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은 구리로 만든 거울이다. 동판의 표면은 잘 문질러 얼굴을 비추어 보고 뒷면에는 아름다운 문양 등을 새겼다. 형태는 원형·방형·장방형 등 다양하며 자루가 있는 것, 매달 수 있는 것 등이 있다. 일찍부터 동경이 만들어졌는데 조선 시대에 이르면 대형화되고 얇아진다. 동경은 근세 유리 거울로 대치되기까지 사용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통일신라 시대의 거울로는 나전 화문 동경이 있다. 이 동경은 가야 지방에서 출토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나전공예품이다. 동경은 원래 화장용구이지만 마음의 거울로서 비유되기도 하였다.
동판(銅板)의 표면을 잘 다듬고 문질러 얼굴을 비추어볼 수 있게 한 것으로, 뒷면에는 가지가지 아름다운 문양이나 길상어(吉祥語) 등을 새겨 사용하였다. 청동기시대에 이미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정교한 작품이 만들어졌으나 삼국시대 이래 통일신라시대까지는 유물이 거의 없다. 거울의 기원은 청동제의 감(鑑: 큰 대야)에서 찾고 있는데, 안에 물을 담아 얼굴을 비추어보았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그러다가 점차 물이 없어도 얼굴이 비치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만들어진 것이 동경이다.
형태는 원형 · 방형 · 장방형 · 오화형(五花形) · 육화형 · 팔화형 · 사릉형(四稜形) · 육릉형 · 팔릉형 등으로 세분된다. 그 밖에도 종형(鐘形)과 자루가 달린 병경(柄鏡), 매달게 되어 있는 현경(懸鏡) 등이 있다. 동경은 중앙의 꼭지, 즉 유(鈕)를 중심으로 몇 가지 요소의 무늬로 장식되는데 꼭지는 소원뉴(素圓鈕) · 수형뉴(獸形鈕), 그리고 특수한 형태의 것으로 분류된다.
형식은 먼저 꼭지를 둘러싸고 있는 유좌(鈕座)가 있다. 유좌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 경우도 있고 방격(方格) · 사엽문(四葉文) · 화문(花文) · 원점문(圓點文) · 현문(弦紋) 등이 장식된 경우도 있다. 유좌를 다시 감싸는 것이 내구(內區)이다. 내구에는 동경의 주류가 되는 무늬가 들어가며 뒷면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 내구의 문양에 따라 동경의 특색이 나타나며 그 양식과 형식에 따라 명칭이 정해지는 경우가 많다.
내구에는 자주 계권(界圈)이라 부르는 구획이 마련된다. 계권은 단권(單圈) · 이중권 · 특수권이 있고, 바깥쪽이 한 단 높아지는 단권(段圈)도 있다. 계권으로 구획되었을 경우 안쪽이 내구, 바깥쪽이 외구가 된다. 계권이 없이 전면에 무늬가 놓이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내구와 외구 사이 또는 그 중간에 띠가 있어서 문양대(文樣帶)나 명문대(銘文帶)가 새겨지기도 한다. 명문이 있으면 그 동경의 제작연대나 제작지를 알 수 있어 동경 연구에 중요하다.
동경의 제일 바깥쪽은 연(緣)이라고 한다. 연은 그 모양에 따라 평연(平緣) · 직각연(直角緣) · 외경연(外傾緣) · 내경연(內傾緣) · 삼각연(三角緣) · 고연(高緣) · 저연(低緣) · 후연(厚緣) 등으로 구분된다. 문양은 주로 내구에 마련되며 동물문 · 식물문 혹은 글자나 인물고사(人物故事)가 표현되기도 한다. 무늬가 전혀 없는 소문경(素文鏡)도 있고 무늬를 두드러지게 나타낸 것, 또는 선각(線刻)으로 무늬를 표현한 것도 있다. 또 상감(象嵌) · 금은평탈(金銀平脫) · 나전(螺鈿) · 은첩도금(銀貼鍍金) 등의 기법을 구사하여 화려하게 만들기도 한다.
