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고종 32)∼1976. 함경남도 함흥 출생. 함흥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에 유학하여 메이지대학(明治大學)에서 법학을 공부하였다.
그 뒤 귀국하여 당시 청년지도자 이상재(李商在)가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청년들의 체력단련이 중요한 것을 강조하자, 1919년 5월부터 1923년 8월까지 중앙기독교청년회(YMCA)에서 유도사범으로 활동하면서 청년들의 체력향상에 힘썼다.
1923년 10월신상동(愼相東)·변태현(卞太鉉) 등 17명의 제자들과 함께 조선강무관(朝鮮講武館)이라는 유도장을 개설하여 유도의 보급과 선수 및 지도자를 양성하였다. 진급·승단 시합의 심판진으로서, 또한 강무관을 주축으로 1924년 7월에 실시된 전국무도순회주최자로서 우리나라의 초창기 유도발전에 공헌하였다.
1927년경에는 강낙원(姜樂遠)·서상천(徐相天) 등과 함께 우리나라 씨름의 실태를 조사하고 조선씨름협회를 창설함으로써 현대적 경기로서의 씨름을 태동시켰다.
광복 전에는 배재고등보통학교·보성고등보통학교·중앙고등보통학교·동성상업학교 등의 교사를 역임하였고, 광복 후에는 국학대학(國學大學) 교수와 외국어대학 강사 등으로 30여년간 교육계에 종사하였다.
1945년 조선유도연맹(대한유도회 전신) 창립에 중추적 역할을 하였으며, 초대부회장을 비롯하여, 1957·1960·1973년 등 네 차례에 걸쳐서 대한유도회 회장서리 또는 회장직을 지냈다. 1955년유도학교(용인대학교의 전신)의 교장직을 역임하였고, 그가 죽은 뒤 대한유도회는 유도 10단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