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박물관회의헌장(ICOM憲章)에서는 박물관을 “예술 · 역사 · 미술 · 과학 · 기술에 관한 수집품 및 식물원 · 동물원 · 수족관 등 문화적 가치가 있는 자료 · 표본 등을 각종의 방법으로 보존하고 연구하여, 일반 대중의 교육과 오락을 위하여 공개 전시함을 목적으로 이룩된 항구적 공공 시설”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넓은 의미의 박물관은 미술관이나 과학관 이외도 기술관 · 공립 기록 보존소 · 사적 보존 지역까지도 모두 포함된다.
박물관의 종류는 그 분류 방법에 따라 몇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 설립자에 따라서 국립 박물관 · 공립 박물관 · 사립 박물관 등으로 나누어진다. 둘째 전시하는 내용에 따라서 종합 박물관과 전문 박물관으로 나누어진다.
종합 박물관은 말 그대로 여러 종류의 전시품을 함께 모은 것이며, 전문 박물관은 고고학 · 역사 · 미술사 · 인류학 분야 등에서부터 민속학 · 자연사 · 산업 · 체신 · 교통 · 의약 · 서도 등으로 세분된다.
박물관을 의미하는 영어의 뮤지엄(museum), 프랑스어의 뮤제(musee), 독일어의 뮤제움(Museum) 등은 모두 고대 그리스의 뮤즈(Muse) 여신에게 바치는 신전 안의 보물 창고인 무세이온(museion)에서 유래한다. 이것이 세계 최초의 박물관 형태라고 전해지고 있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말하는 박물관과 같은 기능을 가지게 된 것은 서기전 3세기경 이집트의 수도 알렉산드리아에 있었던 무세이온에서 비롯되었다. 이곳에서는 각종의 수집품과 도서를 이용하여 문학 · 철학 · 미술의 진흥을 꾀하였다. 그 뒤 로마시대에 들어와서는 가정용 소박물관이 많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중세 때는 각 사원(寺院)이 박물관으로서의 구실을 하는 동시에 귀족이나 부호가 독점하고 있던 미술품 기타 수집품들이 일부 예술가나 학자에게 공개되었다.
근세에 들어서는 인도 항로의 개통, 신대륙의 발견, 문예 부흥 등으로 차차 시야가 넓어지게 됨에 따라 각종의 자료를 수집하고 전시하는 등 근대적인 박물관의 기능이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방대한 수집품들은 대학이나 공공 박물관 등으로 흘러 들어가 오늘날의 큰 박물관이나 대학 박물관을 형성하는 기초가 되기도 하였다.
그 뒤 산업 혁명 · 부르주아 혁명의 영향으로 도시가 발전하면서 박물관 · 미술관 등의 설립이 늘어난다. 그리고 뒤이어 만국 박람회(萬國博覽會)가 개최됨으로써 박물관 발전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1845년 영국 의회에서 박물관령(博物館令)이 공포, 통과되어 박물관은 공공 기관이며 교육 기관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전국의 박물관이 공비(公費)로써 건설, 유지될 수 있게 되었다.
그 뒤 박물관의 기능이 중요시되어 제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박물관은 급진적인 증가 추세를 나타내기에 이르렀다. 서양에서의 박물관의 기원과 변천에 비교하여 우리 나라에서도 고대 사회에서 초기 형태의 박물관 시설로 인정되는 것이 기록과 유적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삼국사기≫ 신라 진평왕(眞平王) 43년조를 보면 신라에서 간 견당사(遣唐使)에 대한 답례사를 당 황제가 보내면서 조서와 함께 병풍과 비단은 보냈다는 기사가 보인다. 성덕왕(聖德王) 32년조에는 중국 황제가 신라왕에게 보낸 선물 등에 대한 사의를 표하는 말 가운데 사람에게 보여 모두가 경탄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또한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3 진사왕조(辰斯王條)에는 왕 7년 정월 궁실을 중수하여 못을 파고 동산을 갖추어 기금이훼(奇禽異卉)를 길렀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동성왕조(東城王條)에도 왕 22년 임류각(臨流閣)을 궁궐 동쪽에 일으켜 못을 파고 기금을 길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초기 단계의 수집 보관 시설을 갖추어 여러 사람에게 보여 주기도 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기사는 ≪삼국유사≫에도 남아 있다. 기이(紀異) 제1 연오랑세오녀조(延烏郎細烏女條)에는 “신라 해안에 살던 이들이 동해를 건너 어디론가 가 버린 뒤 신라에서는 태양이 빛을 잃어 이들을 도로 데려오려 하였으나 이미 바다 건너에 왕국을 건설하였으므로, 왕비가 된 세오녀의 비단을 가져다가 하늘에 제사하여 다시 태양이 빛났으므로 이것을 어고(御庫)에 보관하고 그곳을 귀비고(貴妃庫)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 밖에도 만파식적(萬波息笛)을 월성 내 천존고(天尊庫)에 보관하였다는 기록 등은 고대의 보물관에 대한 존재를 말해 주는 것이다. 비슷한 시기 일본의 쇼소원(正倉院)이 일본 황실의 보고로서 현존하고 있어 아마도 같은 성격으로 풀이된다.
