복구되었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으로 서원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740년 복구되었고, 1777년(정조 1)에는 역적 효임(孝任)의 태생지라 하여 서원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812년(순조 12) 다시 복구되었다.
또, 1826년 역적 박형서(朴亨瑞)의 태생지라 하여 서원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835년(헌종 1) 복구되었으며, 1862년(철종 13) 대역죄인 김순성(金順性)의 태생지라는 이유로 또다시 서원현으로 강등되었다.
1870년(고종 7) 청주목으로 복구되었고, 1895년에는 청주군(淸州郡)으로 개편되었다. 1896년 13도제의 실시로 충청북도에 속했으며, 1908년에는 충주에 있던 관찰부(觀察府)가 청주로 이관되고 관찰사가 부임하였다. 이 사이에 1901년에는 큰 가뭄으로, 1906년에는 홍수로 많은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청주면으로 되고, 1931년 청주읍으로 승격되었다.
1946년 6월 1일 청주읍에서 부(府)로 승격되었고, 1949년 8월 15일 청주시로 개칭되었다. 1963년 1월 1일 청원군의 사주면(四州面) 일원이 편입되었으며, 1983년 2월 15일에는 청원군 강서면 일원과 강내면 석소리, 남일면 방서리, 낭성면 산성리가 편입되고, 용정동이 강서동으로 명칭 변경되었다.
1987년 1월 1일 강내면 정봉리와 신촌리, 남이면 죽림리가 편입되었고, 1989년 5월 1일에는 동부 · 서부 2개 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90년 8월 1일 남이면의 장성리, 남일면의 장암리 · 평촌리 · 지북리 · 운동리 · 월오리, 북일면의 주성리 · 주중리 · 외평리 · 외남리 · 외하리 · 오동리 · 정상리 · 정하리 · 정중리가 편입되었다.
1994년 1월 1일 영운동과 용정동 일부가 금천동에, 장암동 일부가 평촌동, 5월 1일 산남동 일부가 수곡동에, 12월 30일에는 방서동과 운동동 일부가 용암동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 1월 1일에는 동부출장소가 상당구로, 서부출장소가 흥덕구로 각각 승격되었다. 2014년 청원군과 통합하여 통합 청주시가 되었다.
선사시대의 유적지로는 흥덕구 개신동과 상당구 명암동 · 율양동에서 뗀석기가 출토되었으며, 상당구 내덕동과 율양동에는 선돌이 있다. 청동기시대 유적지로 상당구 사천동 · 용담동 · 용암동에서는 마제석검 · 석촉 · 돌도끼 등이 나오고 있다. 흥덕구 봉명동 월명산(月明山)에서는 철기시대의 유물인 세형동검과 토기편들이 출토되었다.
흥덕구에는 청주 신봉동 고분군(사적, 1987년 지정)이 있는데, 5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석실묘와 토광묘로 바닥에는 냇자갈과 모래 점토다짐을 했으며, 무기류와 마구류 및 백제토기가 출토되었다. 산남동의 고분군에서도 삼국시대의 입큰토기 등이 나오고 있다.
산성으로는 상당구 산성동의 상당산성(사적, 1970년 지정), 또한, 상당구의 청주 정북동 토성(사적, 1999년 지정)과 당산토성(唐山土城) · 와우산토성(臥牛山土城) · 부모산성(父母山城) 등이 있다.
주요 불교 유산으로는 흥덕구의 청주 운천동 출토 동종(보물, 1993년 지정) · 청주 운천동 신라사적비 · 운천동 사지(雲泉洞寺址), 상당구 용암동의 보살사(菩薩寺)에는 청주 보살사 극락보전 · 청주 보살사 오층석탑 · 청주 보살사 석조이불병립상 · 보살사 영산회괘불탱(보물, 1997년 지정) · 보살사 중수비, 청주 정하동 마애비로자나불좌상, 우암동의 청주 용암사(龍巖寺)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수동의 목우사지(牧牛寺址) 등이 있다. 운청동 신라사적비는 1983년, 보살사 극락보전은 1980년, 보살사 오청석탑은 1980년, 보살사 석조이불병립상은 1976년, 정하동 마애비로자나불좌상은 1982년, 용암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1976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또한,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경을 인쇄했던 흥덕구 운천동의 청주 흥덕사지(사적, 1986년 지정)와 사면석불, 사직동의 청주 용화사 석조불상군(보물, 1989년 지정), 모충동의 청화사(淸華寺)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상당구 용정동의 청주 순치명 석조여래입상(충청북도 유형문화재, 1985년 지정), 용담동의 백운사(白雲寺) 석불, 율양동의 청주 서기사 석조약사여래좌상(충청북도 유형문화재, 1993년 지정), 청주 탑동 오층석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1976년 지정), ‘준풍 3년(峻豊三年)’(962년, 광종 13)의 명(銘)이 양각되어 있는 남문로2가의 용두사지 철당간(국보, 1962년 지정) 등이 있다.