거울의 면은 오목한 것과 볼록한 것이 있기도 하나 일반적으로는 편평하게 만들어 사용하였다. 동경은 근세에 이르러 유리거울로 대치되기까지 사용되었는데, 그 뒷면에 있는 무늬나 글자 등은 당시의 공예기술 · 문양 · 사상 · 신앙 등을 보여 주고 있어 주목된다.
이 시기의 우리나라 동경은 중국의 초기 동경과 한경(漢鏡)의 영향을 많이 받아 새로운 모습으로 발전되거나 모방되었다. 중국의 동경은 시대적으로 보아서 비교적 오랜 형식의 동경을 선진경(先秦鏡) · 전국경(戰國鏡) 또는 초식경(楚式鏡) 등으로 부르고 있는데, 특히 초식경은 근래 장사(長沙)에서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이들은 한식경(漢式鏡)에 선행되는 형식으로, 이 가운데 춘추시대를 거쳐 전국시대에 이르러 나타난 전국경은 지금까지의 주술적인 성격에서 벗어나 생활용구인 화장구로서의 기능을 하기에 이른다.
이들은 동경의 면이 비교적 얇고 고리의 반쪽 모양, 즉 반환형(半環形)이 되는 꼭지가 한가운데에 놓이는 원형이 보편적인 형식이다. 문양은 산자문(山字文) · 능형문(菱形文) · 연호문(連弧文) 등이 뛰어난 솜씨로 갖추어져 당시의 공예기술을 보여준다.
선진경 가운데 한식경의 직접 조형(祖型)으로 보이는 형식이 있다. 그러나 시황(始皇)의 분서갱유 이래 동경에 글자를 넣는 일이 없어 제작연대는 추정하기 어렵다. 이러한 초기의 중국 동경 중에서 오목한 것, 즉 수(燧)에서 비롯된다고 인정되는 오목거울[凹面鏡]은 그 뒤 요령성(遼寧省)에서 한반도에 걸쳐 독특한 형태로 제작, 사용되었다. 특히 뒷면에 섬세한 기하학적 무늬가 정교하게 나타나고 꼭지는 중심에서 한쪽으로 치우쳐 2개 또는 드물게 3개가 달린 이른바 다뉴경(多鈕鏡)이 성행하였다.
이들은 태양숭배사상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듯하며, 생활용구로서 사용된 것은 아닌 듯하다. 이 형식은 중국의 동북부지방 연해주에까지 분포하고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도 전해졌다. 일본으로 건너간 다뉴경은 일본의 샤머니즘과 깊은 관계를 지닌 제례용구로서 쓰이고, 그 뒤 화장구로서 정착된 한경도 일본에서는 계속 주술적인 목적으로 사용되어 대부분은 부장(副葬)되는 풍속으로 이어져 갔다.
한반도에서의 다뉴경은 조문경계(粗文鏡系)로서, 부여 연화리(蓮花里), 소록도, 대전 괴정동, 아산 남성리와 평양 · 성천 · 중화 등지에서 출토되고 있다. 세문경계(細文鏡系)는 양양 · 원주 · 영암 · 화순에서 출토되었고, 이 밖에도 출토지가 정확하지 않은 유물례가 많이 있다.
한편 한경 이외에 그것을 모방하여 다시 부어낸 동경도 만들어지고 있었는데, 영천을 비롯하여 경주 조양동, 제주도 산지항에서 출토된 유물이 대표적인 것이다. 이들은 대체로 내행화문경(內行花文鏡) · 일광경(日光鏡) · 사유경(四乳鏡) 등의 계통이지만 모방하는 과정에서 무늬가 변형되기도 하고 명문대의 명문이 뜻을 알 수 없는 무늬로 변해 버려 한반도에서의 방제(倣製)를 짐작하게 한다. 이와 함께 낙랑의 유적에서는 전형적인 한식경이 많이 출토되고 있어서 이들이 한반도의 토착사회에 끼친 영향이 컸음을 짐작하게 한다.
