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름은 두 사람이 샅바를 잡고 힘과 기술을 겨루어 상대를 넘어뜨리는 것으로 승부를 겨루는 우리나라 전통의 민속놀이이자 운동경기이다. 우리나라에서 자연적으로 생겨난 순수 우리 경기인 씨름은 손기술·다리기술·허리기술·혼합기술 등 온몸을 움직여 힘과 기술을 겨루는 운동이다. 체력·기술·투지의 세 가지 조건이 요구되는 운동으로, 무예로서도 손색이 없다. 우리 민속놀이의 대표격으로 씨름꾼과 구경꾼이 하나가 되어 즐겨온 세시풍속이기도 하다. 원래는 왼씨름과 오른씨름, 띠씨름 등 다양하게 있었는데 왼씨름 한 가지만 남게 되었다.
씨름의 어원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한 정설은 없으나, 민속학자 최상수(崔常壽)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영남지방에서 쓰는 우리말 가운데 서로 버티고 힘을 겨루는 것을 “씨룬다”고 하며, 또 서로 버티고 힘을 겨루어보라는 말을 “서로 씨루어보아라.”고 하고, 꽤 오래 버틴다는 말을 “대기(되게) 씨룬다.” 또는 “대기 씨루네.”라고 한다. 이것으로 보아 씨름이라는 말은 타동사 ‘씨룬다’라는 말이 명사화하여 ‘씨룸’이 되고, 다시 ‘씨름’이 된 것으로 보았다.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버티어 힘을 겨룰 때 이것을 ‘팔씨름’이라고 말하며, 또 서로 말로써 지지 않으려고 버티는 것을 ‘입씨름’이라고 하는 것을 보아서도 이를 예증할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국어학자인 서정범(徐庭範)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몽고어에서는 씨름을 ‘bu"he’라고 하는데, 이 말은 우리말의 ‘발[足]’과 비교되는 말이다. 몽고어에서 다리[脚]의 뜻으로 ‘silbi’, ‘saba`r’ 등이 있는데, 어근은 실(sil)로 우리말 씨름의 어근 ‘실’과 비교되므로 씨름을 ‘다리의 경기’로 보았다. 속설에는 ‘씨름’을 ‘씨[種]의 겨룸’으로 보아 남자들끼리의 힘겨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이도 있다.
우리말인 씨름 외에 한자어로는 다음과 같은 명칭이 있다.
① 각저(角抵):‘角’은 다툼을 뜻하여 ‘다툴 각’으로도 쓰이며, ‘抵’는 ‘밀칠 저’, ‘던질 저’, ‘맞닥뜨릴 저’ 등의 뜻을 지니고 있어, 각저라는 말은 ‘다투어 밀친다.’ 또는 ‘맞닥뜨려서 다툰다.’ 혹은 ‘겨룬다’의 뜻을 지니고 있다.
② 각저(角觝):‘저’는 ‘닿을 저’로 겨루는 두 사람이 서로 몸을 대고 다툰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③ 각력(角力):‘힘 력’자를 붙여서 ‘힘을 겨룬다.’, ‘다툰다.’는 뜻으로 쓰인다.
④ 각희(角戱):‘戱’는 ‘놀 희’자로, 이 말은 반드시 씨름만을 뜻하지 않고 활쏘기 · 말타기 등의 무예를 두 사람 이상 여럿이서 겨루는 것을 통틀어 나타내는 말이다.
⑤ 상박(相撲):‘서로 상’자, ‘부딪칠 박’자가 합쳐서 ‘서로 힘을 겨룬다(부딪친다).’의 뜻으로 씨름을 나타내는 말인데, 일본에서는 이 한자어로 씨름을 표기하고 ‘스모’라고 발음한다.
이 밖에도 중국 문헌 『소씨연의(蘇氏演義)』에 치우희(蚩尤戱) · 각저지희(角觝之戱 · 角抵之戱) · 각희(角戱)가 나오는데, 이는 옛날 전설시대의 치우의 모양이 머리에 뿔[角]이 나서 사람들을 뿔로 들이받으면 겁이 나고 당할 수가 없어 힘을 겨루지 못한 데서 유래한 말이라고 한다. 후세에 기주(冀州)지방 풍속에 치우처럼 머리에 뿔을 달고 둘씩 셋씩 한 편[組]이 되어 서로 힘을 겨루는 놀이를 ‘치우희’, 혹은 뿔을 달고 하였다 하여 ‘각저지희’ 또는 ‘각희’라고 하였다. 특히, 옛 중국 문헌에서는 우리의 씨름을 ‘고려기(高麗技)’ 또는 ‘요교(撩跤)’로 불렀는데, 이는 우리의 씨름이 중국의 것과 다른 특징이 있음을 시사해주는 말이다. 요교라는 말의 ‘요’는 ‘붙든다’는 뜻이고, ‘교’는 ‘종아리 교’자로 ‘종아리(다리)를 붙들고 상대방을 넘어뜨리는 놀이’라는 뜻이다. 아무튼 그 뜻은 한결같이 우리 민족 고유의 신체운동으로서, 두 사람이 마주잡거나 달려들어 힘을 겨루고 기술을 부려 상대편을 넘어뜨려 승패를 가리는 놀이라는 뜻이다.
우리 나라에서 자연적으로 생겨난 순수 우리 경기인 씨름은 온몸을 움직여 힘과 기술을 겨루는 운동이므로 체력 · 기술 · 투지의 세 가지 조건이 요구되는 운동이다. 그렇기 때문에 씨름은 신체를 조화롭게 발달시키고 힘을 기르며, 정확한 판단력과 인내심, 균형감각, 안전능력 및 건전한 사회성을 길러주는 체육적인 효과가 큰 운동이다. 또한, 순박하면서도 흥겹고, 누구나 할 수 있으며 장소나 시설, 경비의 큰 제한을 받지 않을 뿐더러 경기자나 관람자들 모두가 흥미를 가질 수 있어 여가선용으로도 매우 적합한 사회체육의 하나다. 특히, 씨름은 다른 투기와는 달리 맨살과 맨살이 직접 닿는 가운데 서로의 체온이 오가는 운동으로 정이 서로 통하는 우리 민족성과 일맥상통하는 경기이다.
씨름은 여러 사람이 한 집단 또는 사회를 이루고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생겼다고 짐작할 수 있다. 원시사회 사람들은 먹이를 구하거나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맹수들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다른 핏줄의 집단과 생활권의 확보를 위하여 집단적으로 싸우기도 하였다. 이때 싸움의 방법으로 격투가 벌어졌을 것이니 이것이 곧 씨름의 시초로 보인다. 따라서 원시인들은 생존을 위해 격투기술을 점차 발달시켜 나갔으며, 여기에서 씨름이 1대 1의 격투기술로 개발되어 널리 응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인간의 지적 향상과 집단의 정치적 · 경제적 발달에 따라 씨름은 무예로 발달해 왔다. 개인적 방어술이었던 씨름이 무술의 하나로서 발전하게 되는 것은 사회의 발전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였다.
고구려의 시조 주몽(朱蒙)은 위험을 피해 동부여에서 졸본(卒本)으로 남하하여 그곳에 고구려를 세웠다. 이 나라는 소노(消奴) · 절노(絶奴) · 순노(順奴) · 관노(灌奴) · 계루(桂婁) 등 다섯 부족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때의 왕은 부족연맹의 장이었다. 주몽이 고구려의 임금으로 오르기 전 계루부의 족장으로 있을 때 5부족장들의 고추가(古雛加:족장의 존칭) 시합이 있었는데, 당시의 경기종목이 각저 · 궁사(弓射:활쏘기) · 승마(乘馬) · 수박(手搏) 등 다섯 가지였다고 한다. 고구려 초기에 씨름이 무예의 하나로 채택된 것으로 보아 더 멀리 부여에서도 이 경기를 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4세기경으로 추측되는 고구려 고분인 각저총(角抵塚) 주실(主室) 석벽에 두 사람이 맞붙어서 씨름하는 모습과 심판하는 사람이 서 있는 그림이 보인다. 이 고분은 1905년에 발견된 것으로 만주의 통화성(通化省) 집안현(輯安縣) 통구(通溝), 즉 고구려의 옛 도읍지인 환도성(丸都城)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이미 씨름이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분묘 벽화에까지 이런 그림을 그린 것을 보면 당시에 고구려인들이 씨름을 얼마나 좋아하였는지 알 수 있다. 백제와 신라의 씨름의 역사는 자료가 발견되지 않아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러나 무예에 있어서는 크게 다를 바가 없었을 것으로 미루어, 신라와 백제에서도 고구려 못지 않게 무예로서 씨름을 즐겼을 것이고 널리 보급되었을 것이다. 또한 신라 화랑도의 무술연마에 있어서도 씨름이 큰몫을 차지하였으리라고 짐작된다.
