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晋州)이다. 자는 광지(光之)이고, 호는 표암(豹菴) · 첨재(添齋) · 산향재(山響齋) · 박암(樸菴) · 노죽(露竹), 시호는 헌정(憲靖)이다. 숙종 대에 예조판서를 지낸 백각(白閣) 강현(姜鋧)과 광주 이씨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5세에 진주 유씨 유뢰(柳耒)의 딸과 혼인하였으며, 슬하에 강인(姜亻+寅), 강완(姜俒), 강관(姜亻+寬), 강빈(姜儐), 강신(姜信)의 다섯 아들을 두었다.
강세황 집안은 15세기 이후 충청도 천안을 기반으로 명문 사족으로 성장하였다. 진주 강씨 은열공파(殷列公派)의 지류인 백각공파(白閣公派)에 속하며, 당색은 소북(小北)이다. 증조할아버지 죽창(竹窓) 강주(姜籒), 할아버지 설봉(雪峯) 강백년(姜柏年), 아버지 강현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조정에서 요직을 역임하였다.
형 강세윤(姜世胤)이 이인좌의 난(1728)에 연루되면서 강세황의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사회적 활동에 한계를 느낀 강세황은 32세가 되는 1744년 처가의 고향이자 근기 남인의 중심지인 경기도 안산으로 이주하였다. 안산에 정착한 강세황은 처남인 유경종(柳慶種)을 비롯한 진주 유씨가의 젊은 문인들과 더불어 시서화에 전념하며 삼절(三絶)로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 무렵 안산에는 성호(星湖) 이익(李瀷)이 학문에 전념하며 실학이라는 개혁적인 사상 조류를 일구고 있었다. 강세황은 이익을 비롯한 여주 이씨의 젊은 지식인들과 서화와 학문으로 친밀하게 교류하며 그 영향을 흡수하였다.
당시 강세황은 유경종을 위하여 「현정승집도(玄亭勝集圖)」를 제작하였으며, 이익의 요청으로 「도산도(陶山圖)」, 「무이도(武夷圖)」를 그려 주었다. 1757년에는 개성을 유람하고 조선의 산수화에 서양식 투시 원근법을 적용한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을 제작하였으며, 「복천오부인86세진(福川吳夫人八十六歲眞)」이라는 여성 초상화를 남기기도 하였다.
영조 초기의 정치적 혼란기가 지나가고 탕평 정국을 맞아 강세황 가문의 복권이 이루어졌다. 1763년 둘째 아들 강완이 과거에 급제하였다. 이와 동시에 영조는 ‘천한 기술 때문에 얕보는 자’가 있을지를 염려하여 강세황에게 회화를 자제하도록 권고하였다. 강세황은 1766년 자신의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표옹자지(豹翁自誌)」를 지어 이 일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영조의 배려에 감격한 강세황은 붓을 태워버리고 이후로 다시 그림을 그리지 않기로 맹세하였다.
1773년 61세에 영조의 부름을 받은 강세황은 영릉참봉(寧陵參奉)으로 출사하였다. 1774년에는 남산 부근에 무한경루(無限景樓)를 구입하여 서울로 이주하였다. 이때부터 사포서(司圃曙)에서 김홍도(金弘道)와 함께 근무하였다.
정조가 등극한 1776년에 시행된 기로과(耆老科), 그리고 1778년 시행된 문신정시(文臣庭試)에 거듭 수석으로 급제하였으며, 이후 20여 년 동안 관직을 유지하였다. 정조는 미술에 대한 이해가 높아 시각 미술을 적극적으로 국정 운영에 활용하고자 하였다. 강세황은 서화에 재능을 지닌 관료로서 정조의 문화 정책에 참여하여 국정을 보좌하였다.
1781년에는 정조의 30세 어진(御眞) 제작 책임을 맡았다. 이는 정조의 첫 번째 어진 제작이었으며, 한종유(韓宗裕), 신한평(申漢枰), 김홍도 등 도화서의 대표 화원들이 참여하였다. 강세황은 화원들을 이끌어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하였고, 정조는 어진 제작에 참여한 신하들을 이끌고 창덕궁 후원을 유람하였다.
