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선영(善永) 또는 야군(野君), 호는 혜산(蕙山). 도화서(圖畵署) 화원으로 사과 벼슬을 역임하였다.
1852년(철종 3)과 1861년 철종어진(哲宗御眞) 제작에 참여하였고 1872년(고종 9) 고종어진도사(高宗御眞圖寫)의 수종화사(隨從畵師)로 종사하였다.
『예림갑을록(藝林甲乙錄)』에 의하면, 그는 전기(田琦), 김수철(金秀哲), 이한철(李漢喆), 유재소(劉在韶), 박인석(朴寅碩) 등 당대의 화가들과 교유하며 김정희(金正喜)의 지도를 받았던 인물이었다. 김정희는 그의 그림에 대하여 “필치에 속기(俗氣)는 없으나 다만 적윤(積潤)의 의(意)가 모자란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가 남긴 산수화들을 보면 「세검정도(洗劍亭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와 같이 실경을 다룬 것도 있지만 대부분이 김정희풍의 문인화와 상통되는 작품들과 더불어 김홍도(金弘道) 화풍의 일면을 짙게 풍기고 있다.
그는 산수화와 함께 영모(翎毛), 도석인물(道釋人物), 풍속 등에도 능하였으며, 특히 풍속화는 그를 고비로 유행의 막을 내리게 된다. 씨름하는 장면을 소재로 다룬 「대쾌도(大快圖)」(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는 김홍도 화풍의 여운을 남기면서 조선 후기에 풍미하였던 풍속화 유행의 말미를 장식하고 있다.
그는 벽오사(碧梧社)라는 중인 시사 모임의 일원이었다. 벽오사는 1847년 유최진의 집 벽오당에서 만들어진 여항문인들의 모임이다. 여기에 유숙을 비롯하여 전기, 유재소와 같은 화가들도 참여하여 그림을 그렸다. 유숙은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오로화첩(五老畵帖)』(1861)의 「벽오사소집도(碧梧社小集圖)」를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외에 1853년 3월 3일 중인문사들 30여 명이 모였던 시사 모임을 기념하여 「수계도(修禊圖)」라는 작품을 제작하였다. 이 그림은 왕희지의 「난정수계도」에 연원을 둔 것이다.
그의 대표작으로 「무후대불도(武后大佛圖)」, 「화외소거도(花外小車圖)」(이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계산추색도(溪山秋色圖)」, 「미원장배석도(米元章拜石圖)」(이상 개인 소장)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