흥덕구 운천동 고인쇄박물관에는 범망경보살계본 및 수보살계법(보물, 2004년 지정) · 금강반야바라밀경(보물, 2004년 지정) · 대방광불화엄경소 권48, 64, 83(보물, 2004년 지정) 등이 있다.
유교문화재로는 상당구 대성동의 청주향교(충청북도 유형문화재, 1977년 지정), 용정동의 신항서원(충청북도 기념물, 1984년 지정) 등이 있다.
주요 건축물로는 상당구 남문로1가의 청주 망선루(충청북도 유형문화재, 1982년 지정), 남문로2가의 충청도병마절도사영문(충청북도 유형문화재, 1976년 지정) · 청녕각(충청북도 유형문화재, 1982년 지정), 수동의 청주 표충사(충청북도 기념물, 1977년 지정) · 청주 성공회 성당(충청북도 유형문화재, 1985년 지정), 흥덕구의 청주 신전동 고가(충청북도 유형문화재, 1985년 지정), 상당구의 청주 탑동 양관(충청북도 유형문화재, 1983년 지정) 등이 있다.
이 밖에 흥덕구 수의동의 청주 충렬사(충청북도 기념물, 1977년 지정)와 송상현 묘소 및 신도비(충청북도 기념물, 1984년 지정), 상당구 방서동의 방정(충청북도 기념물, 1990년 지정) · 무농정(충청북도 기념물, 1990년 지정), 남문로2가의 청주 조헌 전장기적비(충청북도 유형문화재, 1984년 지정) · 청주 척화비(충청북도 기념물, 1878년 지정) · 영규대사(靈圭大師) 전장기념비, 북문로1가의 조선왕조의궤(보물, 2016년 지정), 운동동의 청주한씨 시조제단비(충청북도 유형문화재, 1990년 지정), 명암동의 청주 곽예 묘소 (충청북도 기념물, 1977년 지정) · 청원사(淸原祠), 모충동의 모충사(慕忠祠) 등이 있다.
청원사는 고려 후기의 명현(名賢)인 곽예(郭預)의 영정을 봉안하고 제향(祭享)하는 사당으로, 청주곽씨 문중에서 1974년에 건립했는데, 이 사당 아래에는 곽예의 묘소와 신도비가 있다. 모충사는 동학군을 진압하다가 전사한 70여 장졸들의 영령을 봉안한 사당으로 여러 번 옮겨지다가 1975년 현재 위치에 세워졌다.
남문로1가에는 남석교(南石橋, 일명 돌다리 또는 남다리)라는 다리가 있었는데, 순 쑥돌로 만들었으며, 길이 8.5m, 너비 3m 규모의 이층교량으로 한국식 대청마루를 놓듯 돌의 널판을 긴네모꼴로 만들어 맞추어 놓았다 한다. 예로부터 정월 보름에 답교(踏橋) 풍속이 있어 자기 나이 수대로 이 다리를 건너면 그 해 각력(脚力)의 신효(神效)를 얻었다고 하며, 이 다리가 패이면 나라가 흥하고 묻히면 망한다는 전설이 있는 다리였으나 1932년 일본인에 의해 매몰되었다.
한편, 흥덕구 개신동의 충북대학교 박물관에는 김길통 좌리공신교서(보물, 1981년 지정) · 청주 출토 순천김씨 의복 및 간찰(국가민속문화재, 1979년 지정) · 청원 구례손씨 묘 출토유물(국가민속문화재, 1981년 지정) · 청원 전 박장군 묘(傳朴將軍墓)출토유물(국가민속문화재, 1981년 지정) · 중원 김위(金緯) 묘 출토유물(국가민속문화재, 1981년 지정) · 안동김씨 묘 출토의복(국가민속문화재, 1987년 지정), 상당구 내덕동의 청주대학교 박물관에는 눌재강수유고목판(충청북도 유형문화재, 1995년 지정), 흥덕구 운천동의 청주고인쇄박물관에는 분류두공부시(언해) 권21( 보물, 2004년 지정) · 성리대전서절요(보물, 2004년 지정) · 송상현 문적(충청북도 유형문화재, 2003년 지정) · 것대산(거질대산) 봉수(충청북도 문화재자료, 1998년 지정) 등이 소장되어 있다.
