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晋州)이다. 자는 자고(子固) · 성유(聖攸)이고, 호는 수운(岫雲) · 가산(笳山) · 무심옹(無心翁)이다. 문무를 겸한 명문 가문 출신으로, 6대조는 공조판서를 역임하고 묵죽을 잘 그린 유진동(柳辰仝), 할아버지는 인천부사를 지낸 유호연(柳浩然)이다. 아버지는 유성삼(柳星三)으로, 사간원과 사헌부 장령 등을 역임했다. 어머니는 광평대군(廣平大君)의 후손 이석신(李碩臣)의 딸이다. 5남 2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명린(李命麟)의 딸과 혼인하여 2남 3녀를 두었다. 1680년(숙종 6)의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집안이 쇠락하여 맏형 유헌장(柳憲章)만이 당상관에 이르렀다.
유덕장은 초시에 떨어진 후 평생 묵죽화에 매진했으며, 관직은 첨지중추부사와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교유한 인물은 묘지명을 쓴 이익(李瀷)을 비롯하여 이용휴(李用休), 권만(權萬), 정간(鄭幹), 이헌경(李獻慶), 신광수(申光洙), 남태응(南泰膺), 박사해(朴師海) 등이다. 그는 6대조 유진동 이래로 이어진 가전 화풍과 조선 중기를 풍미한 탄은(灘隱) 이정(李霆)의 화풍을 계승하여 개성적인 묵죽화풍을 이루었다. 초기작으로 여겨지는 하버드대학교미술관 소장 「묵죽도」 8폭 병풍에는 이정의 영향이 뚜렷이 드러난다. 그러나 직선에 가까운 죽절(竹節) 표현은 가전 화풍을 이은 것으로, 말년까지 이어지는 유덕장의 특징이다.
70대 작품인 1747년 작 8폭 병풍, 개인 소장 「노죽도」[1748],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연월죽도(煙月竹圖)」[1750]는 그의 성숙기 화풍을 잘 보여준다. 모두 1m가 넘는 대폭으로, 능숙한 필치와 유기적인 구성, 여유로운 공간감이 특징이다. 또한 달, 난초, 물 등의 소재를 함께 그려 소경산수화 같은 시적이고 서정적인 분위기를 추구했다. 녹색 안료와 송홧가루를 사용하는 등 대나무 그림의 표현 영역을 넓혔으며, 말년에는 설죽을 많이 그렸다. 박사해는 유덕장의 묵죽이 초기에는 기름지고 윤택했다가 만년에는 맑고 고아하게 변했다고 지적했는데, 이는 실제 작품의 양상과도 부합한다. 그 밖의 주요 작품으로는 「설죽도(雪竹圖)」[1748], 「신죽도(新竹圖)」[1751], 「설죽도」[1753] 등이 있다.
유덕장의 대나무 그림은 당시 중국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남태응을 비롯한 당대 문인들은 그를 이정 이후의 제일인자로 평하였다. 이용휴는 두 사람을 비교하여 "석양공자의 대나무 그림은 호방하고 빼어나며, 무성하고 장대하여 세(勢)가 뛰어나고, 수운옹(岫雲翁)의 대나무 그림은 맑고 윤택하며 흩어지고 비어서 운(韻)으로써 뛰어나다."라고 평하였다. 이처럼 유덕장은 대나무의 군자적 상징성과 시적인 정취를 조화시킨 개성적인 묵죽화풍을 정립하였다. 조선 중기 이정의 묵죽화 양식을 계승하는 동시에, 다음 세대인 심사정(沈師正)과 강세황(姜世晃)의 묵죽화 양식의 시작을 알린 교량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