경주의 안압지는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 유적이며, 고대 정원(庭苑)의 전형으로 동물의 우리, 동물에게 물을 먹인 욕조(浴槽) 등이 발굴되었다.
그리고 부근에서 호랑이 뼈, 곰의 뼈 등이 발견된 것이 알려져 있어 동물원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목 한가운데 우물 정(井) 모양의 나무틀은 수초(水草)를 길렀다고 해석되어 동물원과 식물원의 존재를 인정하게 될 것이다.
고려시대에 와서는 동물원 · 식물원의 존재를 알 수 있는 기사와 대평정(大平亭)에는 태자의 편액을 걸고, 명화이과(名花異果)와 진완지물(珍玩之物)을 포열(布列)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또한 의종(毅宗) 19년에는 진완서화(珍玩書畫)를 모아서 좌우에 진열하였다는 것이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어, 전시의 구체적인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그 밖에도 ≪고려도경≫ 궁전조(宮殿條)를 보면 장화전(長和殿)은 나라의 보물을 저장하고 경비를 엄하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보문각(寶文閣)과 청연각(淸燕閣)에는 조서(詔書)와 서화(書畫)를 보관하고 있다고 하였다.
예종(睿宗) 16년(1121년)에는 청연각에 송에서 보낸 서화를 선시(宣示)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선시’라는 용어를 써서 진열한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는 태조의 옛집이 있던 함흥의 경흥전(慶興殿)에 사립(絲笠) · 일월원경(日月圓鏡) · 궁조장전(弓韜長箭) 등을 소장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 유물들은 그동안의 수많은 전란으로 모두 없어졌으나 이러한 전통이 이어져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박물관이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으로 계승되었다.
우리 나라에 근대적인 박물관이 등장한 것은 1907년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11월 6일 동물원 · 식물원 그리고 박물관의 창설을 준비하였다.
1908년 9월 어원사무군(御苑事務局)을 설치하고, 먼저 동물원이 발족되었다. 한편, 박물관 운영을 위해 전국에서 도굴되어 유출된 고려자기를 비롯하여 불교 공예품, 조선 왕조의 외화 등도 구입하기 시작하였다.
1909년 창경궁을 공개하면서 식물원 · 동물원과 함께 박물관을 공개함으로써 근대적인 박물관의 효시가 되었다. 1912년에는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의 본관 건물이 낙성되고(최근 김영삼 정부에 의해 철거됨), 소장품이 12,230점으로 집계되었다.
1909년 덕수궁 안에 석조전(石造殿)이 준공되었는데, 고종에게 바친 외국 사신의 선물들이 보관되었다가 1919년 이 석조전에서 일본 미술품이 전시되었다.
이 때 고궁에서의 일본 미술품 전시가 문제시되자 우리 나라의 고미술품도 전시하자는 의견이 모아져 1938년 새 미술관 건물이 준공되었다. 이 건물은 8개의 전시실과 수장고 · 강당 등이 갖추어진 것이었다. 창경궁에 있던 이왕가박물관에서 우수한 미술품만을 골라 이관하고 이왕가미술관(李王家美術館)을 발족하였다.