또한 수동에는 금속활자장(국가무형문화재, 1996년 지정), 흥덕구 강서1동에는 청주 농악(충청북도 무형문화재, 1992년 지정), 흥덕구 봉명2동에 배첩장(충청북도 무형문화재, 1999년 지정)이 전승되고 있다.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으로는 대성동에 청주향교(淸州鄕校)가 있다. 그리고 1570년(선조 3) 설립되어 1660년(현종 1) 사액된 뒤 1871년(고종 8) 서원철폐령에 의해 폐쇄된 신항서원이 1957년 지방유지들에 의해 용정동에 중건되었다. 또 분평동에 있는 구계서원(龜溪書院)은 1613년(광해군 5) 괴산군 도안면 석곡리에 설립된 것을 6·25전쟁 후 지금의 장소인 동고사(東皐祠)자리로 옮긴 것이다.
이 밖에 숙종조에 설립된 월오동의 봉계서원(鳳溪書院)과 내곡동의 송계서원(松溪書院), 운동동의 운곡서원(雲谷書院) 등이 있으며, 이이(李珥)가 청주목사로 부임해 서원향약(西原鄕約)을 제정해 시행토록 함으로써 그 유훈(遺訓)이 이 고장에 뿌리내리고 있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미국 북장로교회 소속의 선교사 밀러(Miller, F. S.)가 건립한 현 청남초등학교의 전신인 광남학교(廣南學校)가 최초의 것이다. 그 뒤 1907년 청주보통학교가 개교했는데, 1911년 청주공립보통학교로 개칭되었으며 현 주성초등학교의 전신이 된다. 중등교육기관으로는 현 청주농업고등학교의 전신인 청주공립농업학교가 1911년 개교하였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94개교, 중학교 46개교, 고등학교 37개교, 특수학교 4개교와 청주교육대학교, 충북대학교, 청주대학교, 서원대학교, 한국교원대학교, 꽃동네대학교, 충북보건과학대학교, 충청대학교, 공군사관학교 등이 있다.
이 밖에 충청북도 예술 · 문화활동의 중심체로서 충북예술문화회관이 있고, 시민과 학생의 독서활동을 위해 청주시립도서관과 충북학생도서관이 있으며, 시민교양강좌와 문화활동을 주관하는 청주문화원과 청주시민회관이 있다. 또한 청주박물관이 1986년 개관했으며, 음악활동을 위한 청주시립교향악단 · 청주시립합창단 · 청주시립국악단이 있다.
한편, 한국국악협회 충북지부에서는 매년 정월 대보름날과 단오절에 망월제(望月祭)와 단오제(端午祭)를 개최해 이 지역 전통문화의 발전과 보존에 기여하고 있다.
청주시에 전하는 민속놀이로는 농악 · 씨름 · 그네뛰기 · 윷놀이 · 연날리기 · 자치기 등이 있다.
농악은 풀매기 · 벼심기 등 힘든 일을 할 때 수고를 덜고 일의 능률을 올리기 위해 거행되었지만, 정초 · 단오 · 백중 · 추석 등의 명절날에는 온 주민들과 함께 즐기는 오락적 기능도 담당하였다. 특히 정초의 경우에는 오락일 뿐만 아니라 신앙적 행사의 구실도 하여,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지신밟기 등의 액막이굿과 우물을 도는 샘굿을 하기도 하였다.
농악대의 구성은 대개 상쇠를 비롯해 징 · 장구 · 북 · 소고 등을 치는 사람들, 농기(農旗)와 영기(令旗) 1쌍, 무동 · 대포수 등 흥을 돋우는 무리 등 10∼20명으로 구성되었고 가락은 주로 자진모리를 썼다.
씨름은 단오절과 상원일(上元日)에도 거행되었지만 백중일에 가장 성대하게 벌어졌다. 백중은 머슴들의 명절이며 씨름이야말로 이들의 힘을 과시할 수 있는 최상의 기회였다. 경기는 백사장에 적당한 넓이의 원형 씨름판을 만들어 놓고 거행했는데, 큰 씨름판이 벌어지면 남녀노소 함께 술과 음식을 장만해 구경하며 하루를 즐겼다.
자치기는 어린이 놀이로서 적당한 길이의 긴 막대기와 짧은 막대기 두 개를 사용해 논다. 놀이 방법은 둘 또는 그 이상의 어린이들이 편을 갈라 땅바닥에 원을 그려 놓고 긴 막대기로 짧은 막대기를 쳐서 날려 보내는데, 이것을 상대방이 잡으면 편을 바꾸고 못 잡으면 날아가 떨어진 막대기와 원까지의 길이를 재어서 자수내기를 한다. 이 밖에도 제기차기 · 고누 · 장치기 등의 놀이가 있다.