한대의 동경은 원형을 기본으로 하여 반구형 유를 가지는 것이 보통이며, 거울의 면은 평면이나 약간 볼록면[凸面]에 가까운 편이다. 거울을 만들 때 큰 것은 평면으로, 작은 것은 볼록면으로 하여 얼굴이 많이 비치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대단히 과학적인 바탕 위에서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경은 전한경(前漢鏡) · 후한경(後漢鏡) · 왕망경(王莽鏡)으로 구별된다. 전한경은 중권청백경(重圈靑白鏡) · 내행화문경 등이 그 대표적인 형식이다. 왕망경은 사신경(四神鏡) · 방격규구사신경(方格規矩四神鏡)이 주류를 이루는데, 특히 명문대에 ‘尙方(상방)’ · ‘新(신)’ · ‘王氏(왕씨)’ 등 왕망시대를 짐작하게 하는 글자가 들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후한경은 수수경(獸首鏡) · 신수경(神獸鏡) 등이 있는데, 특히 화상경(畫像鏡)은 화상석(畫像石)의 표현과도 유사한 독특한 것으로 지상계를 떠나 신선에 대한 이상을 나타낸 것이다. 명문대에 기년명(紀年銘)이 나타남으로써 동경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되는 한경은 이미 선사시대에 방제경이 나오기 시작하여 고려에서도 그러한 방제경이 출토되고 있다.
(1)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동경은 연대가 확실한 중요한 예로서 3점이 출토되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방격규구신수문경은 방격규구사신경을 다시 본을 떠낸 다음, 그 틀에 새로 신수문을 반육조(半肉彫)로 거듭해서 부어낸 것이다. 여기에 표현된 인물은 고구려벽화 각저총(角抵塚)의 인물과 매우 흡사하다. 또 신수경 2점 가운데 1점은 일본의 군마현(群馬縣)에 있는 간논즈카야마고분(觀音塚山古墳)의 출토경과 동질이라는 점에서 이들 동경의 전승 · 제작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하고 있다.
이 밖에도 백제시대의 동경은 전라남도 해남군 현산 월송리와 담양군 봉산면 제월리에서 각기 유문경계(乳文鏡系)의 동경이 출토된 바가 있으나, 이들은 다시 부어낸 매우 거칠고 조잡한 유물에 속한다.
(2) 신라
삼국시대 신라의 동경은 출토례가 매우 드물어 몇 점밖에 알려진 것이 없다. 가장 확실한 동경은 금령총(金鈴塚)에서 출토된 백유소경(百乳小鏡)이라 할 수가 있다. 지름 7.0㎝ 내외의 소형으로 다른 금령총의 풍부한 부장품에 비해 볼 때 기이한 느낌마저 가지게 한다. 그 밖에 진주에서 출토했다는 변형신수경(變形神獸鏡), 양산출토라고 전하는 변형칠유경(變形七乳鏡), 그리고 경주 황남리에서 발견하였다고 알려진 변형여형문경(變形綟形紋鏡) 등이 알려져 있을 따름이다.
7세기경으로 내려오면 고분이 아닌 사찰 관계 유적에서의 동경 출토례가 알려지기 시작한다. 우선 황룡사지(皇龍寺址)의 목탑 심초석(心礎石) 하부에서 나온 3점의 동경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대체로 한경계(漢鏡系)로 보인다. 익산 미륵사지에서도 팔호보상화문경(八弧寶相花文鏡)의 파편이 출토되었다. 이는 전형적인 당경계(唐鏡系)에 속한다.
수경(隋鏡) · 당경은 석(錫)의 성분이 많이 포함되는 백동질의 동경으로 특히 당경에서는 포도당초문(葡萄唐草文) · 해수문(海獸文) 등 페르시아풍의 무늬와 초화(草花) · 새 · 벌레 · 물고기 · 나비 등 자연적인 무늬가 많아진다. 그 밖에 신화나 고사(故事)까지 표현되는 등 무늬가 다양해지며, 부조(浮彫)가 강하게 됨으로써 사실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동경은 소문경(素文鏡)으로 1점은 작으나 완전한 형태이고 다른 1점은 파편으로, 복원한다면 훨씬 대형이 될 것이다. 소형은 유(鈕)가 납작한 평연계(平緣系)이다. 다음으로 중요한 유물은 안압지에서 출토한 2점의 동경이다. 이들은 경태(鏡胎)가 매우 얇다. 1점은 완전한 형태로 가느다란 궁형뉴(弓形鈕)를 가지고 있으며 또 1점은 유가 결실된 파편이다. 무늬는 극히 가느다란 선으로 약간 두드러진 정도이며, 파편은 칠화형문(七花形文)이나 본래의 모습은 거의 짐작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렇게 간결해지고 얇아지는 동경 형식은 중국의 요경(遼鏡) 가운데 같은 예가 보이고 있다. 이른바 하화문경(荷花文鏡) · 하협문경(荷叶文鏡)이라 불리는 동경이 요령지방의 출토품 중에 보이는데, 이러한 경향은 일본의 헤이안시대(平安時代) 동경에서도 나타난다.