우리 나라 문헌에 씨름에 대한 기록이 최초로 나타난 것은 『고려사』이다. 이에 따르면 충혜왕 때 왕이 용사들에게 씨름을 시키고 친히 구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즉, 충혜왕 즉위년(1330) 3월조에 보면, “왕은 아첨하는 신하인 배전(裴佺) · 주주(朱柱) 등에게 나랏일을 맡기고 날마다 내수(內豎), 즉 아랫사람들과 더불어 씨름을 하니 위아래의 예절이 없었다.”고 하였다. 충혜왕 복위 4년(1343)의 기록에서는, “이 해 봄 2월 갑진일에 임금이 용사를 거느리고 씨름놀이를 구경하였다.”고 하였고, 같은 해 5월조에는 “신묘일에 공주가 연경궁(延慶宮)으로 옮기자 왕은 주연을 베풀어 위로하고 밤에는 씨름놀이를 친히 구경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 11월조에는 “병인일에 고용보(高龍普)와 함께 시가지의 누(樓)에 거둥하여 격구(擊毬)와 씨름놀이를 구경하고 용사들에게 많은 베를 상으로 주었다.”라고 되어 있다. 이로써, 충혜왕은 노는 것을 좋아하였고, 특히 놀거나 잔치를 벌일 때에는 으레 씨름을 시키고 즐겨 구경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로 넘어온 씨름은 대중화되었다. 김홍도(金弘道)의 풍속도 속에 씨름그림(각력도)이 있는 것은 씨름이 그만큼 일반화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예이다. 김홍도가 조선 후기의 사람인 것으로 보아 이때는 씨름이 나라 안에서 널리 행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세종실록』 권31 세종 8년(1426) 3월 25일의 기록에는 “두 사신이 목멱산(木覓山:지금의 남산)에 올라가 서울장안과 한강을 굽어보고 말하기를 ‘정말 좋은 땅이라.’ 하고 활을 쏘고 역사들에게 씨름을 시켰다.”고 되어 있다. 같은 해 4월 2일의 기록에는 “두 사신이 목멱산에 올라가 역사들을 시켜 씨름을 하게 하였다.”고 되어 있으며, 12년 윤12월 임자조(壬子條)에는, “형조에게 아뢰기를 중상총(重尙聰)이 양복산(梁卜山)과 씨름을 하다가 양복산이 죽었으니, 법에 의하면 마땅히 교수형에 처하여야 하겠지만 형을 한 등급(等級) 감하고 장례비를 감당하게 명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3년 3월 병무조(丙戊條)의 기록에는 “경회루 북쪽에 임금이 앉아 종친(宗親)들의 활쏘는 재주를 구경하고, 또 역사 안사의(安思義) 등에게 씨름을 하게 한 뒤, 승패에 따라 차등을 두어 상을 주었다.”고 하였다. 같은 달 임오조(壬午條)의 기록에는 “임금이 모화관(慕華館)에 거둥하여 군사들이 격구하는 것과 말타고 창던지며 활쏘는 것과 모구(毛毬) 치는 것을 구경하였다. 동시에 두 사람이 각각 피두창(皮頭槍)을 가지고 말을 타고 달리면서 서로 대들기도 하고 좌우로 충격을 주기도 하였으며, 혹은 다섯 사람의 역사를 모아 씨름을 시키고 등급에 따라 차등을 두어 상을 주었다.”고 하였다.
『명종실록』 명종 15년(1560) 5월조에는 “단오날에 동궁별감(東宮別監)으로 있는 박천환(朴千環)이 시강원(侍講院)에 와서 호소하기를, 지금 임금이 내리신 물품을 빈객(賓客:세자를 보좌하는 벼슬)인 원계검(元繼儉)의 집에 가지고 가다가 길에서 양반의 무리를 만났다. 그들이 억지로 씨름을 하자고 하였으나 듣지 않자 노하여 의복과 갓을 찢고 심지어는 회사(回謝)하는 글까지 찢어버렸다고 하였다. 이 말에 시강원에서는 임금에게 이 일을 아뢰어 양반 무리의 죄를 캐어물으려고 하였으나, 사실을 알아보니 천환이 먼저 유생들을 때리고 욕하고 나서 거짓말로 이처럼 호소하였던 것이다. 이에 왕은 ‘이것이 무슨 풍속이란 말이냐.’라고 하였다. 이러한 일이 있은 뒤 사헌부에서는 명을 내려 씨름을 금하기까지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씨름이 크게 유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현종실록』 현종 5년(1664) 갑진년 정월조의 기록에 “광주(廣州) 저자도(楮子島)의 어느 집 종이 같은 동네에 사는 세현(世玄)이라는 자와 씨름을 하였는데, 이기지 못한 것을 분하게 여겨 그를 찔러죽였다.”라고 하였다. 이는 민간인들 사이에서도 씨름이 매우 성행하였음을 짐작할만한 사건이라 하겠다.
유득공(柳得恭)이 지은 『경도잡지(京都雜誌)』 권2에 보면, 단오에 대한 대목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서울의 소년들은 남산 기슭에 모여 씨름을 한다. 그 방법은 두 사람이 서로 맞서서 허리를 굽혀 번쩍 들어 왼손으로 상대방의 오른쪽 다리를 잡고, 또 오른손은 서로 상대방의 허리를 잡는다. 그리고 두 사람이 같이 일어서며 허리를 번쩍 들어 메어친다. 또 씨름에는 안걸이 · 밖걸이 · 돌려치기 등 여러 가지 재주가 있다. 중국 사람은 이 씨름을 일컬어 ‘고려희’ 또는 ‘요교’라고 한다.” 또 『동국세시기』의 단오 대목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 “청년들이 남산의 왜장(倭場:임진왜란 때 왜군이 주둔하였던 곳)과 북악(北嶽)의 신무문(神武門:서울 북악산 남쪽에 있는 경복궁의 북문) 뒤에서 씨름을 하며 승부를 겨룬다. 그 방법은 두 젊은이가 서로 허리를 구부리고 각기 오른손으로 상대방의 허리를 잡고, 또 왼손으로는 상대방의 허벅지에 끼운 샅바를 잡고 일어나서 상대방을 번쩍 들거나 혹은 다리를 걸어 메어치는 것으로, 이때 깔리는 사람이 지게 된다. 씨름의 기술은 안걸이 · 밖걸이 · 돌려치기 등 여러 가지 모습이 있으며, 그 가운데는 힘이 장사요, 손재주가 민첩하고 자주 내기를 하여 이기는 장정을 도결국(都結局:판막음장사)이라고 한다. 중국에서도 이것을 배워 ‘고려기’니 ‘요교’라고 부른다. 단오날의 행사로서 이 씨름은 매우 성하여 서울을 비롯하여 각 고을마다 크게 벌인다.”
또, 같은 『동국세시기』 5월의 기록에 “금산(金山:오늘날의 金泉)의 풍속으로 해마다 단옷날에는 원근의 많은 사람들이 직지사(直指寺)에 모여 씨름을 하여 승부를 가리는데, 이 구경을 하러 모이는 사람들은 수천인이나 되었다.”라고 하였다. 또 『개성지(開城誌)』에 소개된 풍속의 기록을 보면, “5월 5일에 여자들이 잘 차려입고 경덕궁(敬德宮:왕위에 오르기 전의 李成桂의 사저)에 모여 그네를 뛰며, 남자들은 만월대(滿月臺:대궐터)에 모여 씨름을 한다.”라고 되어 있다.
일제 침략 이전인 1899년 4월 30일 학부(學部)가 주최한 한성내의 관 · 사립학교대운동회에서 학생들의 경기종목으로 씨름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국민들, 특히 뜻있는 이들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12년 10월 유각권구락부(柔角拳俱樂部)가 주관하여 극장 단성사(團成社)에서 열렸던 씨름대회가 효시라 하겠다. 1915년에는 광무대(光武臺)에서 주관한 씨름대회가 이 극장에서 열렸는데, 이는 다분히 흥행성이 고려되었다고는 하나 음력 정월 초사흗날부터 4주일 동안, 즉 1개월에 걸쳐 열렸다는 것은 그 규모가 전국적이었고 국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고 있었음을 말한다. 이 대회들은 본격적으로 근대화된 경기대회는 아니었다고 하여도 연례적으로 개최되어 씨름의 근대경기화를 촉진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1927년 일본에서 근대화된 체육교육을 받고 귀국하여 서울의 고등보통학교에서 체육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강낙원(姜樂袁) · 서상천(徐相天) · 한진희(韓軫熙) · 강진구(姜瑨求) 등이 중심이 되어 씨름의 근대화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여름방학 때 귀향하는 제자들을 통하여 전국적으로 씨름의 실태를 조사, 파악하는 한편 조선씨름협회를 결성하고 여운형(呂運亨)을 초대 회장으로 추대하였다. 이들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때까지 지역에 따라 왼씨름과 바른씨름이 실시되고 있었는데, 함경도 · 평안도 · 황해도 · 강원도 · 충청도 · 경상도에서는 왼씨름을, 전라도 · 경기도에서는 오른씨름을 하고 있었다. 협회에서는 그 뒤부터 왼씨름을 원칙으로 통일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협회는 창립기념의 첫 사업으로 조선체육회와 공동주최로 1927년 9월,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 운동장에서 제1회 전조선씨름대회를 열었는데 전국 규모와 현대경기의 양상을 띤 경기로서는 첫 대회였으며 그 뒤 해마다 열렸다. 대회결과 제1회에는 함흥 출신의 이도남(李道男)이 우승을 차지하였고, 다음해에 열린 제2회 대회에서는 함주 출신인 김윤근(金潤根)이 전 회의 패자 이도남을 물리치고 우승, 그 뒤 7년을 연속 승리하여 기염을 토하였다. 1936년에는 창립 10주년에 즈음하여 협회의 내부를 강화, 재정비하여 혁신을 꾀하는 한편, 제1대 회장으로 여운형을 추대하면서 제1회 전조선씨름선수권대회를 조선일보사 강당에서 개최하였다. 전국에서 모여든 1백여 명의 선수가 참가한 이 대회의 우승자는 함흥 출신의 현명호(玄明浩)였으며, 제2회 대회(1937)부터 제4회 대회(1939)까지는 황주 출신인 송병규(宋炳奎)가 4연승을 거두었다. 이 대회는 1941년의 제6회 대회를 마지막으로 중단되었는데, 제5회 대회(1940)에서는 평양 출신의 허승화(許承和)가 우승하였고, 제6회 대회에서는 함흥 출신의 최장호(崔長鎬)가 우승하여 마지막을 장식하였다.