이 시의 동제는 다른 시 · 군에 비해 빈약한 편이다. 일찍이 행정도읍의 기능을 가지고 상업도시로 발전한 것이 주원인인 것 같다. 산간지방의 마을에서는 동제를 지냈던 곳이 다수 있었으나 근래에 거의 자취를 감춘 형편이다.
최근 청주시에 편입된 월오동과 운동동 등 동남부의 마을에서만 아직도 동제가 이어지고 있다. 월오동의 장승제는 남녀 장승을 모시는데 장승은 2년에 한 번씩 정월 대보름에 세운다. 정월 대보름날 아침에 제를 올리며, 동네 뒷산인 선도산(先到山)의 입석 2기를 선도할아버지와 선도할머니라 칭해 함께 모신다.
운동동은 돌할아버지와 돌할머니라고 칭하는 돌미륵을 모시는데, 옛날에 마을사람들이 현몽에 의해 흙 속에서 파낸 것이라고 한다. 정월 14일 밤에 제물을 차리고 이장 부인이 제주가 되어 제사를 지내며, 부녀자들만이 참여하는 특이한 동제이다.
그 밖에 동민이 모두 참여하는 동제의 형태는 찾아볼 수 없으나 개인적인 치성이나 고사 행위가 많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시내 동편의 우암산은 민간신앙의 온상으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청주는 예로부터 주성(舟城)이란 이름으로 불려졌다. 지형이 배의 모양을 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인데 이에 대한 전설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고려 초 혜원(慧園)이란 스님이 있었는데 “배가 풍랑에 떠내려가지 않게 돛대를 세우라.”는 부처의 현몽을 얻고는 장소를 몰라 고심하던 중 어느 초립동 과객이 절 앞뜰에서 “이 땅에 소금배가 들어올텐데 돛대가 없구나.”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주지방에서 이 소리를 들은 혜원스님이 급히 밖으로 나와 그 위치를 물으니 “목암산(현 우암산)에 올라가 사해(四海)를 정관하라.”하고 사라졌다. 혜원스님이 목암산에 올라 지세를 살핀 지 열흘 만에 깨닫고는 내려와 용두사(龍頭寺) 경내에 철당간(鐵幢竿)을 세웠고, 그 후로 주성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우암산은 청주의 동편에 가로누운 시의 진산인데 소가 앉아 있는 형국이다. 토정 이지함(李之菡)이 이곳을 지나다가 황소 모습의 웅장한 산세를 발견하고는 급히 달려가 신비스런 묘혈을 찾아냈다. 흡사 소가 앉아 있는 배 부분에 해당하는 곳에 바위를 굴려 표시하고는 “이곳은 장수에게 적합한 곳이니 보통사람은 건드리지 말라.”는 푯말을 세워 놓고 떠났다.
그때 진천에 사는 조풍수(趙風水)라는 사람이 이곳에 당도해 푯말을 뽑아내고 가묘를 써버렸다. 그러자 눈에 황금불을 켠 우두장군(牛頭將軍)이 입에 피를 흘리며 가묘 속으로 가라앉아 화석으로 변했는데, 지금도 그 화석묘가 있다는 풍수설화가 전한다.
신라시대 남천(南川: 無心川)가에 살던 어느 부인이 탁발하러 온 대원사(大元寺)의 스님에게 어린애를 잠시 맡겨놓고 문안으로 일을 보러 갔다. 그런데 스님이 잠시 잠든 사이에 어린애는 남천 외나무다리를 건너다가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이를 안 대원사 주지승은 스님들을 동원해 남천에 돌다리를 놓아 주었는데 이것이 남석교이고, 다리를 놓을 때 막을 치고 일을 하던 곳이 동막골[東幕谷]이라 하여 오늘에 전해온다.
이 밖에도 신라의 왕이 서원경(西原京)을 순행할 때 가마가 머물렀다는 가자골[駕在谷], 용이 승천했다는 용막골, 우마혈(牛馬穴)을 끊어 패가한 천석꾼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천석골[千石谷] 등 지명에 얽힌 전설이 많이 있다.
이 지방에서 주로 발견되는 민요는 농요인데, 종류와 내용이 매우 풍요롭고 다채롭다. 주민들의 대부분이 농업에 경제적 기반을 두고 있으므로 농업노동요가 풍성한 편이다.
특히 지동동의 논매는 노래 중 「안팡게소리」는 충청북도 지방의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의 것으로 조사, 보고되었다. “안팡게 에에에야/안팡 에에게로다/안팡게 에에에야/안팡 에에게로다.”라는 가사만으로는 의미를 찾아보기 어려운데, 소리가 유사한 단어로 암팡지다(야무지고 다부지다, 당차고 담이 크다)에서 나온 ‘암팡지게’를 생각해볼 수도 있다. 암팡지게 논을 맸다는 뜻으로 반복해서 부른 것 같다.