어진 제작을 즈음하여 강세황은 절필을 마치고 적극적으로 회화 제작에 임하였다. 1782년 70세를 맞은 강세황은 자신의 기념비적인 자화상을 제작하였다. 이 자화상에서 강세황은 관료의 모자에 한거(閑居)할 때 착용하는 야복(野服)이라는 모순된 도상으로 자신의 일생을 기념하였다. 자화상에 직접 적은 화상 찬문에 따르면, 관모는 조정의 관료란 현실의 지위를 상징하고, 몸에 걸친 야복은 탈속한 내면세계를 의미하였다. 70세 자화상의 도상은 자신의 내면과 외면을 동시에 표현하기 위한 시도로서 강세황이 지닌 예술적 독창성을 증명한다. 이듬해인 1783년에는 강백년, 강현을 이어 기로소에 입소함으로써 ‘삼세기영(三世耆英)’으로 칭송받는 영예를 얻었다. 강세황은 기로소 입소를 기념하여 관복을 갖추어 입고 표피로 덮은 의자에 앉은 공신상 형식의 초상화를 제작하였는데, 초상화를 잘 그렸다는 평가를 받는 화원 이명기(李命基)가 그렸다.
1785년 중국 건륭제(乾隆帝)의 나이 75세, 즉위 50년을 축하하는 천수연(千叟宴)에 참석하기 위한 사행에 강세황은 부사(副使)의 자격으로 참가하였다. 강세황의 글씨를 본 건륭제는 ‘미하동상(米下董上)’, 즉 주1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주2보다 뛰어나다는 평가를 내렸다고 한다. 북경에서 강세황의 서화는 청의 문사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19세기까지도 조청 문인의 묵연을 이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1788년에는 아들 강인이 강원도 회양 부사로 부임한 일을 계기로 회양에 머물렀다. 같은 시기에 정조의 명령으로 강원도 일대를 돌아보고 실경을 그렸던 김홍도, 김응환(金應煥)과 더불어 금강산을 여행하고 유람기를 남겼다.
'예원의 총수'로 불린 강세황은 18세기의 대표적 문인화가이자 지식인으로서 이 시대 미술에 다방면에 걸쳐 기여하였다. 그는 강한 자의식을 바탕으로 젊은 시절부터 자화상을 제작하였으며, 70세에 이르러서는 역사상 보기 드문 기념비적인 자화상을 제작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조선 후기 화단에 남종화(南宗畵)를 정착시켰으며, 실경산수화에 서양식 투시 원근법을 도입하기도 하였다. 또 사군자화의 유행을 불러왔으며, 문인화풍의 화조화를 제작하여 이 장르의 정착에 기여하였다.
회화 제작 외에도 미술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안목을 바탕으로 18세기 주요 화가들의 그림에 화평을 적었다. 특히 김홍도와는 나이를 잊고 예술적 지기(知己)의 관계를 맺었으며, 김홍도의 풍속화가 지닌 시대적 가치를 인식하여 화평을 적고 김홍도의 전기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강세황은 역대 서법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일생에 걸쳐 수많은 법첩과 필적을 통해 서예를 배웠다. 그는 이왕(二王)으로 불리는 왕희지 · 왕헌지를 근간으로 삼아 미불, 조맹부(趙孟頫)의 서법을 연마하였으며, 해서 · 행서 · 초서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강세황의 작품 활동의 근저에는 일생 동안 수용한 명청 대 문예 사조와 안산에서 활동하며 흡수한 실학과 서학의 영향이 모두 자리 잡고 있다. 그의 이러한 학문과 작품 세계는 필사본으로 전하는 문집 『표암유고(豹菴遺稿)』(6권 3책)를 통해 현재에도 살펴볼 수 있다.
묘소는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도하리에 있으며, 충청북도 문화유산자료 제83호로 지정되었다. 시호는 헌정(憲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