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명나라와 청나라의 사신을 영접하던 곳이다. 1407년(태종 7)송도(松都)의 영빈관을 모방하여 서대문 밖에 건립하여 이름을 모화루(慕華樓)라 하였다. 모화루 앞에는 영은문(迎恩門)을 세우고 남쪽에 못을 파 연꽃을 심었다.
1429년(세종 11) 규모를 확장하여 개수하고 모화관이라 개칭하였다. 중국 사신이 올 때는 2품 이상인 원접사(遠接使)를 의주에 보내고, 선위사 또한 2품 이상인 자로 도중 5개처에 보내어 맞게 하고 연회를 베풀어 위로하였다.
서울에 도착하면 이 모화관에 드는데, 이 때 조선의 왕세자는 그의 앞에 나아가 재배의 예를 행하고 백관도 재배의 예를 행한다. 이 때 백관은 반을 나누어 사신이 도착하기 전에 관에 나아가 대기하였다.
또, 사신이 돌아갈 때는 백관이 품계의 정종(正從)의 위치를 달리하여 두 줄로 섰다가 일제히 재배례를 행하였다. 그 뒤 청일전쟁 이후 모화관은 폐지되고, 1896년서재필(徐載弼) 등이 독립협회를 세우고 그 모화관을 사무실로 쓰는 한편,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고 모화관을 독립관이라 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회관으로 사용하였다. →독립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