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89.7㎝, 가로 67.3㎝.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송시열은 조선시대의 대표적 문신이자 유학자로서, 죽은 뒤 그를 추모하여 받드는 수많은 영당 및 서원이 건립되었다. 그 가운데에서 위패 봉안만이 아니라 영정을 봉안하였던 영당 및 사우(서원부속)만 하여도 수원의 매곡(梅谷), 정읍의 효암(孝巖), 청주의 화양(華陽), 옥천의 용문(龍門) 등 거의 20여 개소에 이른다.
국립중앙박물관소장의 송시열상은 복건(幞巾)에 유복(儒服) 차림을 한 좌안7분면(左顔七分面)의 반신상이다. 화상의 오른쪽 상단에는 1651년에 송시열이 지은 제시(題詩)가 적혀 있다. 위쪽에는 1778년(정조 2) 정조의 어제찬문이 씌어 있다.
1651년 송시열이 지은 제시는 다음과 같다.
“자연 속에서 사슴들과 함께 지내며 / 초가집에서 사누나 // 창문은 환히 밝고 주위가 고요할 때 / 주린 배 참으면서 책을 보았다네 // 네 모습 볼품없고 / 네 학문 텅 비었구나 // 천제(天帝)의 진실한 마음을 어기고 / 성인의 말씀 업신여겼으니 / 너는 단언하건대 / 책벌레구나 // 1651년 우옹(尤翁)이 화양서옥(華陽書屋)에서 직접 글을 짓고 조심하는 마음을 가지다.[麋鹿之群 蓬蓽之廬 窓明人靜 忍飢看書 爾形枯臞 爾學空疎 帝衷爾負 聖言爾侮 宜爾置之 蠹魚之伍 崇禎紀元後辛卯 尤翁自警于華陽書屋]”
1778년 정조의 찬문은 다음과 같다.
“절개와 의리는 천년세월이 흘러도 고상하여 평생동안 나는 존중하였다. 역대 임금들도 누차 칭찬하고 높이 평가하였으니 사림(士林)들인들 어느 누가 공경하지 않겠는가? 종횡무진으로 내뱉는 말씀은 모두 이치에 합당하여 아름답게도 학문의 우두머리가 되었지만 천하를 다스릴 원대한 계획을 펼치지 못하고 아! 어지러운 세상을 만났다네. 한양의 사당(祠堂)에 엄숙하고 고고한 선생의 초상화가 있어 젊은 유생들이 모두 참배하러 갈 때에 승지가 한 잔 술을 올린다. 1778년 바쁜 국정(國政)에 틈을 내어 글을 짓다.[御製 正廟朝 節義千秋高 平生我敬重 烈祖屢褒崇 士林孰不聳 橫竪皆當理 蔚然理學宗 不盡經淪業 吘嗟叔季逢 洛中祠屋在 遺像肅淸高 衿佩盈進會 承宣奠一醪 崇禎紀元後再戊戌三月, 追製於萬機之暇]”
이 초상화의 제작 시기를 자제시기(自題詩紀)에 근거하여 간단히 1651년으로 보아서는 곤란하다. 그 까닭은 1651년이라면 송시열의 나이 45세가 되어 이 초상화에 보이는 깊게 파인 많은 주름살과 하얗게 센 수염이 말해 주는 노년의 모습과는 어긋난다. 또한 『우암연보(尤庵年譜)』에 송시열의 생시도사본(生時圖寫本)은 3본이 있었다 하는데, 이 3본의 기술 내용과 이 송시열상과는 합치되지 않는다.
이 초상화는 송시열의 사후 송시열에 대한 숭모의 마음에서 생시진본을 범본으로 하여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모 시기는 어제찬문에 나타난 정조 초년간으로 생각되며, 그 위에 송시열이 45세 때 지은 자제시(自題詩)를 옮겨 적은 것으로 추정된다. 비록 이모본이기는 하지만, 이 초상화를 그려낸 화사의 솜씨는 범수(凡手)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화법은 거의 음영법을 사용하지 않고 갈색 선으로 안모의 외곽과 주름살을 표현하였다. 숱 많은 눈썹, 강한 눈매, 붉은 입술은 엄정하면서도 과격한 그의 성품의 일단을 말해준다. 그 위에 검은 복건과 백색 유복, 간결한 옷주름 처리의 검은 선이 빚어내는 흑백 대조는 보는 이로 하여금 유학자로서의 송시열의 풍도에 쉽게 접할 수 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