한편 중앙기독교청년회가 주최하는 ‘전조선씨름대회’는 1929년에 제1회 대회를 연 뒤 매년 실시되었다. 이 밖에 조선체육회가 해마다 개최하던 전조선종합경기대회에서도 제16회 대회부터 씨름을 정식 경기종목으로 채택하였으나, 제18회 대회 후 일제의 탄압으로 조선체육회가 해산되어 이 경기대회도 중단되었다.
우리 나라의 모든 분야가 그러하듯이 체육회도 광복을 기점으로 하여 새로운 전기가 이루어졌다. 일제의 탄압으로 강제해산당하였던 조선체육회가 광복과 함께 대한체육회로 새 출발하여 각 경기단체를 조직, 가맹시켰다. 또한, 침체상태에 빠져 있던 조선씨름협회는 1946년 3월 7일 대한체육회 산하 경기단체로서 15번째로 정식 가맹하였으며, 1947년에 대한씨름협회로 명칭을 바꾸고 협회규약 및 경기심판규정을 만들어 운영을 강화하였다. 이 무렵의 회장은 서상천이었으며, 협회의 기구는 이사회와 대의원총회로 조직되었다. 씨름은 1947년 제28회 전국체육대회에서 시범종목으로, 1948년 제29회 전국체육대회에서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다. 또한 1984년 6월 월간지 『씨름』을 창간하였고 1987년에 『씨름경기』 책자도 발간하였으며, 1997년 말 협회의 기관지 『씨름과 씨름인』을 창간하였다.
1982년도 정기대의원총회에서 프로씨름을 관장하는 민속씨름위원회의 설치를 의결하고 4월에 민속씨름위원회가 발족하였으나 1983년 9월 임시대의원총회에서 대한씨름협회로 통합되었다. 그 뒤 1990년 9월 사단법인 한국민속씨름협회로 분리 독립되어 운영되다가 1996년 사단법인 한국씨름연맹으로 명칭이 변경되어 오늘날까지 분리 운영되고 있다. 해외지부는 1984년 9월에 재미주(在美洲) 서부지부와 동부지부를, 다음해 12월에는 재브라질지부와 재서독지부, 1988년 12월에 재아르헨티나지부, 1998년 4월에 재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지부를 승인하였다.
1998년 현재 대한씨름협회가 개최하고 있는 주요 대회로는 광복 전의 전조선씨름선수권대회의 후신인 전국씨름선수권대회(52회), 대통령기 전국장사씨름대회(35회), 회장기 전국장사씨름대회(28회), 전국 시 · 도 대항 장사씨름대회(12회), 서울특별시장기 전국장사씨름대회(17회) 등을 비롯하여 1989년부터 대통령배 전국씨름왕선발대회가, 1996년부터 교보생명배 전국어린이장사씨름대회가 매년 열리고 있다. 1998년 말 현재 대한씨름협회에 등록된 팀은 초등학교 107개, 중학교 73개, 고등학교 44개, 대학교 22개, 일반 22개 등 모두 268개팀이며, 이에 소속된 선수는 초등학교 623명, 중학교 778명, 고등학교 603명, 대학 282명, 일반 178명 등 총 2,464명이다.
씨름은 그네와 함께 우리의 민속놀이로서 쌍벽을 이루고 있다. 어느 나라든지 그 민족의 풍속을 내세우는 절기가 있는데, 그것은 자연환경과 사회적 배경에 따라 나타나게 된다. 씨름은 풍물놀이(속칭 농악)가 백성들의 기쁨을 나타내기 위해 때와 장소에 구애됨 없이 연주되는 것처럼 사회의 경사스러운 일에 수시로 행해졌다. 우리 민족은 각 절기마다 독특한 풍습과 민속놀이가 행해졌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단오절에 씨름이 성행하였다. 단오 이외에 상원(上元:음력 정월 보름날) · 삼짇날(음력 삼월 초사흗날) · 초파일(음력 사월 초여드렛날) · 백중(百中 · 百衆:음력 칠월 보름날) · 한가위(음력 팔월 보름날) · 중양절(重陽節:음력 구월 초아흐렛날) 등과 같은 명절에도 즐거움을 나누기 위하여 즐겨 씨름을 하였다. 또한, 봄부터 쉴 사이 없이 농사일에 바쁘다가 농한기를 맞으면 고된 몸과 정신적인 긴장을 풀기 위해서도 씨름을 즐겼다. 오늘날에는 명절 때의 전통적인 행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운동경기로서 각광을 받고 있다. 특히 텔레비전의 중계로 전국 어디에서나 안방에서 관전할 수 있게 됨으로써 다른 경기에 못지 않은 인기를 차지해가고 있다.
씨름판이라고 하면 씨름이 벌어지는 자리, 즉 경기장을 말한다. 민속으로 행하여 온 씨름판은 오늘날과 같이 규정된 바가 없었으며, 사람들이 많이 모일 수 있는 광장(큰 마당)이면 씨름판 구실을 할 수 있었다. 마을 안 혹은 느티나무가 정자구실을 해주는 동구 밖 넓은 마당이면 훌륭한 씨름판이 된다. 여기에다가 씨름꾼이 씨름을 할 수 있도록 둥글게 모래를 깔고, 돌려가며 주위에 말뚝을 박고 금줄을 매어 그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해놓으면 씨름판이 되는 것이다. 예전에는 씨름판을 만들어놓고 대회를 무사히 치르게 해달라고 고사도 드렸으며, 시합전에는 씨름판의 정화(淨化)를 위하여 소금을 뿌렸다고 한다.
한편, 씨름이 벌어지는 씨름판 주변이 더욱 볼만하였다. 씨름이 계속되는 동안 온갖 장사꾼이 모여들고 갖가지 난전(노점)이 벌어진다. 씨름뿐만 아니라 다른 놀이도 함께 벌어지는 것이 상례이므로 남녀노소 모두가 모여든다. 특별히 이런 날은 나라에서 금하는 노름(돈따먹기)이 허락되므로 별의별 놀이가 다 등장하게 된다. 이 중 ‘팽이놀음’은 한 점을 중심으로 여러 칸이 선으로 나누어진 둥근 판에다가 담배 등의 상품을 쌓아놓고, 중심에 세운 축 위에 못을 박고 긴 막대 중심에 구멍을 뚫어 못을 꽂아 돌아가게 한 다음 한쪽 끝에 긴 끈을 매고 끈 끝에 바늘을 단다. 그리고 돈을 내어놓고 막대를 돌려 바늘이 멎는 칸에 있는 상품을 따먹는 놀이이다. 그런가 하면 심지뽑기 · 윷놀이 · 화투 · 투전 등 여러 가지 노름판이 벌어져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며,
한편으로는 장돌림들이 갖가지 상품을 가지고 들어와 노점을 벌여 임시시장을 이루게 된다. 참빗장수가 흰 광목보를 땅바닥에 펴놓고 얼레빗 · 참빗 · 가름마타개 등을 늘어놓고 팔기도 하며, 긴 횃대에 댕기 · 허리띠 · 대님 등을 척척 걸쳐 어깨에 걸고 돌아다니며 팔기도 한다. 조끼장수가 휘장을 치고 여러 가지 조끼를 팔고, 신발장수는 고무신 · 꽃신 · 짚신 등을 사라고 소리치며, 국밥장수들은 난전을 벌여 밥과 술을 팔기에 정신없다.
한 옆에서는 오늘 씨름판에서 쓸 돈을 마련하기 위하여 나무장수들이 나무짐을 나란히 세워놓고 나무가 팔려나가기를 고대하며 쭈그리고 앉아 있고, 씨름판 둘레에서는 이기고 지는 데 따라 환성이 터져 나오고 풍물이 신나게 울려퍼진다. 다른 한편에는 사람이 많이 모이니 물건도 잘 팔리리라 생각한 시골사람들이 삼태기 · 빗자루 · 소쿠리를 한짐 지고 와서 빈터에 부려놓고 사러올 사람을 기다리기도 한다. 씨름하는 것도 구경거리지만 이 장터에 모여든 사람들을 만나고 물건을 구경하는 데에 흥미를 가지고 모여드는 사람도 많다. 이와 같은 광경이 바로 씨름판이 벌어진 주변 장마당의 모습이었다.
우리 나라 말 중에 ‘-꾼’이 붙은 것이 많은데, 이 ‘꾼’자가 붙은 말로 불리는 사람은 그 일을 직업적 또는 습관적으로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장사꾼 · 사냥꾼 · 농사꾼 · 나무꾼 · 구경꾼 등을 들 수 있는데, 이 중에 ‘씨름꾼’도 있다. 이와 같이 높임말이 될 수 없는 씨름꾼이라는 말은 예전부터 써온 것은 아닐 것이다. 고구려 태조 주몽이 건국하기 전 5부족장들의 시합에 씨름이 등장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오래 전부터 씨름이 무술로서 숭상되어 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씨름꾼이라는 말은 근대 이후, 즉 일제강점기경 씨름꾼이 우대받을만한 환경이 사라진 다음부터이다.