(3) 통일신라
통일신라의 동경으로서 주목할 유물로는 출토지나 출토상태가 확실하지 않으나 화려한 나전경(螺鈿鏡) · 평탈경(平脫鏡)의 예가 전하고 있다. 나전경은 거울 뒷면에 나전 · 호박 · 공작석 등으로 문양을 만들고 바탕에 수지(樹脂)를 발라서 붙이는 기법으로 매우 화사하다. 일본의 쇼소원[正倉院]이나 중국의 당나라 유물이 전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도 개인 소장품 가운데 그 유물례가 있다.
평탈경은 금이나 은판으로 얇게 무늬를 만들고 전면에 옻칠을 한 다음 거울 뒷면에 붙이고 다시 무늬 부분만 칠을 벗겨내어 장식하는 기법으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2점이 전한다. 이들은 금 · 은으로 평탈기법을 사용하고 있는데 금으로 된 문양 부분은 검토의 여지가 남아 있다.
고려시대의 동경이라는 뜻에서 ‘고려경’이라 일컬어왔다. 이 명칭은 각기 그 시대에 동경이라는 의미로서 한경 · 당경, 또는 송경 등으로 부르고 있는 것과는 달리 대체로 한반도의 동경을 통틀어 말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고려 이전의 시대에서 각기 그 시대에 특징이 있는 동경이 밝혀지고 있으므로 고려시대의 동경만이 고려경으로 일컬어져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대부분 고려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들, 그중에서도 특히 동경은 발굴자들이 청자류에만 관심을 쏟는 바람에 출토지점이나 출토상태를 모르는 채 산일된 것이 많다. 따라서 정확한 시대도 알 수 없고 다만 개성 부근 출토, 강화도 부근 출토라는 단서만으로 전해져 왔을 뿐이다. 게다가 그중에는 고려 이전에 전래되었다가 고려 고분에 부장된 것으로 보이는 당경이라든지 송 · 금 · 원 나라의 동경도 포함되어 있다.
고려시대의 동경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데, 한경 · 당경 · 송경, 드물게는 요경 · 금경 계통의 동경과 그것들을 본떠서 부어낸 동경 또는 그중의 일부분만을 고쳐서 만든 것 등으로 분류된다. 또 고려시대의 독자적인 동경과 그것을 되부어낸 모방경이 있고, 드물게는 화경계(和鏡系)로 보이는 유물례까지 찾아볼 수가 있다.
이 같은 고려시대 동경의 양상은 많은 변천을 겪는 중국대륙의 동경에 영향을 입은 것이다. 중국의 송경 · 원경은 수 · 당나라의 동경에 비하여 납이 많이 함유되어 황동질을 가지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거울면은 수은 등을 이용하여 자주 닦고 문질러야 한다. 그 밖에도 금경계(金鏡系)가 많이 보이는 것도 특징적인 사실이다.
송대나 금대는 동이 부족한 현상이 심하여 경태가 얇아지고 동경의 뒷면에 나타나는 무늬도 얕아진다. 또 동금법(銅禁法)에 의하여 제작된 동경은 대체로 험기관(驗記官)이나 제작소의 이름을 새겨넣었다. 금대의 동경은 반룡(蟠龍) · 쌍어(雙魚) · 쌍룡(雙龍) · 인물고사 등을 다루는 이외에도 전형적인 한경 · 당경도 많이 모방하여 만들어내고 있다. 이들은 ‘상경순원험기관(上京巡院驗記官)’ · ‘좌순원험기관(左巡院驗記官)’ 등 검사관의 검사를 뜻하는 기호를 넣으면서 지역의 이름들도 새겼다.
