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정 ()

촉잔도권(심사정 작)
촉잔도권(심사정 작)
회화
인물
조선 후기, 산수화, 도석인물화, 화훼영모화, 풍속화 등을 그린 화가.
이칭
이숙(頤叔)
현재(玄齋)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07년(숙종 33)
사망 연도
1769년(영조 45)
본관
청송(靑松)
주요 작품
강상야박도, 촉잔도권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심사정은 조선 후기 산수화, 도석인물화, 화훼영모화, 풍속화 등을 그린 화가이다. 청송 심씨 명문가 후손이었으나, 할아버지 심익창이 연잉군 시해 미수 사건에 가담하여 고문사하면서 집안이 몰락했다. 평생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산수화뿐만 아니라, 도석인물화, 화조영모화, 풍속화 등을 다작했다. 특히 당시 유입된 중국 화보를 참조한 그림을 많이 남겼다. 대표작으로는 「강상야박도」, 「촉잔도권」이 있다.

정의
조선 후기, 산수화, 도석인물화, 화훼영모화, 풍속화 등을 그린 화가.
가계 및 인적사항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자는 이숙(頤叔)이고, 호는 현재(玄齋)이다. 1707년(숙종 33) 죽창(竹窓) 심정주(沈廷胄)와 하동 정씨(河東鄭氏)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沈之源)의 증손자이자, 심익창(沈益昌, 16521725)의 손자이며, 선비 화가로 포도를 잘 그린 정유승(鄭維升)의 외손자이다. 친가와 외가 모두 명문가로 손꼽히는 가문이었다. 청송 심씨는 왕실과의 혼인을 통해 성장한 명문거족이었고, 하동 정씨는 사대부 화가 정경흠(鄭慶欽, 16201678)을 배출한 예술가 집안이었다.

증조할아버지인 심지원은 1620년(광해군 12) 정시 문과에 급제했음에도 은거 생활을 하다가, 인조반정 이후 일등 공신이 되어 벼슬길에 올랐다. 심지원의 셋째 아들 심익현(沈益顯, 16411683)도 이조 판서,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두루 거친 효종의 부마이다. 그러나 심익창은 1699년(숙종 25) 단종 복위를 기념한 과거에서 부정을 음모하여 관직 삭탈되었고, 10년 이상 곽산(郭山)에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후에는 김일경(金一鏡, 16621724)과 공모하여 당시 왕세제인 연잉군(延礽君), 즉 영조(英祖, 1694~1776)를 시해하려 하였다. 이 일로 심익창은 여러 차례 고문을 받다가 1725년(영조 1) 2월 사망했다. 이때부터 청송 심씨는 역모 죄인의 후예로 낙인찍혀 몰락했다. 심사정의 아버지 심정주는 화를 면했지만, 평생 그림을 그리며 숨어 지내야 했다.

주요 활동

1748년(영조 24) 삼성진전(三聖眞殿)의 어진모사중수도감(御眞摸寫重修都監)에 조영석(趙榮祏), 윤덕희(尹德熙)와 함께 화사(畵事)의 감독 격인 감동(監董)으로 발탁되었다. 이 일을 주도했던 이주진(李周鎭)이 6촌 동생인 심사정을 영조에게 추천했다. 다른 선발자와 더불어 경현당에서 영조를 배알했으나, 역적 심익창의 손자에게 어진 제작이라는 중역을 맡기는 것은 부당하다는 사직(司直) 원경하(元景夏)의 상소에 의해 5일 만에 파출되었다. 이후 더욱 그림에 몰두하며 환갑에 가까운 나이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그림을 4점씩 그려냈다. 그가 말년을 보낸 곳은 서대문 밖 반송지(盤松池) 북쪽 골짜기로, 주로 상인들이 밀집한 지역이었다. 궁핍한 생활을 지속하다 1769년(영조 45) 63세의 나이로 굶주려 사망했다.

심사정은 어린 시절 정선(鄭敾)에게 그림을 배웠다. 그러나 15세 되던 해인 1721년(경종 1)에 정선이 하양 현감으로 부임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이후 집안이 몰락하자, 사대부의 길을 포기하고 생계를 위해 그림을 그리는 전문 화가의 삶을 살았다. 역적의 후손으로 낙인이 찍혀 교유 관계의 폭도 넓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와 가장 많이 왕래한 인물이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이다. 두 사람은 그림을 함께 그리거나 감상했으며, 주변 선비들과 함께 모임을 결성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그림으로 남아 있는 ‘균와아집(筠窩雅集)’이다. 균와라는 곳에 강세황과 심사정, 그리고 허필(許佖), 최북(崔北), 김홍도(金弘道), 김덕형(金德亨, 1750~?), 추계(秋溪), 균와라는 인물이 모여 아회(雅會)를 열고 이를 그림으로 기록했다.