고려시대의 ‘용사(勇士)’라는 명칭이라든지 조선시대의 ‘역사(力士)’라는 말은 대단한 존칭어이며, 이 말 속에는 무예와 국방이라는 차원의 의미가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용사나 역사가 적과 싸우는 전쟁터에 나가면 용맹한 장수, 즉 용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임금이 용사를 거느리고 씨름하는 것을 구경하였다는 기록이라든지, 역사들에게 씨름을 시켰다는 사실은 이것이 곧 무예의 권장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상고 이후 일제침략 직전까지는 이른바 씨름꾼에 대한 사회적 대우는 남성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기운이 장사(壯士)’라는 행운은 무관으로 출세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나면서부터 장사로 태어나는 행운을 차지하는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은 일이므로, 남달리 기운이 세어 장사라는 말을 듣게 되면 용사나 역사로 이름을 날리기 위하여 피나는 수련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용사나 역사로 머무는 것이 아니고 이러한 지위를 발판으로 하여 무관자리를 꿈꾸었을 것이며, 이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무관으로서 갖추어야 할 일반적인 창검술 · 궁술 · 마술 등의 무예를 수련하였다. 그러는 중에 역사로서 힘을 기르기 위하여 달리기, 높이뛰기, 큰 바위 들어올리기, 나무 뿌리째 뽑기 따위의 수련을 통하여 힘의 원천인 체력을 조절하고 단련하였으리라 짐작된다. 그리하여 많은 용사나 역사 중에서 뛰어난 인물들은 윗사람에게 발탁되거나 또는 무과를 통하여 출세의 길을 달렸을 것이다.
씨름뿐만 아니라 어떠한 종류의 경기도 승부를 겨루는 모습을 보기 위하여 구경꾼들이 모여야 그 경기는 볼만해지고 경기하는 선수들도 신명이 나서 자기 실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게 된다. 그러한 경기의 생리로 보아 씨름판이 벌어졌을 때 구경꾼이 모여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더구나 씨름은 그네와 함께 오랜 전통을 가지고 전승되어온 대표적인 민속놀이이므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그에 대한 관심과 열의는 대단하였다. 위로는 임금을 비롯하여 아래로는 서민에 이르기까지 씨름의 구경꾼은 국민 모두라고 할 수 있다. 구경꾼 중에는 우승한 장사가 맨 샅바가 득남에 효험이 있다는 속설을 믿고 이것을 구하려고 온 사람과 우람한 체격의 장사들을 훔쳐보는 기생들도 끼어 있었다.
예로부터 씨름판은 대개 장날을 중심으로 벌어졌는데, 원근 각지에서 생활필수품을 내다 팔고 판 돈으로 필요한 물건을 사는 유일한 상거래를 위하여 남녀노소가 모여드는 날이 장날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장날을 택한다는 것은 그 장에 모여든 모든 장꾼이 다 씨름의 구경꾼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이런 구경거리가 없는 장날이라도 으레 장에 가면 친구를 만나고 목로술집에서 거나하게 마신 다음 차일 밑에 벌여놓은 음식점에 들러 국밥 한 그릇씩을 먹고 나야 장에 온 보람을 느끼던 옛 우리네 할아버지들이다. 그런데 더구나 씨름판이 벌어지는 날이니 그냥 맨손으로 갈 수는 없게 된다. 이 날 팔아서 쓰려고 손재주 있는 사람들은 미투리를 삼거나 소쿠리를 엮는다든지, 그런 재주가 없는 사람은 하다 못해 싸리비를 엮어 지고와서 용돈을 마련하는 등 이 날을 고대하고 준비를 서둘렀다.
이렇게 모여든 구경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씨름꾼이 되어 자웅을 겨루게 된다는 것은 커다란 자랑이요, 명예이자 큰 인기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더군다나 씨름꾼 출신 마을에서는 선수들을 응원하려고 소담스런 종이 꽃송이를 단 고깔을 쓰고 전복차림을 한 풍물패가 동원되어 한마당 풍물놀이를 벌여 그들을 더욱 우쭐하게 해주었다.
고려나 조선시대에는 임금이 명절 때면 용사니 역사니 하는 씨름꾼을 모아놓고 씨름판을 벌이게 하고는 구경을 한 뒤에 상을 주었다. 기록에 따르면 고려의 충혜왕은 용사에게 베를 주었다고 하며, 조선 세종 때에는 차등을 두어 상을 주었다는 기록만 있고 상이 무엇이었는지는 밝혀놓지 않았다. 그런데 전통적으로 씨름에서 이긴 장사에게는 황소 한 마리를 주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었다. 문헌의 기록은 없지만 임금이 뛰어난 용사나 역사에게 하사한 상품의 으뜸도 황소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 무렵의 민가에서 가장 귀한 재산 중의 하나가 소였을 것이며, 농사의 대부분이 소의 힘을 빌려야 하였던 그 시대의 농경사회에서 황소만큼 푸짐한 상품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씨름이 현대경기인 스포츠로 되고 프로팀이 생기면서 상품 대신 상금을 주게 되었다. 거액의 상금을 내건 효시는 1972년에 문화공보부(현재의 문화관광부)가 후원하고 한국방송공사가 주최하여 대한씨름협회 주관으로 열린 제1회 KBS배쟁탈 전국장사씨름대회이다. 이 대회에서는 우승자에게 1백만 원의 상금과 은배를 줌으로써 상금이 거액화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한때는 천하장사에게 5천만 원의 상금을 준 일도 있었다. 1998년에 상금이 가장 큰 대회는 한국씨름연맹이 개최하는 천하장사대회의 3천만 원이다.
한편, 근대 이전 고래의 씨름방법은 이긴 사람에게 상대할 사람이 없을 때까지 계속하였는데, 마지막까지 싸워 이긴 사람을 ‘판막음’이라고 불렀다. ‘판막음’이 된 사람은 상을 타는 것은 물론 출신지역에서는 마치 개선장군과 같은 대우를 받았으며, 풍물을 앞세워 마을로 돌아가면 큰 잔치가 또 한 차례 벌어지기 마련이었다.
① 시에 나타난 씨름 : 조선 말기의 고증학자 · 금석학자 · 서예가인 김정희(金正喜)는 그의 문집 『완당선생전집(阮堂先生全集)』 권10에 씨름을 읊은 시가 있다. “단오절 씨름판에 온마을 씨름꾼 모여 / 임금 앞에서도 재주부리네 / 이기든 지든 다 즐거워 / 푸른 버들 그늘에서 웃음소리 나네(端陽角觝盡村魁 天子之前亦弄才 勝敗紛紛皆可喜 綠楊陰裏哄嘡來).”
② 회화에 나타난 씨름 : 먼저 각저총의 씨름도[相撲圖]를 들 수 있다. 만주 집안현 통구지방에 있는 고구려시대의 무덤 현실 오른쪽 벽에 씨름그림이 있어 ‘각저총’, 즉 씨름무덤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씨름도는 벽화로서 다른 고분인 무용총의 벽화 등과는 비교되지 못할 만큼 단조로우며 환상도 빈약하다. 예술적 표현에서도 몸의 비례나 사실력이 부족하나, 그 당시에 씨름이 있었고 그것이 어떠한 모습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점에서 그 가치는 크게 평가된다.
그림의 내용은 나무 아래에서 두 역사가 맞붙어 씨름을 하고 있는 장면이다. 나무는 연리수(連理樹)의 기묘한 표현이며, 그 나무 위에 네 마리의 새가 앉아 놀고 있다. 나무의 잎은 다 떨어지고 가지 끝에 푸른 기생목이 자라고 있는 이상한 느낌의 나무이다. 이러한 나무 아래에는 두 마리의 개가 앉아 있고, 상투를 틀어올린 반바지차림의 두 장년 남자가 띠를 두르고 씨름하는 자세로 맞붙어 있다. 그 옆에는 씨름을 심판하기 위해서인지 지팡이를 짚은 백발노인이 서 있다. 씨름을 하는 두 사람은 힘이 넘쳐 보이나 매우 온건한 인상을 풍기는 대결장면이다. 두 역사가 띠를 두르고 씨름하는 자세는 요즈음의 씨름하는 모습과 거의 같다. 요즈음의 씨름경기방식은 왼씨름이지만 이 그림에서는 근래까지 전라도지방에서 행하여졌던 오른씨름을 하고 있다. 호전적인 고구려인이라고는 하지만 평화스러운 내기를 하고 있는 듯한 온화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다음으로는 김홍도의 「씨름도」를 들 수 있다. 김홍도는 조선 후기의 풍속화가로 산수와 인물 · 화초 · 영모(翎毛:새나 짐승) 등 거의 모든 대상에 걸쳐 뛰어난 화풍으로 ‘단원풍속도(檀園風俗圖)’의 특이한 갈래를 정립하였다. 그의 많은 작품 가운데에서 ‘풍속화첩’ 25장 중의 하나인 「씨름도」는 당시 시장 한 귀퉁이에서 예사로 벌였던 씨름판의 분위기를 잘 묘사하고 있다. 원형구도로 아래위 2단으로 관중을 배치한 가운데에 맞붙은 씨름꾼을 그리고, 그 왼편에 목판을 둘러멘 엿장수를 배치하였다. 외면한 엿장수나 벗어놓은 갓 · 신발 등이 화면의 단조로움을 깨뜨리며 긴장된 분위기를 멋지게 조절하고 있다. 마지막 안간힘을 쓰는 씨름꾼의 몸짓 · 표정과 흥을 돋구는 관중들의 대비가 자못 짜임새 있으며, 흥분과 초조가 엇갈리는 한 장면을 익살스럽게 나타내고 있다. 이 풍속도로 미루어볼 때 조선시대에는 민간에 씨름이 널리 행하여졌음을 알 수 있다.
