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한양(漢陽)이다. 자는 선영(善永) · 야군(野君)이고, 호는 혜산(蕙山)이다. 유숙의 집안은 6대조 유진한(劉振漢)이 중국어 역과에 합격한 이래 대대로 역관과 무관 등에 종사하였다. 할아버지는 유순(劉珣), 아버지는 유석황(劉錫煌)이다. 유석황은 청학(淸學)을 전공하였고, 무관 정2품 절충장군을 지냈다. 어머니 공씨(孔氏)는 5대에 걸쳐 율과 합격자를 배출한 중인 집안 출신이다. 장인 이재태(李在泰) 또한 중국어 역관으로 종2품 가선대부를 지냈다. 유숙도 청학(淸學)을 공부하였으나, 도화서 화원이 되어 사과(司果)를 지냈다. 아들을 셋 두었는데, 첫째 유광표(劉光杓)는 왜학(倭學)으로 역과에 합격하였고, 둘째 유영표(劉英杓)는 그림에 재능이 있었으나 요절하였다.
유숙은 26세인 1852년과 35세인 1861년에 철종 어진 제작에 참여하였다. 1872년에는 고종 어진 도사(圖寫)에 수종화사로 참여하는 등 화원으로서 기량을 인정받았다. 1848~1868년 궁중 행사에 여러 차례 차출되었다. 1853년부터 1870년까지 차비대령화원으로 봉직하며 녹취재에 응하였다. 이 기간 총 12회 사과 혹은 사정에 부록되었으며, 누각, 산수, 인물에서 좋은 성적을 얻었다.
벽오사(碧梧社)의 일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유최진(柳最鎭), 조희룡(趙熙龍), 이기복(李基福), 전기(田琦), 나기(羅岐), 유재소(劉在韶) 등과 가깝게 지냈다. 또한 장지완(張之琬)을 중심으로 한 배연시사(裴然詩社), 김석준(金奭準)이 중심이 된 육교시사(六橋詩社)의 인사들과도 친분을 유지하였다. 1849년 김정희(金正喜)가 그의 산수화에 평한 내용이 『예림갑을록(藝林甲乙錄)』에 실려 있다.
유숙은 산수, 화조, 영모, 도석인물, 풍속, 사군자, 괴석 등 다양한 화목을 두루 섭렵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회화 세계를 구축하였다. 기년이 있는 작품을 중심으로 전기[20~30대]와 후기[40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전기는 남종화풍의 산수화와 시회도(詩會圖), 풍속화, 인물화 등에 뛰어났으며, 후기에는 호방한 필묵을 구사한 괴석도와 사군자화를 주로 그렸다.
관념산수화는 추사파의 간일한 산수화와 청대 정통파 화풍을 따랐으며, 진경산수화와 풍속화도 계승하였다. 도석인물화와 화조화는 김홍도(金弘道) 화풍을 따르되 필묵과 채색에 변화를 주었다. 이처럼 유숙은 전통의 바탕 위에 청대 화풍을 수용하고 개성적인 필묵을 더해 19세기 화원화의 발전을 이끌었다.
주요 작품으로 「대쾌도(大快圖)」, 「수계도(修禊圖)」[1853], 「범사도(泛槎圖)」[1858], 「벽오사소집도(碧梧社小集圖)」[1861], 「소림청장도(疏林晴嶂圖)」, 「세검정도(洗劍亭圖)」, 「화외소거도(花外小車圖)」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