특히 강세황은 여러 제발(題跋)을 통해 심사정의 그림을 높이 평가했고, 강세황의 품평은 그의 창작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또한 『표현양선생연화첩(豹玄兩先生聯畵帖)』과 같은 합작도 남겼다. 1761년(영조 37)에 완성된 이 화첩에는 강세황, 심사정과 ‘갈은’이라는 인물이 그린 산수화, 화조화, 사군자 26폭이 장첩되어 있다.

또한 당대 최고의 서화 수장가였던 김광수(金光遂), 김광국(金光國)과도 친분이 깊었다. 사회적 제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서화나 당시 국내 수용된 화보류의 탐독이 가능했던 것은 이들의 도움이 적지 않았다. 이들의 우정은 1744년(영조 20)에 심사정이 그린 「와룡암소집도(臥龍庵小集圖)」에서 확인된다. 그가 비를 피해 갑자기 김광수의 집으로 뛰어 들어가니 이미 김광국이 방문한 상태였고, 우연히 만난 세 사람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이 상황을 그림으로 남긴 것이다.

심사정의 그림은 조선 중기에 유행한 주1 양식과 17세기부터 본격화되는 남종화 양식을 토대로 제작되었다. 절파의 경우, 김명국(金明國)의 영향을 받은 외종조부 정유승의 인물화 양식이 일부 계승되었다. 남종화의 경우는 중국에서 유입된 『고씨화보(顧氏畵譜)』,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 등의 화보를 참조하여 다양한 화목의 그림을 남겼다. 강세황에 따르면, 심사정은 북송대 문인화가 미불(米芾)의 주2과 명대 주3의 문인화가인 심주(沈周)의 화필을 구사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호를 ‘현재’라 한 것도 명대 남북종론을 정립한 동기창(董其昌)의 호인 현재(玄宰)를 따른 것이다. 여느 화목보다 산수화에서 더욱 남종화 양식을 수용했다.

대표작으로는 「강상야박도(江上夜泊圖」(국립중앙박물관)가 있다. 만 40세 때인 1747년(영조 23)에 그린 「강상야박도」에는 “들길은 구름이 드리워 어두운데 강 위의 외로운 배만이 불을 밝히고 있네[野逕雲俱黑, 江船火獨明].”라는 두보(杜甫)의 「춘야희우(春夜喜雨)」가 적혀 있다. 상단의 산세나 하단의 나무 표현에서 『개자원화전』을 참조했음이 확인된다.

사망 1년 전인 1768년(영조 14) 8월에 그린 「촉잔도권(蜀棧圖卷)」[간송미술관]은 이백(李白)의 시 「촉도난(蜀道難)」을 주제로 삼아 지금의 쓰촨성[四川省]에 해당하는 촉(蜀)으로 가는 여정을 그린 산수화이다. 세로 58㎝, 가로 818㎝의 종이에 담채로 완성하였다. 기이한 절벽과 험준한 바위에 여러 색채와 다양한 필묵법이 구사되었고, 치밀한 구성이 생동감을 더하면서 촉도(蜀道)의 험난한 여정이 표현되었다. 그림에 적힌 심사정의 친척 심래영(沈來永, 17591826)의 발문에 의하면, 심래영의 아버지 심유진(沈有鎭, 17231787)과 작은아버지 심이진(沈以鎭, 1723~1768)의 요청으로 제작되어 집안에 소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실경산수화로는 「명경대」, 「만폭동」 등의 금강산 그림과 한양 주변을 그린 「경구팔경도(京口八景圖)」가 전한다. 그 밖에 도석인물화, 화훼초충화, 영모화, 사군자화, 풍속화 등도 다수 남겼다.

참고문헌

원전

『영조실록(英祖實錄)』
『정조실록(正祖實錄)』
『일성록(日省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청성집(靑城集)』

단행본

『한국역대서화가사전 상』(국립문화재연구소, 2011)

논문

전인지, 「심사정(1707∼1769) 회화연구」(이화여자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2019)
이예성, 「현재 심사정 회화 연구」(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사 학위 논문, 1998)
주석
주1

중국 명나라 말기에 유행한, 필묵이 웅건하고 거친 산수화 유파. 우리말샘

주2

동양화에서, 산악·암석 따위의 입체감을 표현하기 위하여 쓰는 기법. 우리말샘

주3

중국 명나라 때, 중국 회화의 주류를 이루었던 화파. 옛 오나라 지방인 쑤저우(蘇州)에서 활동하였던 남종 문인화 계열의 작가들을 이른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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