그 밖에 유숙(劉淑)의 작품이라고 전해져오는 「대쾌도(大快圖)」가 있다. 조선 후기의 화가인 신윤복은 시정(市井) · 촌락의 풍속을 즐겨 그렸는데, 이 그림은 성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우리 나라 고유의 놀이요 무술인 씨름과 택견장면을 둘러싸고 흥겹게 한때를 보내는 구경꾼들의 모습과 주변풍경을 해학적으로 현장감 있게 구성하고 있다. 내용은 성 밖 낮은 언덕에 타원형으로 둘러앉은 구경꾼들의 가운데에 위쪽에는 두 총각이 맞붙어 씨름경기를 하고, 아래쪽에는 도포자락을 동여맨 총각 둘이 택견을 하고 있다. 씨름이 풍속화의 소재로 채택된 것으로 보아도 이때 씨름이 얼마나 일반화되었으며 인기가 높았는가를 짐작하게 해준다.
우리 나라의 야담에는 씨름과 관련된 것이 많이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북병사가 된 씨름꾼 : 열여섯살 난 소년 황형(黃衡)은 나이에 비하여 숙성하고 20대의 청년처럼 체격이 우람하였다. 뿐만 아니라 씨름판이 열릴 때마다 이겨서 장사라는 소문이 온 마을에 퍼지게 되었다. 그러자 황형이 나타나면 씨름꾼들이 모두 씨름을 포기하고 자리를 뜨는 바람에 그는 더 이상 그토록 좋아하는 씨름을 할 수가 없었다. 씨름판이 열리면 몰래 가서 그냥 구경만이라도 하려고 하였으나, 그를 알아본 씨름꾼들이 모두 돌아가곤 하여 구경조차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 뒤 함경도 문천군수 원보곤(元甫昆)의 딸에게 장가를 가게 되어, 혼사 후 며칠을 처가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함경도는 산세가 험하여 산짐승들이 많아 어느날 하인 몇 명을 데리고 사냥을 나갔다. 활쏘는 무예를 익히기는 하였지만 실제로 산속에서 종횡무진하는 산짐승을 잡아본 경험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가 쏜 화살은 번번이 빗나가기만 하였다. 한 번은 눈 앞에 멧돼지가 나타나 겨우 궁둥이를 맞추었는데, 화살을 맞은 멧돼지는 몹시 놀라 소리를 지르며 달아나는 것이었다. 황형은 급한 마음에 활과 화살을 내던지고 길을 앞질러 멧돼지가 나타날 곳에서 기다렸다가 맨손으로 덮쳤다. 사람과 성난 멧돼지의 격투가 벌어졌는데 승리는 황형에게 돌아갔다.
하인들은 황형이 잡은 멧돼지를 메고 집으로 들어가자 장인 되는 군수가 자초지종을 물으니, “새서방님께서 잡으신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 날 저녁 장인은 사위를 불러앉히고 말했다. “젊은이가 기운이 센 것은 자랑이나 사람은 배우지 않고 기운만 세면 미련해져서 사람구실을 못하는 법이네. 글을 먼저 배우도록 하게.” 이에 황형은 깨우친 바가 있어 그날부터 열심히 공부하여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원래 무관을 좋아하여 연산군 때 북병사가 되었으며, 그 뒤 연산군이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자 병조판서까지 올랐다.
② 병조판서가 만난 장사 : 신명인(申命仁)의 아들 익(翌)은 천하장사이면서 학문도 깊은 젊은이로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세상이 뒤숭숭하여 벼슬에 나가지 않고 있었다. 그 일대에서는 힘으로 그를 당할 자가 없었으며, 어쩌다 씨름판이 벌어졌을 때 그가 얼굴만 보이면 씨름판은 파장이 되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주막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신 뒤 밖으로 나온 그는 남대문 근처에서 내를 건너기 위하여 놓은 징검다리 옆에 서서 서울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시골에서 며칠씩을 걸어 다리를 절뚝거리며 서울로 들어오는 사람들, 하인을 거느리고 품위 있게 걸어가는 부인 등을 바라보며 서 있는데, “비키지 못할까!” 하는 호령과 함께 누군가가 그의 뒤통수를 호되게 후려갈기는 것이었다. 신익은 비명을 지르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물러섰다. 영문없이 당한 일이라 분한 마음에 자기를 후려친 자를 번쩍 들어서 물이 고인 개울바닥에 던져버렸다.
그러자 한패인 듯한 무리가 한꺼번에 달려들자 한 사람씩 개울에 쳐넣으면서 대결을 하고 있는데 그 중의 한 명이 “아니, 이 놈이! 이 행차가 어느 행차시라고 감히….” 하고 소리쳤다. 신익은 “누구의 행차인지는 몰라도 사람을 먼저 친 것은 네놈들이 아니냐?” 하며 뒤를 돌아보니 병조판서 유전이 말 위에서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틈을 타서 하인들이 우르르 몰려와 묶으려 하자 잘못이 없는 그는 달려드는 하인을 한 명씩 개울로 집어 던졌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병조판서는 하인들에게 명하여 그를 정중히 모셔오도록 하였다. 신익은 병조판서 앞으로 가서 공손히 허리를 굽혀 사과하였으며,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를 밝혔다. 병조판서는 그 길로 대궐로 가 상감에게 그 날 있었던 일을 아뢰고, 무술이 대단한 장사이니 입궐시켜 곁에 두는 것이 어떨지를 청하였다. 이에 임금은 신익을 불러 곁에서 보좌하게 하였으며, 그 뒤 벼슬이 계속 올라 함경도 병마절도사에 이르렀다고 한다.
③ 한말 밥을 먹은 김덕령(金德齡) : 경강사람 김덕령은 나면서부터 장사로 이미 15세 때 천 근을 들었고 먹기는 한 말 밥을 먹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그는 아버지상을 입고 있었다. 왜적이 덕령의 고향 가까이 오자 그는 왜군 진지로 들어가 왜장 가토(加藤淸正)를 만났다. “나는 김덕령이다. 네가 천운을 무시하고 내 나라에 왔구나. 내가 내일 오시에 네 수만 명 군사 머리에 백지 한 장씩을 붙여놓겠으니 그리 알아라.” 하고는 사라졌다. 그는 둔갑장신술에 능하였다. 왜장은 부하 장병에게 “내일은 활과 총을 많이 준비하였다가 사시 말에서 오시 초 사이에 사람은 물론 짐승이라도 나타나면 무조건 쏴라.”고 명령하였다.
다음날 그 시간이 되자 사방으로부터 오색구름이 일어나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고 눈을 뜰 수조차 없게 되었다. 조금 있으려니까 구름이 걷혔는데 덕령이 다시 가토 앞에 나타나 “내 재주를 보아라!” 하고 백지를 군사들 가운데 던지니 눈 깜짝할 사이에 머리마다 감겨 때아닌 흰 꽃밭이 되었다. 왜장이 감복하면서 “나도 8년 동안 재주를 배웠지만 저런 재주는 못 배웠구나.” 하였다. 덕령이 다시 백지를 거두면서 왜장에게 말하였다. “나도 운수가 불길하여(상제이므로) 재주만 보여주었으니 어서 돌아가라. 만일 네가 돌아가지 않으면 상옷을 벗고 너희를 한칼에 무찌를 것이다.” 하는 말을 남겨놓고는 홀연히 간데온데 없이 사라졌으며, 이에 놀란 왜병은 모두 물러갔다고 한다.
또한 김덕령이 자기 힘을 믿고 오만무례하였던 젊었을 때의 일이 있다. 씨름판이 벌어졌는데 그를 당할 사람이 없었다. 기고만장하여 있는데 자기보다 어리고 앳되어 보이는 총각이 상대하려고 나서는 것이 아닌가. 그는 어처구니가 없었고 구경꾼들도 어이가 없어하였다. 그러나 막상 둘이 맞붙어보니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으며, 결국 덕령이 지고 말았다. 그는 너무도 분하고 창피한 나머지 죽으려고 하였으나 누이동생이 만류하면서 충고하자 겸손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마침내 훌륭한 장군이 되었다.
④ 나그네에게 혼난 장사 스님 : 평안도 구성(龜城)고을의 굴암사(窟巖寺)에 기운이 장사인 스님이 있었는데, 이 고을은 물론 인근 고을에서도 그를 당해낼 사람이 없었다. 그는 누구나 만나면 씨름을 걸어 내기 하기를 좋아하였다. 하루는 허름하게 차린 장사꾼이 말에 미역을 싣고 찾아왔는데, 그는 또 미역장수에게 씨름을 하자고 하였다. 장사꾼은 사양하였지만 그는 “내가 지면 당신에게 베 열다섯 필을 내놓고, 당신이 지면 싣고 온 미역을 나에게 다 주기로 하자.”고 하면서 내기를 청하였다. 그래도 장사꾼이 사양하고 다음날 아침 떠나려 하자 스님은 길을 막고 제발 씨름을 하고 가라고 졸랐다. “그렇게 소원이라면 내 할 줄 모르는 씨름이지만 한번 해봅시다.” 하고 장사꾼이 대들더니, 한 손으로 그의 멱살을 쥐어 번쩍 올린 다음 다시 두 손으로 스님의 몸을 들어 머리 위에 올리고는 내동댕이쳤다. 이에 스님은 크게 뉘우치고 그 뒤부터 힘자랑을 하는 일이 없었다.