가창면에서 살펴보면 이 노래는 5음 음계로 이루어져 있고 아악적 요소가 짙으며, 또한 장구장단도 창자(唱者)와 서로 잘 어울려야 하므로 웬만큼 음악적인 재질이 있지 않고는 부르기 힘든 노래이다.
또한 형태의 특징으로서 일반적인 민요들이 선소리가 있고 나머지 사람들이 받는 소리를 하는데 반해, 이 노래는 논매는 일손을 멈추고 허리를 펴고 선 채로 마음껏 노래 재주를 과시하며 흥을 돋우고 대신 다른 농부들이 노래하는 사람 앞에서 논을 매며 나간다. 이 노래는 다른 지역의 민요형태와 더욱 비교, 연구될 만한 가치가 있다.
한편 영운동의 농요나 복대동의 「각설이타령」 · 「메밀노래」 · 「고사리요」 등에 나타나는 현실인식도 일반적으로 평탄한 정서를 유지시켜 준다. 이 지방 민요는 대체로 안정된 생활에서 비롯된 평탄한 정서와 감정의 기복이 적은 것을 특색으로 하고 있다.
이 시의 토지 이용을 보면 총 면적 153.41㎢ 중 임야 46.55㎢, 논 29.78㎢, 밭 16.96㎢, 대지 21.65㎢, 기타 38.47㎢를 나타내고 있어 경지면적은 논이 밭보다 훨씬 많다.
주요 농작물로는 대머리평야와 무심천 하류의 평야에서 미곡을 비롯해 무 · 배추 · 오이 · 토마토 · 호박의 채소류와 사과 · 포도 등의 과실류를 많이 생산하고 있다.
중심상가의 분포는 중앙업무지구의 핵심부와 그것에 인접한 주위의 주로(主路)와 부로(副路) 그리고 이들의 가장자리에 분포하고 있고 시장의 주변이나 교통의 요로에는 근린상점가로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중심상가는 흥업상가로와 사직로 2개 구간에 나타나고 있는데 이곳은 번화가로 대표하는 귀금속 · 양복 · 양품 · 오락용품 등의 상가와 각종 사무실이 집중하고 있다. 특히 흥업상가로는 고급양복, 양품점이 27.4%나 밀집된 곳으로 가장 번화한 곳이다.
군집상가도 여러 곳에 나타나고 있는데 남주동의 가구점골목은 과거 약전골목이였던 곳이다. 음식료품, 담배 제조업은 간선도로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길게 분포하고 있고 동서 간선도로 북쪽에 2개의 집적지역을 나타내고 있으며 섬유 · 의복 · 피혁공업은 청주공단과 남북 간선도로 남쪽에 1개의 집적지역을 나타내고 있다.
제재 · 목재품 · 가구 제조업은 남북간선도로를 따라 남북 방향으로 집적을 이루고 있고 종이, 종이제품 · 인쇄출판업은 섬유 · 의복 · 피혁공업의 지역적 분포와 유사하다.
화학 · 석유 · 석탄 · 고무 · 플라스틱 제조업은 다른 부분과는 달리 동서 간선도로의 북부지역에 2개의 집적지역을 나타내고 있고 가장 업체가 많은 비금속 광물제품 제조업은 분산해 분포하고 있으며, 금속제품 · 기계 · 장비 제조업은 공단지역과 남부 간선도로에 집중하고, 기타의 제조업은 남북 간선도로의 남쪽에 집중해 있다.
청주산업단지는 1969년 1단지 조성을 시작으로 1989년 4단지가 준공되기까지 20여 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단지 조성되었다. 흥덕구(송정 · 향정 · 복대 · 지동 · 비하 · 송절 · 봉명동) 일원 409만 8000㎡(124만 평)의 부지에 섬유, 전자,전기, 식품, 석유화학, 도자기 등 다양한 업종의 260여 개 기업이 입주해 있다. 생산액은 연간 8조원대로, 수출 금액도 48억 달러에 이른다. 고용 인원은 2만 3000여 명에 달한다.
업종별로 보면 조립금속, 기계(전자, 전기) 업종이 가장 많고 음식료품업체, 출판인쇄 및 기록매체 복제업체 순으로 업체가 적어지고 있고, 종업원수로 보면 평균 94.5명 정도로 조립금속 · 기계 업체가 가장 많고 가죽가방 및 신발제조업이 가장 작다. 자본금별로 보면 10억 미만의 업체가 반 정도이고 50억 이상의 업체는 4분의1 정도가 된다.
