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3월 러시아 제2차 혁명 후 니콜라옙스크[尼港]에서는 한인노동자, 특히 독신자들을 중심으로 적색(赤色)빨치산이 조직되었다. 1919년 박일리야는 니콜라옙스크에서 한인 빨치산 부대를 결성함으로써 직접 혁명에 가담했다.
박일리야는 한인 빨치산 부대의 부책임자였는데 책임자는 고려인민회와 고려청년회의 회장이었던 박병길(朴秉吉)이었다. 세칭 사할린의용대로 칭하는 이항군대(尼港軍隊)는 바로 이 빨치산 부대를 말한다. 박병길은 성품이 선량하였으나 박일리야는 그와 정반대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20년 초엽 박일리야는 사할린의용대 사령관으로 니콜라옙스크 해방전투를 벌였다. 즉, 1920년 3월 적색빨치산의 습격으로 일본군대와 거류민이 몰살당하는 이항사건(尼港事件)이 발생하였는데, 사할린의용대도 이때 일본군을 공격하였던 적색빨치산에 포함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사할린의용대는 자유시로 도피하여 그 곳의 자유보병대대에 편입되었다.
박일리야는 이때 사할린의용대의 대장으로 자유시에 집결한 간도계(間島系) 독립군을 비롯한 기타의 한인무장대와 함께 극동공화국 제2군단 산하에 배속되었다. 1920년 10월 러시아공산당 극동국 한인부에 의해 니콜라옙스크 한인부대 군정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1921년 3월 러시아 흑룡주 마사노프에서 개최된 전한의병대회에 참석하여 전한군사위원회 군사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1년 5월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고려공산당 창립대회에서 군사부 담당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당시 박일리야는 전한군사위원회 휘하 한인 부대들이 당연히 상해임시정부의 독립군단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러한 주장은 결국 훗날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일명 흑하사변(黑河事變)]을 겪게 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1921년 6월 자유시사변 당시 대한의용군의 무장해제에 강렬하게 저항하다가 간신히 사지를 벗어나 연해주 지역으로 탈출하여 이만으로 이동했다. 1921년 11월 이만에서 이동휘(李東輝)·이용(李鏞)·김규면(金圭冕) 등과 제3차 전한군사위원회를 결성하고 위원이 되었다. 이후 1922년 8월 고려혁명군정위원회 결성에 참여하여 군정위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