우리 나라에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씨름은 왼씨름 · 오른씨름 · 바씨름 · 띠씨름 · 통씨름 · 샅바씨름 등 여섯 가지 명칭의 것들이 있다. 그러나 그 경기방법이 서로 비슷한 점이 있어 이것을 왼씨름 · 오른씨름 · 띠씨름의 세 가지로 나누고 이와는 아주 다른 바씨름을 따로 나누고 있지만, 바씨름은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이다. 또한 왼씨름 · 오른씨름 · 띠씨름도 1972년에 대한씨름협회가 ‘왼씨름’ 한 가지로 통일함으로써 구태여 왼씨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보다는 ‘씨름’으로 통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 나라에서 씨름 하면 왼씨름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① 왼씨름 : 샅바를 오른쪽 허벅다리에 낀 다음 허리에 돌려매고 오른쪽 어깨를 맞댄 뒤 오른손으로는 상대방의 허리샅바를, 왼손으로는 상대방의 다리에 낀 샅바를 잡고 동시에 허리를 펴고 일어남으로써 경기가 시작되는 씨름이다.
② 오른씨름 : 왼씨름과 반대로 샅바를 왼쪽 허벅다리에 낀 다음 허리에 돌려매고 왼쪽 어깨를 맞댄 뒤 왼손으로는 상대방의 허리샅바를, 오른손으로는 다리에 낀 샅바를 잡고 동시에 허리를 펴고 일어남으로써 경기가 시작되는 씨름이다.
③ 띠씨름 : 띠를 허리에 두어 번 둘러감은 뒤 그것을 잡고 하는 씨름인데, 곳에 따라 ‘허리씨름’ 또는 ‘통씨름’이라고도 부른다.
이 밖에 바씨름이 있었는데, 김홍도가 그린 「씨름도」의 씨름이 바로 이것이다. 서로 오른팔 아래 팔뚝에다가 삼베로 만든 바를 몇 번 감고 상대의 왼쪽 허벅다리를 휘감아 오른손으로 잡고 허리에는 띠를 매지 않으며, 서로 왼쪽 어깨를 맞대고 왼손을 상대방의 허리 근처에 얹어놓은 다음 경기를 시작한다.
50여 년 전에 직접 씨름판을 목격한 이에 따르면 씨름판이 벌어지면 오픈 게임으로 어린이들의 시합인 ‘아기씨름’부터 벌어진다고 한다. 이 씨름에서 차차 나이를 높여 나중에는 어른씨름이 된다. 경기운영을 살펴보면 씨름은 대개 사흘 동안 계속되는데, 첫날에는 비용을 걷기 위한 걸립으로 비용을 찬조받는 한편 어른들이 씨름에 붙게 되면 먼저 ‘비게’를 뽑는다. 한 사람이 세 사람을 물리치면 비게급 선수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첫날을 보내고 이틀째 되는 다음날에는 비게끼리 붙어서 우열을 가려낸다. 이 판에서는 비게가 비게 한 사람을 이기면 되는데 이 시합을 ‘비게씨름’이라고 한다. 이 날 온종일과 사흘째 되는 마지막날 오전까지 비게씨름이 계속되면서 탈락자가 나오게 되고, 오후에는 끝까지 남은 장사끼리 결승전이 벌어지며 여기에서 장사가 가려져 우승자가 나오게 된다.
경기방법은 우선 씨름판을 벌이려면 넓은 마당이 있어야 하고, 이 마당에 맞붙을 두 사람이 마주 꿇어앉는다. 이 두 사람은 샅바를 매고 서로 어깨를 맞댄 뒤 오른손으로 상대방의 허리샅바를 먼저 잡고 왼손으로는 상대방의 허벅다리에 건 샅바를 잡는다. 양편의 준비태세가 다 되었으면 심판의 구령에 따라 동시에 허리를 펴고 일어나면서 시합이 시작된다. 두 사람은 모든 재간을 다 써서 상대방을 먼저 넘어뜨리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무릎 이상의 몸체가 먼저 땅에 닿는 편이 지게 된다.
오늘날의 경기는 시설과 용구 · 복장을 비롯하여 경기운영방식 · 경기기술 등이 옛날에 비해 매우 세분되어 있다. 이를 분류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경기장은 모래로 시설함을 원칙으로 하며, 실내경기장은 매트로 할 수도 있다. 규격은 높이가 30㎝ 이상 70㎝ 이하로 하고, 넓이는 직경 8m 원형으로 하며 수평이어야 한다. 또한 선수의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 경기장 밖으로 1.5m 이상의 보조경기장을 두어야 하며, 주경기장과 보조경기장의 높이의 차는 10∼20㎝ 이내로 한다. 단, 매트로 시설할 경우 수평으로 하며 선폭은 5㎝, 넓이는 모래경기장과 같다.
초등학교부 60㎏급 이상과 중학교부 · 고등학교부 · 대학부 · 일반부의 샅바는 청 · 홍색 광목(16수) 전폭으로 하며, 초등학생의 샅바는 광목(16수) 반폭으로 한다. 샅바의 길이는 허리와 허벅다리 둘레에 맞도록 신축성 있게 조절하여 만든 협회의 공인된 샅바이어야 한다. 경기복장은 씨름하기에 적합한 짧은 반바지를 입고 소속표시는 좌측 재봉선에 부착한다.
초등학교부 · 중학교부 · 고등학교부와 대학 및 일반부는 모두 경장급(輕壯級) · 소장급(少壯級) · 청장급(靑壯級) · 용장급(勇壯級) · 용사급(勇士級) · 역사급(力士級) · 장사급(壯士級) 등 7체급으로 분류한다. 단체전의 정선수는 7명으로 하고 후보선수는 각 체급에 1명 이내로 한다. 계체량은 경기전일 17시에서 17시 30분에 완료해야 하며, 계체는 전종별 1회에 한한다. 모든 선수는 자기 체급 이상에는 참가할 수 있으나 자기 체급 이하의 체급에는 참가할 수 없으며, 이중출전할 수 없다.
단체전과 개인전으로 분류한다. 단체전에는 시 · 도 대항전, 직장대항전, 도시대항전, 각급학교대항전, 군경 및 예비군대항전으로 구분한다. 개인전은 전국장사씨름대회만 체급에 제한이 없으나 경기력 향상을 위하여 체급별로 할 수도 있다. 선수권대회는 체급별로 하며, 각종 대회 학생부는 체급별로, 또는 체급 제한 없이도 할 수 있다. 단체경기는 정선수 7명으로 구성하며 승부는 승자수로 결정한다. 각 부(초 · 중 · 고 · 대 · 일반부) 선수는 이중으로 출전할 수 없으며 신청서에 참가신청한 체급 외에는 출전할 수 없다. 단체경기에 출전하기 위하여 신청한 정선수가 계체량에 실격되어 정선수로 팀이 구성되지 못할 경우는 팀전체가 실격되며, 부상 및 사고로 인하여 시합을 못하는 선수는 순번선수에게만 1패로 인정한다. 단체 출전선수가 경기 도중 부상으로 인해 경기를 못할 경우 출전자격을 갖춘 후보선수로 교체할 수 있다.
① 경기방식 : 단체경기와 개인경기로 구분하여 경기를 운영한다. 단체경기의 대전방법은 맞붙기전(토너먼트) 혹은 돌려붙기전(리그)으로 실시하며, 개인전도 맞붙기전과 돌려붙기전으로 시행한다. 모든 경기는 선수의 완전한 실력을 발휘하기 위하여 3전 2승제로 하되 경기운영의 사정에 따라 단판제로 할 수도 있다. 이의 결정은 경기부의 의견을 들어 임원장이 결정하는데, 대진표는 각 팀 대표자의 입회하에 추첨으로 한다.
② 샅바매는 방식 : 샅바는 고리를 오른다리에 걸고 긴 띠를 뒤로 돌려 고에 끼워 맨다. 이때 허리의 띠를 경기에 지장이 없도록 신축성 있게 매어야 하며, 띠와 고의 교차점은 우측 대퇴부 중심선에 있어야 한다.
③ 경기개시 : 씨름의 도(道)를 존중하는 뜻에서 양선수는 본부 및 상호 간에 인사를 한 뒤 앉아서 샅바를 잡는다. 양 선수는 무릎 간격 30㎝ 이내에서 무릎을 꿇고 정좌해서 다리샅바를 먼저 잡고 어깨를 대고 허리샅바를 잡은 뒤 왼무릎을 세운 다음 일어나서 주심의 신호에 따라 경기를 시작하는데, 샅바를 잡을 때 오른다리를 뒤로 물리지 못하며 허리샅바는 중심선(재봉선)을 넘겨 잡을 수 없고 한 번 잡은 샅바는 다시 추스려 잡을 수 없다. 경기진행중 양 선수가 샅바를 놓았을 때나 경기장 밖으로 밀려나갔을 때는 재경기를 한다. 그러나 고의로 상대를 밀어내는 선수는 경고를 받게 되고 고의로 경기장 밖으로 나갔을 때에는 1패가 된다. 2회 주의 받으면 경고 1회가 되며, 경고 1회가 주어진 선수는 주의 없이 바로 경고를 준다. 경고 2회는 1패가 되며, 3회가 되면 실격패가 된다.
④ 경기시간 및 채점 : 선수의 감투력을 배양하고 완전한 실력을 발휘하기 위하여 3판 2승제로 승부를 결정한다. 승부의 제한시간은 초등학교부와 중학교부 이상(대학부 · 일반부 포함)으로 구분한다. 초등학교부는 1승부를 1분으로 하고 1분 내에 승부가 없을 때에는 30초를 쉬고 1분 동안의 연장전을 한다. 그리고 중학교부 이상 경기는 1승부를 2분으로 하고 2분 내에 승부가 없을 때에는 1분 쉬고 다시 2분 동안 연장전을 한다.