한편, 일제 강점기에는 일제가 조선총독부 시정5년(施政五年)을 선전하기 위하여 물산 공진회(物産共進會)를 경복궁에서 개최하였다. 그때에 지은 미술품 진열관에서 조선총독부박물관이 개관되었으나 협소하여 궁전의 일부를 전시실로 사용하였다.
또 1925년 당시 일본왕의 성혼(成婚) 25주년 기념이라 하여 과학박물관 건립에 착수하여 왜성대(倭城臺)에 있던 총독부 청사가 새 청사(구 중앙청)로 옮기자, 그 자리에 과학 박물관을 세워 1927년 일반에게 공개하였다.
지방에서는 1910년 경주 시민에 의해 출발한 경주신라회가 1913년 경주고적보존회(慶州古蹟保存會)로 정식 발족하였다.
그리고 경주시 동부동에 옛 객사 건물을 전시관으로 개설하고, 신라 문물을 전시하여 박물관의 기능을 시작하였다. 1921년 금관이 출토되자 그 고분을 금관총이라 명명하였는데, 금관을 비롯한 화려한 금제 유물들이 드러나면서 경주는 국내외에서 관심을 끌게 되었다.
금관총 조사를 계기로 경주 시민은 금관고를 지어 보존과 전시를 동시에 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서울로의 반출을 막았다.
1926년 총독부박물관의 분관(分館)으로 편입되었다. 부여에서도 1929년 부여고적보존회가 발족하여 백제관(百濟館)을 유물 전시장으로 사용하다가 1939년 총독부박물관의 분관이 되었다.
1934년에는 공주에서도 공주고적보존회가 발족하여 옛 관아인 선화당(宣化堂)을 이용하여 공주읍박물관을 세우고 공주사적현창회(公州史蹟顯彰會)에서 운영, 관리하였다.
또 개성과 평양에도 1931년과 1933년 각기 부립(府立)의 박물관이 세워져, 개성부립박물관에서는 고려시대 유물을 중심으로, 평양부립박물관에서는 고구려의 낙랑시대를 중심으로 진열 개관되었다.
이러한 일제의 식민 정책 아래에서 전형필(全鎣弼)은 일찍부터 민족 문화재(현, 국가유산)의 수집가로 서화 · 고서 · 도장기 · 불상 등 각 분야에 걸쳐 방대한 문화유산을 수집하였다. 그리고 1936년 서울 성북동 선잠단(先蠶壇)에 있던 양식 건물을 인수하여 사립 미술관인 보화각(寶華閣)을 개관하였다. 상설 전시 활동을 하지는 못하였으나 근대화 과정에서 단 하나의 사설 박물관으로 선구적인 구실을 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면서 경복궁 내 건물의 조선총독부박물관을 인수, 개편하여, 국립 박물관이 발족하였다. 같은 해 10월에는 경주 · 부여에 소개되었던 유물을 복귀시켰다.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은 한국 전쟁으로 인하여 부산으로 대피하고(1차 이전), 환도 후에는 경북궁 철수 명령으로 인해 남산으로 옮겼다(2차 이전).
다시 덕수궁 석조선으로(3차 이전), 1972년 경복궁의 새 건물로 이전 · 개관하였고(4차 이전), 1986년에는 ‘중앙청 건물’로의 이전(5차 이전)을 거듭하였다. 1998년에 구 중앙청 건물이 철거가 되어 경복궁 내의 임시 건물로 다시 6차의 이전을 끝냈다. 지금은 용산에 부지를 마련하여 새 건물의 건립과 개관을 준비하고 있다.
한편, 1945년 광복과 함께 경주 · 부여 · 공주의 박물관을 분관으로 편입하였다. 그리고 과학박물관은 국립과학관으로 개편하였다. 1946년 개성부립박물관이 국립박물관의 분관이 되고, 이왕가미술관은 덕수궁미술관으로 개칭되었다. 그 뒤 6·25를 치르면서 피난과 정부수복 등을 거치는 사이에 개성분관이 수복되지 못하였다.
덕수궁미술관을 통합한 국립박물관은 중앙박물관으로서, 경주 · 부여 · 공주의 3개 지방 박물관을 산하에 두어 각기 개보수를 실시하여 확장 개편하였다. 그리고 각도에 국립 박물관을 하나씩 둔다는 방침이 확립되었다.