한편 송경 중에는 당대의 영향이 많이 남아 있어 초화 · 당초 등이 주제를 이루기도 하고 도자기에 많이 보이는 무늬가 응용되기도 한다. 또 호주경(湖州鏡)이라 불리는 소문(素文)의 바탕에 ‘湖州眞石家靑銅照子(호주진석가청동조자)’ 등 지역명이 새겨진 유물이 많이 보인다. 후저우(湖州) 대신 쑤저우(蘇州) · 항저우(杭州) 등의 지방명이 들어가기도 한다. 형태는 방형과 팔릉형이 많이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동금법이 엄격하여 사주(私鑄)를 금하였으므로 거울의 두께가 얇아지고 관에서 만든 동경이 주류를 이룬다. 후저우의 주감국(鑄鑑局)에서 만든 동경 중에는 ‘乾道四年(건도 4년)’ · ‘乾道八年(건도 8년)’의 연대가 밝혀진 것도 있다. 원대에는 ‘至元四年(지원 4년)’ 명이 있는 쌍룡경(雙龍鏡) 등이 있으나 대체로 한 · 위(魏)의 동경을 본뜬 것이 많아지고 동질도 변한다. 명대에 이르러 유리제 거울이 유행, 보급되면서 동에 의한 공예품으로서의 동경은 자취를 감추게 된다.
이와 같이 중국의 영향을 받은 고려의 동경을 문양에 따라 분류해 본다면, 동물문 · 식물문 · 인물고사 · 길상어계 등과 함께 이들이 복합적으로 구성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고려시대 동경 가운데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문양으로서는 한경계 가운데 신수경 · 청개경(靑蓋鏡) · 상방경(尙方鏡)이 많이 보이고, 당경계에서는 해수포도경(海獸葡萄鏡) · 십이지팔괘경(十二支八卦鏡) · 쌍봉경(雙鳳鏡) · 용문경(龍文鏡) · 보화경(寶華鏡) · 앵무문경(鸚鵡文鏡)이 자주 등장하는 문양에 속한다.
송경 중에서는 호주경 등 명문이 있는 동경 이외에 보화서조경(寶華瑞鳥鏡) · 초화전지경(草花纏枝鏡) 등이 많이 보인다. 요경 · 금경은 그들 자체가 한경 · 당경 · 송경의 방제경이 많을뿐더러 그 밖에 용문 · 어문 · 인물고사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국화문경계(菊花文鏡系)는 화경(和鏡)과의 비교 검토가 필요한 문양이다.
고려 동경을 제작과정에 따라 검토해 보면 역시 몇 가지의 유형으로 대별된다. 우선 박재경(舶載鏡)을 들 수가 있다. 이들은 고려 이전에 한반도에 들어왔다가 고려 고분에 부장된 경우가 있고, 한경 · 당경 등이 중국쪽에서 전래되었다가 고려로 건너왔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중국에서 제작되어 고려에 실려와 고려 고분에 부장되었을 경우도 있다.
또 이들을 다시 재주(再鑄)해서 만든 동경 역시 당경이 당대에 다시 주조되었다가 고려에 왔을 수도 있고, 전래되었던 당경을 고려나 송에서 다시 주조했을 경우도 있을 것이다. 또한 이들 박재경이나 재주경의 어느 부분만 모방해서 만들어진 방제경이 고려에 유입되어 부장될 수도 있고, 이들이 고려에 건너온 다음 방제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재주경이나 방제경 중에는 틀림없이 금대의 것으로 인정되는 명문을 가진 동경으로 고려 고분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는 유물례가 적지않게 알려지고 있다. 즉 ‘北京驗記官{{#068}}(북경험기관{{#068}})’ · ‘金星記官匠(금성기관장)’ · ‘官○(관○)’ · ‘西京官記(서경관기)’ · ‘左巡院驗記官匠(좌순원험기관장)’ 등 금대의 각명(刻銘)이 있는 동경으로서 한경계 · 당경계 · 송경계, 그리고 요 · 금경계로 보이는 동경이 고려경 가운데 다량으로 출토되고 있다.