일반소매시장으로는 서문동의 서문시장, 우암동의 북부시장과 우암종합시장, 모충동의 남부상가, 북문로2가의 중앙시장, 후생사, 대현지하상가, 복대동의 복대시장, 사창동의 신라쇼핑센타, 내덕동의 내덕시장 등 12개가 있다.
신봉동의 청주농수산물 도매시장에는 청주청과, 청주수산, 충북원협 등이 있어 도내에서 가장 많은 농수산물을 도매하고 있다. 이 밖에도 북문로1가의 흥업백화점, 남문로2가의 롯데 영플라자 등이 있다.
교통은 국도 17호가 진천∼대전, 25호가 청주∼보은, 36호가 증평∼세종특별자치도 조치원읍에 연결되어 있어 편리하다. 중부고속도로와 경부고속도로도 서부를 통과하고 있다. 철도는 충북선, 경부고속철도, 호남고속철도, 수서고속철도가 모두 지나는 오송역이 있어 편리하다. 한편 인접한 청원구 내수읍 입상리에 청주국제공항이 있어 중부권 거점공항으로서 국제교류의 축을 담당하고 있다.
이 시의 관광지로는 명암 지구 · 우암산 지구 · 중앙공원과 상당공원 등을 들 수 있다. 명암 지구에는 명암지(明巖池), 청주박물관과 우암어린이회관 · 명암약수 · 상당산성 등이 있다. 명암지는 용담동에 있는 저수지로 청원농지개량조합에서 관리하고 있으나 시가지의 개발로 이미 농업용수의 공급기능은 쇠퇴하고 낚시꾼과 보트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이 자주 찾는 유원지가 되고 있다.
부근에는 국립청주박물관이 있어 청주를 중심으로 한 각종 문화재와 역사를 관람할 수 있고 우암 어린이회관은 어린이들 위한 각종 놀이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상당산 아래의 명암약수터는 이미 약수터로서는 부적합하나 주위의 경관이 아름답고 호텔 등의 시설이 있어 많은 행락객들이 찾아들고 있다.
산성리의 상당산성이 사적으로 지정된 유서 깊은 산성으로 최근에 산성을 복원하고 주변에 향토 음식전문의 한옥촌을 건립해 관광지함으로써 많은 시민들이 찾고 있다. 우암산 지구는 시의 동쪽 우암산을 중심으로 순환도로가 개설되어 있고 등산로가 개설되어 많은 사람들이 등산과 약수를 즐기는 휴식처로서 산정에는 토성의 유적이 있다.
수동의 우암산 입구의 3·1공원에는 3·1운동 유공자의 동상이 서 있다. 뿐만 아니라 우암산은 많은 사찰과 암자 등이 있는 불교유적의 보고가 되고 있고 청주시내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훌륭한 전망대가 되고 있다.
중앙공원은 시내 한 가운데의 도시공원으로서 이곳은 과거 관찰사가 있었던 감영이였으며 공원 내에는 압각수(鴨脚樹) · 청녕각(淸寧閣) · 한봉수 의사비 등의 문화재가 있는 시민의 휴식처이다. 부근에는 용두사철당간과 망선루(望仙樓) 등이 있다. 상당공원(上黨公園)은 중심부의 상당로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는 조그마한 공원으로 중앙공원과 함께 훌륭한 휴식처가 되고 있다.
운천동의 흥덕사지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경을 출판한 곳으로 청주고인쇄박물관이 건립되어 있어 가볼 만하다.
시의 동부에 위치한 구. 면적 69.03㎢. 인구 17만 6424명(2015년 현재). 구청 소재지는 우암동이다. 1910년 충청북도 도청소재지가 되었고 1948년 청주읍이 시로 되었으며 1989년 동부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95년 상당구가 설치되었다.
동부는 상당산(491m) · 선도산(546m) · 선두산 · 관봉 · 태봉(胎峰) 등의 산들이 남주하고 상당산에서 분기한 우암산(349m)이 남서방향으로 뻗어 시가지 동쪽에 급사면을 이루고 있고 상당산에서 발원한 금천이 명암계곡에서 명암지를 이루면서 서류해 석교동 부근에서 무심천에 흘러든다.
시가지의 중앙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무심천 유역의 방서리에는 대머리평야가 발달하고 있다. 용담동의 명암지는 1918년에 기공해 1921년에 준공되었으며 봉리면적 198정보로서 청원농지개량조합에 관리하고 있으나 이제는 농지가 거의 시가지화 되어 농업용수의 공급기능은 쇠퇴하고 유원지화되었다.