이에 따라 신안 해저(新安海底) 조사로 방대한 중국 도자기의 보유국이 되어 광주에 국립 박물관이 세워져 호남 문화의 중추적인 구실을 하면서 신안 도자기의 상설 전시실을 개관하였다.
1984년에는 진주 지역을 중심으로 가야시대의 문화재와 임진왜란 관계 유물 중심의 진주박물관이 개관되었다. 1987년에는 국립청주박물관이 중원 문화권에 대한 재조명을 목적으로 개관되었고, 1990년에는 국립전주박물관이 호남문 화권을 중심으로, 이어 국립대구박물관이 개관되었다. 김해 · 춘천 · 제주에도 각각 국립 박물관이 개관될 예정이다.
이로써 국립중앙박물관은 그 산하에 지방 박물관을 갖추면서, 역사 · 미술 · 민속 분야에서 본격적인 박물관 활동이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수집 · 보관 · 조사 연구 · 전시 교육 등의 사업과 업적이 두드러지기 시작하였다.
또한 경복궁 내의 국립민속박물관을 위시하여 1969년에 발족한 국립현대미술관은 경복궁과 덕수궁을 전전하다가 1986년 현재의 위치인 경기도 과천에 새 건물을 준공, 개관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밖에 철도 · 우정 · 산림 등의 정부 기관에서 각기 박물관을 개관하였다. 그리고 한국 동란 이후 서울의 종로구 와룡동에 자리잡고 있었던 국립과학관은 드디어 대전에 5만여 평의 부지를 확보하여 자연과 과학 기술 분야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국립과학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이렇게 1970년대 이후로는 국립 박물관들이 확장되고 지방에서는 시립이나 도립의 박물관이 건립되었다. 또한 한국의 박물관에서 특징적인 존재는 각 대학의 부속 박물관들로, 지역에서의 공공 박물관 구실도 수행하면서 조사 연구도 아울러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한편, 공립 박물관으로는 경기도박물관을 비롯하여 서울시립미술관 · 부산광역시립박물관 · 인천광역시립박물관 및 광주광역시립박물관 등이 있다.
또 사립 박물관으로서는 기존의 전형필이 세운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이외에 용인의 호암미술관(湖巖美術館)이 1982년에 개관하였다. 서울 중심과 떨어져 있는 점을 고려하여 시내에 호암갤러리를 함께 운영하면서 특별 전시회를 개최하고 있다.
그 밖에 성암고서박물관(誠庵古書博物館)은 국내 유일의 고서박물관으로 소장품 가운데에는 고려 초기의 목판본인 국보 ≪대방광불화엄경≫을 위시하여 우리 나라에서 현전하는 것 중 가장 오랜 ≪삼국사기≫ 등이 있다. 또 온양의 민속박물관 · 호림박물관(湖林博物館) 등과 같이 각 산업체에서 독특한 박물관들을 건립 운영하고 있다.
한편, 불교 관계의 사찰 국가유산은 지금도 불화 등의 도난 사고가 잇따르고 있어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그래서 중요 사찰에서는 보물관을 마련하여 성보(聖寶)로서 관리하기 시작하였다.
가톨릭 교단에서도 각지에 순교자 기념관과 유물관을 개관하여 종교적인 성격의 유물뿐만 아니라 가톨릭이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한 역사를 보여 주기도 한다. 그런데 이들 종교 단체의 박물관들은 장차 어디나 비슷한 성격에서 탈피하여 지역별로 개성 있는 기구로 발전해야 할 것이 큰 과제라 하겠다.
1984년 우리 나라에서도 <박물관법>이 제정 · 공포되고, 1991년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이 제정되었으나 아직도 보완해야 할 몇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특히 박물관 관람료의 수입을 위한 세제상의 특례나 박물관 운영의 중심이 되는 전문직에 대한 자격, 양성 그리고 신분의 보장 등은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
앞으로 박물관은 지금까지의 수집 · 보관 · 전시 이외, 특히 평생 교육의 장소로서 청소년에서 성인, 전문직에 이르기까지 시청각 수단을 이용한 보다 활발한 교육 활동이 기대되며, 도서실 · 자료실의 확충과 이용이 시급한 과제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