다만 그중 몇 점은 내구에 ‘高麗國造(고려국조)’라는 방형각인(方形刻印)이 있는 것이 전하고 있으나 대부분은 연부(緣部)에 가늘게 각자된 것들이다. 이로 미루어보아 고려시대에는 금경과의 교류가 대단히 빈번하고 그 물량도 많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려시대의 독자적인 동경을 가려내는 데는 많은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이나 일본의 출토례가 거의 없는 용수불각문경(龍樹佛閣文鏡) · ‘황비창천(煌丕昌天)’명 도해경(渡海鏡) 등 경태가 두껍고 고육조(高肉彫)에 가까운 문양을 가진 동경이 고려경 가운데 적지 않다. 이들은 그 문양의 소재가 어디서 왔는지 의문이며, 우선 고려의 독자적인 것인지에 대하여 보다 더 깊은 검토가 요청된다. 어쨌든 고려경은 현재 신안에서 출토된 동경 중에 똑같은 예에 속하는 동경이 보이고 있어서 중국과의 교류가 적지 않았음을 말해 주고 있다.
조선시대에 이르면 동경이 대형화하고 얇아지며 범자(梵字) · 국화문 등이 많이 응용되고 있다. 또 이때에는 일본에서 화경이 전래되어 에도경(江戶鏡)의 흔적이 보이기도 한다.
불국사 석가탑의 사리장엄구 가운데 포함되어 있었던 소문경 2점은 그 출토상태나 연대가 확실하다는 점에서 매우 주목할 만한 유물이다. 그런데 그 뒤 많은 양에 이르는 고려경 중에도 소문경이 적지않게 출토되고 있어 주목된다. 소문원형 · 소문팔릉형 · 소문팔화형 · 소문방형 이외에 종형 · 운문형, 그리고 손잡이 달린 원형 등이 있고, 유가 2개씩 있는 원형도 보인다. 그 밖에도 거울 뒷면에 모란문 · 용문 · 화문 이외에 불 · 보살을 섬세하게 선각한 예도 보인다.
동경은 원래 화장용구이지만 도덕적으로 마음의 거울로서 비유되기도 하였다. 무덤이나 탑 속에 거울을 넣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의미를 지녔다고 해석된다. 특히 일본에서는 신의 조도품(調度品)으로까지 격을 높이기도 하였으니 동경의 문양에 길상어나 교훈적인 글귀가 담기는 것도 역시 이러한 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동경의 면에 불 · 보살을 새김으로써 직접적으로 신앙 예배의 대상을 삼은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또한 소문경 중에는 나전경이나 평탈경을 만들기 위한 과정 중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경우도 있으나 아직 그 뚜렷한 근거가 없는 실정에 있다. 양뉴형(兩鈕形)의 소문경 중에는 양뉴 사이에 철심(鐵芯)이 남아 있는 경우도 있어서 그 용도에 대한 의문을 푸는 실마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동경이 그토록 방대한 양에 이르면서도 정확한 출토 상태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아 부장의 의미를 해석함에 있어서 많은 의문점을 지니고 있다. 다만 근래에 밝혀진 일부 중국측의 문헌에 무덤의 정상부에서 출토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동경의 매장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필요함을 시사해 주고 있다.
어쨌든 동경은 그 문양에 나타나는 바에 따라 각기 그 시대의 사상이나 신앙을 짐작하게 할 뿐 아니라 그 제작과정에 대한 공예기술을 보여 주는 좋은 자료이다. 그러나 출토지나 출토상태 또는 반출유물과의 관계 등 동경의 편년이나 분류에 많은 애로가 있을 뿐 아니라, 동경 그 자체의 복합적인 제작과정이나 제작지의 문제가 남아 있다.
근래 자연과학적인 분석조사와 검토를 통하여 동경의 합금에 의한 연구분석, 그리고 재질에 대한 분석통계에 의하여 원산지를 추적하는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근대과학의 보조적인 연구에 의하여 보다 구체적인 편년이나 분류검토가 가능해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적 분석에는 비록 경미하나 시료(試料)의 채취를 위한 파괴가 뒤따라야 한다는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