3전 2승 중 1승부는 결정되고 2회전에서 경기시간이 경과하면 먼저 승리한 선수가 승자가 되고, 1회전 경기에서 양 선수가 승부가 나지 않을 때에는 2회전에서 승리한 선수가 승자가 된다. 그리고 1대 1 동점이고 3회전 때 경기시간이 초과되거나 승부가 나지 않을 때는 주의나 경고를 받은 자가 패자가 되고, 주의와 경고를 받은 선수가 없을 경우에는 체중이 가벼운 선수가 승자가 된다. 돌려붙기전의 채점방법은 2명이 동점일 경우에는 승자승으로 순위가 결정되나 3명 이상이 동점일 경우는 매 시합 종합승패수에 의한 득실로 가리며, 득실도 같을 경우는 주의, 경고, 체중이 가벼운 선수의 순서로 승자가 결정된다.
⑤ 경기판정 : 경기진행중 무릎 이상의 어느 부분이든 몸체가 지면에 먼저 닿는 선수가 패자가 되고, 경기를 포기하고 경기장 밖으로 나가면 기권패가 된다. 경기진행중 상대선수를 고의로 밀어내면 경고를 당하고 고의로 경기장 밖으로 나갔을 때에는 1패를 받게 된다. 그러나 경기진행중 기술이 성립되어 경기장 밖에서 승부가 결정되었을 때에는 유효로 인정한다. 단, 기술을 성립시킨 선수의 두 발이 주경기장 내에 있을 때에만 승자로 인정한다.
⑥ 반칙 : 목을 조르거나 비틀어 쥐거나, 팔을 비틀거나 꺾거나, 머리로 받거나, 발로 차거나, 주먹으로 치거나, 눈을 가리거나, 기타 경기진행을 방해하는 행위는 패자로 판정하며 해당대회의 선수자격을 박탈한다.
⑦ 징계 : 경기상 제반문제를 효과적으로 처리하기 위하여 상벌위원회를 두며 심판위원회에서 결정, 처리한 사건이나 혹은 각 위원회의 징계요청이 있거나 필요하다고 인정될 때에 징계처리를 한다. 경기중 부정선수가 출전하였음이 발견되었을 때에는 그 부정선수 또는 그 부정선수가 소속한 단체는 즉시 실격으로 하고, 그 선수 또는 단체가 획득한 모든 지위는 무효가 되며 부정행위를 한 선수나 단체는 상벌위원회의 규정에 따라 징계를 받게 된다.
⑧ 심판 : 심판은 주심 1명과 부심 2명, 심판장으로 구성하며, 경기의 승부판정과 경기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항을 관장한다. 심판원은 협회가 인정하는 심판복장을 반드시 착용하여야 한다. 주심은 경기장 안팎을 유동적으로 위치하여 경기진행과 승부의 판정을 신속하고도 정확하게 선언하여야 한다. 주심은 부심으로부터 판정에 이의가 있거나 승부의 판정을 단독으로 결정하기가 곤란할 때는 즉시 이의를 받아들여 부심 및 심판장과 합의하여 결정한다. 주심은 호각을 가지고 경기의 개시 · 중지, 승부의 판정 등을 선언하며, 경기중 선수가 부상할 우려가 있을 때나 샅바가 불완전할 때는 중지시켰다가 다시 진행시킬 수 있다. 그리고 주심은 진행부를 통하여 3회 이상 호명하여도 출전하지 않을 경우에는 기권으로 판정하며, 경기진행중 규칙위반이나 폭언 · 폭행 등의 탈선행위를 하는 자는 즉시 경기중지 또는 퇴장을 명할 수 있다.
부심은 경기장 바깥 좌우측 정면에 위치하며, 시종 경기의 우열을 주시하면서 주심의 판정에 이의가 있거나 경기는 끝났는데도 주심이 승부판정을 결정하지 못할 때에 이의 또는 재심을 요청할 수 있다. 부심은 경기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경기중 선수가 부상할 우려가 인정될 때에는 즉시 주심에게 건의할 수 있다. 경기도중 사고로 인하여 경기불능일 경우에는 임원장 및 심판부장에게 보고하여 승부를 결정한다. 경기자는 심판의 권위를 절대존중해야 하며 주심의 판정이나 합의된 판정은 절대로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우리 나라의 씨름기술은 내국(內局:배지기) · 외국(外局:등지기) · 윤기(輪起:딴족거리) 등으로 구분되어 단조로웠다. 그러나 씨름경기가 민속놀이에서 벗어나 스포츠로 정착, 발전함에 따라 그 기술도 다각적으로 향상되었다. 1983년 9월에는 대한씨름협회와 한국민속씨름협회의 통합에 따라 씨름기술 용어의 통일작업이 추진되었다. 이 일을 전담할 씨름기술용어심의위원회가 구성되어 마침내 씨름기술 54수를 확정하고, 한글학회의 인준을 거쳐 1984년 1월 대한씨름협회 이사회에서 가결, 확정하였다.
씨름기술의 근본은 심신의 힘, 즉 체력이며, 그 원리는 내부적 힘과 외부적 힘의 이치를 바탕으로 하는 임기응변적 몸의 중심상태를 뜻한다. 씨름에 있어서 공격과 방어와 받아치기의 기술은 상대의 힘에 거스르지 않고 그 힘을 이용하는 동시에 자기의 힘을 합쳐서 뜻하는 방향으로 상대의 몸의 중심을 이동시키는 것이다. 씨름기술의 종류는 크게 손기술 · 다리(발)기술 · 허리기술 · 혼합기술로 나누며, 그 방법은 다음과 같다.
① 앞무릎치기 : 바른 자세에서 어깨를 맞대어 상대방의 중심을 쏠리게 하든가, 쏠렸을 때 오른어깨와 오른다리를 빼면서 오른손으로 앞으로 나온 상대방의 오른무릎을 쳐서 앞으로 회전시켜 넘어뜨린다.
② 앞무릎짚기 : 오른다리를 크게 뒤로 빼면서 오른손으로 상대의 무릎을 짚고 목과 가슴을 오른쪽으로 틀면서 고리를 비켜 위로 당기며 무릎의 손을 고정시키며 넘어뜨린다.
③ 앞무릎뒤집기 : 공격수의 앞다리(오른쪽)가 상대의 오른쪽 발 앞까지 크게 비켜 앞으로 들어가면서 상대의 윗몸을 뒤집고, 오른손으로 상대의 무릎을 밑에서 위로 쳐올리면서 상체를 오른쪽으로 회전시켜 뒤집으면서 넘어뜨린다.
④ 오금당기기 : 상대의 고리가 아래로 처져 있고 상대방의 앞무릎이 굽어 있을 때 두 손으로 상대의 오금을 공격수의 두 다리 사이로 끌어당겨 넘어뜨린다.
⑤ 앞무릎짚고 밀기 : 바른 기본 자세에서 상대의 오른다리 무릎을 짚고 어깨(오른쪽)를 축으로 하여 밀어붙여 넘어뜨린다.
⑥ 뒷오금짚기 : 상대의 자세가 왼다리 자세일 때 상대의 중심을 앞으로 약간 끌어당기면 상대가 뒤편으로 움찔 물러서려고 할 때 상대의 왼다리 오금을 걸어 몸의 중심을 낮추면서 밀어붙인다.
⑦ 옆무릎치기 : 상대 자세의 다리(발) 위치가 옆으로 일직선으로 있으면서 상대가 몸 중심을 오른다리에서 왼다리로 옮길 때 오른손으로 상대의 바깥부분을 쳐서 옆으로 넘어뜨린다.
⑧ 콩꺾기 : 상대의 앞무릎에 손을 대어 앞무릎치기 동작을 시도하면 상대의 앞다리와 무릎이 펴지거나 굽혀진다. 이 순간 고리를 잡은 손과 오른손으로 상대의 오금을 동시에 끌어당겨 채서 넘어뜨린다.
⑨ 팔잡아돌리기 : 고리를 잡고 있던 왼손으로 상대의 오른팔의 윗부분, 즉 상박을 힘차게 잡아당기면서 오른손바닥으로 상대의 오른무릎 바깥 부위를 차면서 상대를 회전시켜 넘어뜨린다.
⑩ 앞다리들기 : 통다리들기라고도 한다. 상대의 몸 중심이 뒤로 처져 있을 때 띠를 잡고 있던 손으로 상대의 고리를 깊숙이 잡고 무릎을 굽혀 앞으로 나아가는 자세로 상대의 앞다리를 들어젖혀 넘어뜨린다.
⑪ 손짚이기 : 상대의 팔이 힘없이 아래로 처져 있을 때 또는 그와 비슷할 때 순간적으로 공격자의 한 손이나 두 손으로 처진 손을 경기장에 짚게 한다.
① 밭다리걸기 : 오른쪽 다리로 상대의 오른쪽 다리를 밖으로 걸어 앞으로 당겨 붙이면서 상대의 뒷면으로 중심이 기울어지도록 감아 밀어붙여 넘어뜨린다.
② 밭다리후리기 : 밭다리걸기기술과 비슷한 동작에서 상대를 시계바늘의 반대방향으로 중심을 이동시키면서 공격자의 오른다리로 상대의 오른다리를 감아 후리치는 모양으로 다리를 감아올리면서 넘어뜨린다.
③ 밭다리감아돌리기 : 밭다리걸기로 상대에게 공격을 받았을 때 재빨리 오른쪽 어깨를 빼면서 오른쪽으로 돌면서 감겨 있는 오른다리를 올리면서 감아돌린다.
④ 안다리걸기 : 상대 선수를 앞으로 끌어당겨 붙여 오른다리로 상대의 왼다리를 안쪽으로 감아 끌어붙여 밀어 넘어뜨린다.