구시가지의 지역으로서 서문동의 서문시장, 우암동의 북부시장과 우암종합시장, 북문로2가의 중앙시장, 후생사, 대현지하상가 등의 일반소매시장과 북문로1가의 흥업백화점, 남문로2가의 진로백화점 등이 있다.
중심상점가는 성안길을 중심으로 남쪽으로 남주동 시장, 북쪽으로 중앙시장의 거리에 집중하고 있다. 흥업백화점을 중심으로 한 흥업상가로는 가장 핵심적인 중심상점가로서 고급화, 전문화된 업종이 많으나 아직은 규모가 작고 문화도 아주 뚜렷한 편은 아니다.
핵심상가를 둘러싸고 있는 성안길의 청주우체국 옆 거리는 양복 · 양품점만도 57.1%로 비율이 매우 높고 서비스와 귀금속의 비율도 높다. 청주 상공회의소 도로, 상당공원∼육거리 간, 남문로2가, 남주동 등 핵심상가에서 보다 떨어진 지역은 주로 기성복, 학생상대의 제품을 취급하는 상가가 많다.
가구상은 남주동, 남문로1가 등에 걸쳐 동서로 분포하고 기계 · 부속품 상가는 서문동∼남주동과 우암동에 남북으로 분포하고 있다. 도청 · 경찰서 · 시청 등이 있어 음식점과 소규모의 인쇄, 인장점이 많고 은행가와 고속터미널 부근 간의 지역은 다방 · 음식점이 많다.
탑동 · 대성동 · 서운동 · 남문로1가 · 서문동 등은 섬유 · 의복 · 피혁공업, 제재 · 목재품 · 가구제조업, 종이 · 종이제품 · 인쇄출판업, 기타 제조업 등 4개 부문이 공통적으로 특화되어 있고 석교동과 수동은 제재 · 목제품 · 가구제조업, 기타 제조업이 특화되어 있으며 금천동은 음식료품, 담배제조업, 제1차 금속제조업 기타 제조업 등 3개 부문이 공통적으로 특화되어 있다.
영운동 · 내덕동은 섬유 · 의복 · 피혁공업, 비금속 광물제품 제조업이 공통적으로 특화되어 있고 용암동 · 용정동 · 방서동은 섬유 · 의복 · 피혁공업, 고무 · 플라스틱 제조업, 비금속 광물 제조업이 특화되어 있다.
영동, 북문로2가, 북문로3가, 우암동은 음식료품, 담배 제조업, 목재 · 제재 · 가구 제조업, 종이 · 종이제조업 · 인쇄출판업이 공통적으로 특화되어 있고 용암동 · 명암동 · 삼성동은 기타의 제조업이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명암 지구에는 명암지, 국립청주박물관, 우암어린이회관, 호텔 등이 있고 가까이 유서 깊은 상당산성이 있어 시민들이 즐겨 찾는 휴식처가 되고 있다.
시내버스로 연결되는 경부선의 조치원역이 가까이 있고 충북선의 오근장역과 경부고속도로와 중부고속도로의 승객 터미널이 있으며 시가의 중심지역을 중심으로 충주방면, 대전방면, 보은방면 등의 도로가 정비되어 교통은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산성동의 상당산성 · 중앙공원의 청녕각 · 조헌 전장기적비, 남문로2가 용두사지 철당간, 남문로1가의 망선루, 북문로1가의 청주 청녕각, 북문로3가의 척화비, 용암동의 보살사 석조이불병립상 · 극락보전 · 오층석탑, 우암동의 용암사 비로사나불좌상, 수동의 청주 성공회 성당 · 표충사, 탑동의 탑동 양관, 용정동의 순치명 석조여래입상 · 신항서원, 방서동의 방정 · 무농정, 용암동의 연담공 묘소, 운동동의 청주한씨 시조제단비 등이 있다.
영동(榮洞) · 북문로1가(北門路1街) · 북문로2가 · 북문로3가 · 남문로1가(南門路1街) · 남문로2가 · 문화동(文化洞) · 서운(西雲洞) · 서문동(西門洞) · 남주동(南洲洞) · 석교동(石橋洞) · 수동(壽洞) · 우암동(牛巖洞) · 내덕동(內德洞) · 율량동(栗陽洞) · 사천동(斜川洞) · 탑동(塔洞) · 대성동(大成洞) · 영운동(永雲洞) · 금천동(金川洞) · 용담동(龍潭洞) · 명암동(明巖洞) · 산성동(山城洞) · 용암동(龍巖洞) · 용정동(龍亭洞) · 방서동(方西洞) · 월오동(月午洞) · 운동동(雲東洞) · 지북동(池北洞) · 평촌동(坪村洞) · 주중동(酒中洞) · 주성동(酒城洞) · 외남동(外南洞) · 외하동(外下洞) · 외평동(外坪洞) · 오동동(悟東洞) · 정북동(井北洞) · 정상동(井上洞) · 정하동(井下洞) 등 39개 동이 있다.
