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화 ()

김정희필 세한도
김정희필 세한도
회화
개념
직업화가가 아닌 문인 사대부들이 여기로 그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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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문인화는 직업화가가 아닌 문인 사대부들이 여기로 그린 그림이다. 중국 북송시대에 소식 등이 사대부의 그림은 신분적·교양적 차이로 인해 화공의 그림과 차이가 난다는 사대부 화론을 제창한 이후로 문인화라는 개념이 정착되었다. 이후 명나라 때에는 남종화를 문인화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기법에 얽매이거나 세부 묘사에 치중하지 않고 그리고자 하는 사물의 내적인 면을 표현하는 사의를 중시하며, 그림에 기교가 나타나지 않도록 치졸한 맛을 살려 그림으로써 천진함을 강조하는 특징을 갖는다. 수묵산수화와 사군자가 주요 소재였으며 대체로 시 형식의 화제를 곁들이는 경향이 있다.

목차
정의
직업화가가 아닌 문인 사대부들이 여기로 그린 그림.
연원 및 변천

중국 북송시대 소식(蘇軾)과 그의 친구들, 즉 서예가 황정견(黃庭堅), 서화가 겸 감식가인 미불(米芾), 묵죽화가 문동(文同), 인물 및 말 그림으로 유명한 이공린(李公麟) 등은 사인(士人)과 화공(畵工)의 그림은 각자의 신분적 · 교양적 차이로 인하여 필연적으로 여러 가지 차이가 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그리고 ‘사인지화(士人之畵)’ 또는 ‘사대부화(士大夫畵)’라는 용어와 사대부 화론(畵論)을 만들었다. 즉 사대부화란 그림을 직업으로 삼지 않는 화가들이 여기(餘技) 또는 여흥으로 자신들의 의중(意中)을 표현하기 위하여 그린 그림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북송대에는 사회적으로 문인이 곧 사대부라는 등식이 성립하였다. 그러나 원대부터는 반드시 그렇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여 결국은 ‘사대부화’ 대신에 ‘문인지화(文人之畵)’ 또는 ‘문인화’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명말 동기창(董其昌)을 중심으로 남북종화(南北宗畵) 이론이 성립되었고, 이후 남종화(南宗畵)와 문인화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다.

북송시대 사대부화, 즉 문인화의 정신은 우리나라 고려시대에 받아들여졌다. 당시의 왕공 사대부들이 여기로 그림을 그린 예를 문헌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고려의 공민왕(恭愍王), 이제현(李齊賢), 김부식(金富軾) 등이 그 예이다. 앞의 두 사람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그림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조선시대의 많은 문인사대부들도 그림을 남겼다. 초기의 문인화가 강희안(姜希顔)은 자신이 화가로서 이름을 남기는 것을 꺼려 자손들에게 자신의 그림을 모두 없애버리라고 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중국으로부터 남종화가 유입되면서 더욱 많은 문인화가들이 활약하게 되었으며, 이들은 화단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강세황(姜世晃), 이인상(李麟祥), 조영석(趙榮祏), 심사정(沈師正) 등이 그 좋은 예이다. 그리고 19세기의 김정희(金正喜)에 이르러 조선의 문인화는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내용

문인화는 기법에 얽매이거나 사물의 세부 묘사에 치중하지 않았다. 단지 그리고자 하는 사물의 진수를 표현할 수 있을 만큼 학문과 교양, 그리고 서도(書道)로 연마한 필력(筆力)을 갖춘 상태에서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마음속에서 완전히 준비하여 ‘흉중성죽(胸中成竹)’의 영감을 받아 즉시 그린다는 것이다. 문인화가들은 필력이 도(道)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여도 그림에 기교가 나타나지 않도록 치졸(稚拙)한 맛을 살려 그림으로써 천진(天眞)함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사물의 내적인 면을 표현하는 사의(寫意)를 중시하고, 이와 반대되는 형사(形似)를 추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그림은 서로를 잘 이해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감상되었고, 결코 매매되지 않았다. 또한 문인화에서는 옛 대가들의 필의(筆意)를 방(倣)하는 전통이 확립되어 후대에는 옛 대가의 회화 양식 자체가 주제가 되는 현상을 낳기도 하였다. 사의를 중시한 그림은 대개 소략하다. 그러므로 원대 이후의 문인화에는 시(詩) 형식의 화제(畵題)를 곁들여 그 의미를 풍부하게 하는 경향이 생기게 되었다. 이 때 시 · 서 · 화가 모두 뛰어나 삼절(三絶)을 이루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문인들이 표현 수단으로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한 소재는 수묵산수화이다. 그 다음은 매(梅) · 난(蘭) · 국(菊) · 죽(竹)의 총칭인 사군자(四君子)이다. 그 이유는 산수화가 예로부터 도(道)를 체현(體現)하는 가장 이상적인 소재로 여겨졌고, 사군자 역시 그 상징성으로 인하여 문인들이 가까이했기 때문이다. 또한 사군자를 그리는 데 구사하는 필획이 서예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점도 하나의 이유였다. 사군자의 연장선상에 있는 묵포도(墨葡萄)와 소채(蔬菜)의 스케치 등도 문인화에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문인들 중에도 청록산수화(靑綠山水畵)나 인물화를 잘 그린 사람도 있어서 그들이 그린 소재나 구사한 기법이 제한된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문인화의 개념과 한국의 문인화」(한정희, 『미술사논단』 4, 1996)
「조선시대후기의 남종문인화」(이성미, 『조선시대 선비의 묵향』, 고려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 1996)
「조선후기 미술의 사상적 기반」(강관식, 『한국사상사대계』 5,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2)
「한국남종화의 변천」(안휘준, 『한국회화의 전통』, 문예출판사, 1988)
Chinese Literati on Painting:Su Shih(1037-1101) to Tung Ch'i-ch'ang (1555-1636)(Susan Bush, Harvard Univ. Press,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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