⑤ 오금걸이 : 맞배지기 싸움에서 힘씨름이 되었을 때 상대의 오른쪽 오금을 안쪽으로 걸어 밀어젖혀 넘어뜨린다.
⑥ 호미걸이 : 상대를 무릎 위에 들어올려 아래로 놓는 순간 상대의 발목 뒷부분을 발꿈치로 걸어서 끌어당기면서 젖혀 넘어뜨린다.
⑦ 낚시걸이 : 두 선수가 맞배지기로 샅바를 당겨 상체가 붙어 엉거주춤한 상태에서 공격수가 오른무릎을 밖으로 굽히면서 발목을 상대의 오른발 바깥 발목에 걸어서 낚아 젖혀 넘어뜨린다.
⑧ 뒷발목걸이 : 상대가 왼다리자세일 때 오른쪽 다리 발목으로 상대의 왼발 발목을 바깥으로 걸어 밀어붙여 넘어뜨린다.
⑨ 뒤축걸어밀기 : 상대를 들어올리지 않고 서 있는 자세에서 오른쪽 발뒤꿈치로 상대의 오른쪽 발뒤꿈치를 걸어당겨 상대를 밀어 뒤로 넘어뜨린다.
⑩ 발목걸어틀기 : 샅바를 단단히 잡고 공격자의 오른발목으로 상대의 왼다리 발목을 안으로 걸어 왼쪽으로 틀어 젖혀서 상대를 넘어뜨린다.
⑪ 앞다리차기 : 바른 기본자세에서 앞으로 나와 있는 상대의 오른다리 발목을 발바닥으로 오른편에서 왼편 앞으로 차서 낚아채 넘어뜨린다.
① 배지기 : 씨름의 가장 기본적이고 대표적인 공격재간의 하나이다. 바른 자세에서 왼쪽 아래 복부와 왼허리로서 상대를 들고 오른쪽으로 돌면서 상대의 몸안으로 들어가면서 발은 뒤꿈치를 들고 시계방향으로 돌면서 던진다.
② 오른배지기 : 바깥샅바잡기 또는 왼어깨자세가 되었을 경우에 오른쪽 허리와 다리가 상대의 몸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상대의 배를 공격하여 던진다.
③ 맞배지기 : 서로가 샅바를 단단히 휘어잡고 일어나자마자 몸의 중심을 낮추고 무릎을 굽혀 상대를 정면으로 맞대어 끌어붙여서 뽑아 던진다.
④ 엉덩배지기 : 바른 기본자세에서 공격자가 어깨로 상대를 미는 순간 오른편으로 공격자의 몸을 크게 회전시켜 엉덩이를 상대의 배 깊숙이 돌려대어 힘차게 당기면서 상대를 돌려 던진다.
⑤ 돌림배지기 : 두 선수가 기본자세로 맞잡은 상태에서 팔과 몸의 힘의 중심을 차츰 오른편 위로 올리는 ‘나선형’회전을 취하면서 상대를 배지기 형태로 돌려 던진다.
⑥ 들배지기 : 샅바를 단단히 잡아 무릎을 굽히고 무릎과 무릎 사이를 약간 앞뒤로 붙여서 상대를 무릎 위까지 높이 들어올려 배지기기술로 연결시켜 던진다.
⑦ 들어놓기 : 상대를 무릎 위 또는 가슴 부근까지 들어올려 몸에다 바싹 붙여 허리를 당겨 조이면서 그대로 상대가 엉덩방아를 찧게 하고 힘을 가하여 온몸으로 누른다.
⑧ 들안아놓기 : 양 무릎을 굽히면서 상대의 왼편무릎을 안다리 오금 안쪽으로 당겨서 상대를 무릎 위에 높이 들어올리면서 띠를 놓은 오른손으로 상대의 두 다리를 오금을 감는 듯 짚으면서 윗몸으로 밀어붙인다.
⑨ 돌려뿌리치기 : 두 선수가 무릎을 맞댄 엉거주춤한 자세에서 오른쪽으로 회전하여 돌면서 그 탄력과 회전속도에 의하여 상대를 떨어뜨린다.
⑩ 공중던지기 : 어깨를 맞잡고 있는 상태에서 빼면서 뒷무릎을 굽혀 약간 앞으로 나오는 동시에 상대를 비껴 앞 위로 당기며 온몸의 힘을 위로 솟구쳐 올리면서 고리와 띠를 잡은 손과 팔을 크게 왼편 위로 올려서 상대를 몸에 붙이지 않고 던진다.
⑪ 허리꺾기 : 상대를 끌어당겨 허리띠를 깊숙이 잡고 고리를 잡은 손과 같이 손목을 안으로 굽히면서 허리를 꺾어 당긴다.
⑫ 밀어던지기 : 바른 자세에서 뒷무릎을 약간 굽혀서 몸의 중심이 뒤로 기울어졌을 때 샅바를 당기면서 밀어붙인다.
① 모둠앞무릎차기 : 어깨로 상대의 어깨 및 윗몸을 약간 위로 밀어올리는 듯하여 발생하는 힘의 반동을 이용, 상대 몸의 중심이 약간 앞으로 떨어지는 순간을 포착하여 어깨를 빼면서 오른손으로 상대의 앞무릎을 치면서 오른발바닥으로 상대의 발목 안쪽을 걷어찬다.
② 차돌리기 : 상대의 윗몸을 일으켜 세우는 동시에 오른쪽 방향으로 회전하면서 상대의 뒷발목 및 다리를 옆으로 후려차며 돌려 던진다.
③ 무릎대어돌리기 : 상대의 윗몸을 일으켜 세우는 동시에 오른쪽 발바닥으로 상대편 왼다리 바깥무릎에 대어 오른쪽으로 돌려 던진다.
④ 등채기 : 허리띠를 잡고 있는 오른편 손이 상대의 어깨너머로 띠를 잡아서 앞으로 힘껏 잡아당기면서 던진다.
⑤ 등쳐감아돌리기 : 오른다리로 상대의 오른쪽 바깥 오금을 감는 동시에 등띠를 잡고 왼쪽 다리를 축으로 하여 왼편으로 중심회전을 하되 감겨 있는 다리를 위로 올리면서 윗몸을 앞으로 굽히면서 크게 회전한다.
⑥ 등쳐감아젖히기 : 등띠를 잡은 자세에서 오른다리로 상대의 오른다리를 감고 등쳐감아돌리기의 기술과 반대로 몸을 뒤로 당겨 젖힌다.
⑦ 연장걸이 : 바른기본자세에서 오른다리로 상대의 오른다리를 꼬아 감아서 왼쪽 다리를 축으로 하여 중심이동하여 돌며 감아 던진다.
⑧ 잡채기 : 기본자세에서 순간적 순발력으로 힘껏 샅바를 당겨 오른쪽 허리를 상대의 허리 및 몸에 붙이는 동시에 상대의 허리를 꺾는듯 젖혀 던진다.
⑨ 애목잡채기 : 허리띠를 잡고 있던 손으로 상대의 목을 감아 잡채기 기술요령에 의한 방법으로 공격을 시도하여 던진다.
⑩ 들어잡채기 : 오른다리를 상대방의 다리 사이에 넣고 상대방을 가슴 가까이 당겨 든 자세에서 왼쪽으로 젖혀 넘어뜨린다.
⑪ 옆채기 : 바깥잡기에서 고리를 잡은 왼손을 놓고 왼쪽으로 돌면서 오른다리를 상대방의 다리 사이에 깊숙이 넣고 허리샅바를 당기면서 옆으로 채올려 넘어뜨린다.
⑫ 업어던지기 : 상대의 허리샅바를 놓고 상대의 오른팔을 잡고 오른허리를 상대의 허리부분에 밀착시켜 몸을 왼쪽으로 돌려 상대를 업어서 던진다.
⑬ 어깨넘어던지기 : 겹쳐잡기 상태에서 상대편 몸 안에 있던 선수가 뒤로 뒤집는 자세로써 상대를 어깨너머로 던진다.
⑭ 자반뒤집기 : 기본자세에서 장기전 상태로 돌입하여 엎치락뒤치락하는 상황에서 등띠를 잡고 위에서 등을 누를 때 상대편 몸 아래 있는 선수가 뒤집어 젖힌다.
⑮ 샅들어치기 : 겹쳐잡은 상태에서 사타구니 사이로 들어가서 머리와 목으로 흔들어 중심을 잃게 하여 뒤로 넘어뜨린다.
⑯ 앞으로누르기 : 혼전 끝에 상대의 몸 중심이 앞으로 쏠릴 때 상대의 윗몸을 아래로 눌러 손을 짚게 하거나 앞으로 쓰러지게 한다.
⑰ 꼭뒤집기 : 상대의 바깥다리를 피하면서 뒷덜미를 손으로 누르고 왼쪽 다리 고리의 손을 틀면서 오른쪽으로 돌려 넘어뜨린다.
⑱ 빗장걸이 : 상대방의 안다리걸기기술이 성립되었을 때 상대의 다리를 사타구니로 죄어붙여 발목으로 상대의 왼다리 오금을 걸어 왼쪽으로 젖힌다.
⑲ 무릎틀기 : 기본자세에서 맞배지기 형태로 쌍방 무릎이 굽은 상태에서 쌍방이 오른쪽 부분이 맞닿아 있을 때 상대의 옆무릎을 붙여 왼편으로 틀어젖힌다.
⑳ 덫걸이 : 상대가 배지기 공격을 할 때 또는 왼다리를 앞으로 세울 때 오른다리로 상대의 왼다리를 밖으로 걸어당겨 상대를 밀어 덮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