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晋州)이다. 자는 성순(聖淳)이고, 호는 약산(若山) · 유당(留堂)이다. 강세황의 다섯째 아들인 강신(姜信)의 둘째 아들이다.
1817년 30세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는 1819년부터 관직에 나간 기록이 나타난다. 이원현감(利原縣監), 광양현감(光陽縣監), 초계군수(草溪郡守), 평산부사(平山府使), 김해부사(金海府使), 통진부사(通津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1833년 창덕궁 영건도감, 1834년 산릉도감, 1837년 태조의 영정모사도감 등 다양한 도감에서 활약하였다. 무과의 여러 직책을 역임하는 동시에 각종 도감에 차출되어 활약하였던 사실로 미루어 여러 분야에 걸쳐 다양한 재능을 지녔던 인물로 보인다.
강이오는 김정희(金正喜), 신위(申緯)의 아들 신명준(申命準), 조희룡(趙熙龍), 화원 이재관(李在寬)과 같은 19세기의 문화인들과 널리 교류한 것으로 나타난다. 조희룡은 『석우망년록(石友忘年錄)』에서 강이오가 그림을 잘 그린다고 하였으며, 특히 매화와 산수를 잘 그렸다고 하였다.
김정희의 『완당전집(阮堂全集)』에는 강이오의 매화 그림을 보고 적은 시문이 수록되어 있다. 김정희는 강이오를 주1의 일파라 평가하고, 그를 ‘천동의 기사[天東奇士]’라 칭하였다. 이재관이 그린 「강이오 초상」의 찬문에서 김정희는 "지혜를 갖춘 원만한 모습으로 지금 관직에 있는 신분이다. 이는 그림일 뿐인데 어찌 이리 흡사한지! 천지의 큰 모습을 가슴에 담고 가는 곳마다 신과 같은 공적을 이루었음을 누가 알겠는가!"라고 적었다.
이유원(李裕元)의 『임하필기(林下筆記)』에는 강이오가 헌종을 위하여 서안을 제작하였으며 이유원의 요청으로 원앙석연(䲶鴦舃硯)을 제작하였다는 등 흥미로운 일화가 수록되어 있다.
1857년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국립중앙박물관에 그의 작품인 「강안주유도(江岸舟遊圖)」와 「송하망폭도(松下望瀑圖)」가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