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구여(九如), 호는 학석(鶴石), 형당(蘅堂), 소천(小泉).
20대에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집안에서 겸인(傔人)으로 일하였다. 이후 사복시 판관을 지냈다. 전기(田琦), 김수철(金秀哲), 허유(許維), 이한철(李漢喆), 유숙(劉淑), 조중묵(趙重默), 박인석(朴寅碩) 등 당대의 화가들과 김정희(金正喜)의 가르침을 받으며 교류하였다. 김정희는 『예림갑을록(藝林甲乙錄)』에서 그의 그림에 대하여 “원인(元人)의 필의(筆意)는 있으나 간고정엄(簡古精嚴)할 곳에 힘을 주지 못하였다.”고 하면서 “이는 기법(奇法)을 먼저 하고 정격(正格)을 소홀히 하였기 때문”이라고 낮추어 평하였다.
1847년 유최진(柳最鎭)을 중심으로 결성된 여항문인의 시사모임인 벽오사를 중심으로 문예 활동을 전개하였다. 유재소와 금란(金蘭)의 친교를 맺었던 전기와의 교유는 그가 벽오사에서 활동하는 계기가 되었다.
산수화를 즐겨 그렸는데, 간결한 구도라든지 갈필(渴筆)의 필치, 그리고 수지법(樹枝法) 등에 원말사대가(元末四大家)인 예찬(倪瓚)과 황공망(黃公望)의 화풍이 깃들어 있다. 그의 이러한 화풍은 사의(寫意)와 문기(文氣)를 중시하고 깔끔한 남종화만을 존중하며 조선 말기 화단의 주류의 사조를 이루었던 김정희파와 경향을 같이하는 것이다.
대표작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산수도 2점과 「청송도(靑松圖)」, 그리고 『예림갑을록』의 비평 대상이었던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의 「추수계정도(秋樹溪亭圖)」, 「추산심처도(秋山深處圖)」, 서울대학교박물관「산수도(山水圖)」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