시의 서부에 위치한 구. 면적 84.41㎢, 인구 25만 3426명(2015년 현재). 구청 소재지는 사직동이다. 1910년 충청북도 도청소재지가 되었고 1948년 청주읍이 시로 승격되었으며 1989년 서부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95년 청주시의 분구로 흥덕구가 설치되었다.
동부는 무심천을 경계로 상당구와 접하고 있고 서부는 부모산(232m) · 팔봉산(八峰山, 291m) · 망일산(望日山) · 국사봉(281m) · 봉무산(鳳舞山, 346m) · 작두산(429m) · 노고봉(305m) 등의 잔구성 산지가 산재하고 있다.
무심천이 흐르는 수곡동, 분평동 일대에는 넓은 평야가 전개되어 있고 하류의 운천동 일대에도 평야가 발달되어 있다. 무심천 부근에도 사직산(社稷山) · 구룡산(九龍山, 163m) 등이 있으나 거의 시가지화 되었다.
주요 농산물로서는 미곡, 겉보리의 주곡작물과 무 · 배추 · 양배추 · 오이 · 호박 등의 채소류와 포도 등의 과실류를 생산하고 있는데 강서동은 상당구의 오근장동과 함께 청주시의 최대의 미곡생산지역이 되고 있다.
신시가지 지역으로 모충동의 남부상가, 사직동의 삼주상가, 사직종합시장, 사창동의 사직종합시장, 복대동의 복대시장 등의 일반소매시장과 신봉동의 청주농수산물 도매시장 등이 있다. 상업 중심지는 사직로인데 이곳은 흥업상가로와 함께 청주시의 2대 핵심 상점가를 이루고 있다. 최근에는 영운동의 무심천 연변에 새로운 음식점이 많이 들어서고 있다.
모충동은 음식료품 · 담배 제조업, 제1차 금속제조업, 기타 제조업이 특화되어 있고 가경동과 복대동은 섬유 · 의복 · 피혁공업, 비금속 광물제품의 제조업이 특화되어 있으며 사천동 · 산남동 · 미평동 · 분평동 · 수곡동은 제재 · 목제품, 가구 제조업, 비금속 광물 제조업이 특화되어 있다.
봉명동과 송정동은 섬유 · 의복 · 피혁공업, 화학 · 섬유 · 석탄 · 고무 · 플라스틱 제조업, 금속제품 · 기계장비 제조업이 특화되어 있고 사직2동과 사창동은 섬유 · 의복 · 피혁공업, 화학 · 섬유 · 석탄 · 고무 · 플라스틱 제조업, 금속제품 · 기계장비 제조업이 공통적으로 특화되어 있다. 강서2동은 기타의 공업이 특화되고 있다.
청주공업단지는 중부권 개발사업의 하나로 조성된 전형적인 내륙 공업단지인데 총4개 단지로 409만 8000㎡(124만 평)의 부지에 260여 개 기업이 입주해 있고 고용 인원은 2만 3000여 명이다(2008년).
1992년 통계분석에 의하면 총 336개 업체 중 조립금속 · 기계(전기 · 전자) 업체가 75개로 전체의 38.4%, 화합물 및 화학, 고무 플라스틱제품 · 33개로 17.6%, 섬유 · 의복 업체가 17개(가죽가방 및 신발 제조업이 2개)로 13.6%를 차지하고 있고, 출판인쇄 및 기록매체 복제업 15개, 음식료품 29개) 종업원 수를 보면 조립금속 · 기계 업종의 종업원이 전체의 52.5%(4%)를 차지하고 있고 업체당 평균 종업원 수는 199(94.5명)명이 되고 있다.
교통은 충북선의 청주역과 시내버스 터미널이 있으며 서부지역에서 남북으로 경부고속도로와 중부고속도로가 통과하고 있으며, 시가지 서부 우회도로가 개설되어 교통은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개신동의 충북대학교박물관에 김길통 좌리공신교서, 청원 구례손씨 묘 출토유물과 청원 전 박장군 묘 출토유물 등이 있으며, 개신동의 순천김씨 묘 출토 의복 및 간찰, 신봉동의 백제고분, 운천동의 흥덕사지 · 신라사적비, 사직동의 용화사 칠존미륵불, 신성동의 신성동 고가, 수의동의 송상현 묘소 및 신도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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