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김해(金海)이다. 자는 사능(士能)이고, 호는 단원(檀園) · 단구(丹邱) · 서호(西湖) · 고면거사(高眠居士) · 취화사(醉畫士) · 첩취옹(輒醉翁)이다. 1745년(영조 21) 아버지 김석무(金錫武)와 어머니 장담 문씨(長潭文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급 무반 벼슬을 많이 배출한 중인 가문 출신이다. 5대조 김득남(金得男)은 수문장을, 고조할아버지 김중현(金重鉉)은 별제를, 증조할아버지 김진창(金震昌)은 만호를 지냈다. 그러나 할아버지 때부터 서얼로 신분이 떨어져 관직에 오르지 못했다. 외할아버지인 문필주(文弼周)는 그가 태어나기 3년 전인 1742년(영조 18)에 전라도 부안 부근의 격포를 지키는 하급 무관직을 지냈다.
강세황(姜世晃)의 『단원기(檀園記)』에는 무반가의 서얼 집안 출생으로, 10~14살 무렵에 유생(儒生) 강세황의 안산 집에 드나들며 ‘화결(畵訣)’, 즉 그림 그리는 방법을 배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대중(成大中)의 아들 성해응(成海應)은 그가 심사정(沈師正)에게 그림을 배웠고 정선(鄭敾)의 화법도 섭렵했다고 언급했다.
18~19세 무렵 예조 소속의 도화서 화원이 된 것으로 추정되며, 21세 때인 1765년(영조 41) 『경현당수작도계병(景賢堂受爵圖契屛)』을 제작하였다. 1773년(영조 49) 1월에 거행된 영조 어진 제작 때 동참화사(同參畫師)로 발탁되어 어용화사(御用畫師)의 반열에 올랐다. 같은 해 2월 궁중에서 사용하는 어류와 식염, 연료 등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사재감의 종6품 주부직에 임용되었다. 이후 4개월 뒤에 치러진 주1에 응시하였는데, 성적 불량으로 탈락하였다. 한 달 뒤인 7월 16일, 궁중의 화원과 화초, 과일의 관리 및 식목 등의 조경 업무를 하는 공조 소속 장원서의 종6품 별제직에 임명되었다.
1781년(정조 5) 8월 26일에서 9월 16일 사이에 거행된 정조의 31세 초상 도사(圖寫) 때 어용화사로 발탁되었고, 그 공으로 예조 소속 동빙고의 별제직을 받았다. 이어 1783년(정조 7) 12월 28일 자로 종6품 동반 외직인 안기도(安奇道) 찰방으로 발령받고 다음 해 정월 부임하여 2년 5개월간 근무하였다. 이후 상경하여 규장각에 드나들며 도화서 화원 업무를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1788년(정조 12) 정조의 명을 받아 김응환(金應煥)과 함께 금강산을 비롯한 영동 9군의 명승, 명소를 답사하며 50여 일 동안 주2을 수행했다. 당시 그린 초본을 토대로 청록풍의 횡권식과 수묵담채풍의 화첩식을 어람용으로 진상했다. 1790년(정조 14) 7월경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의 원찰로 세운 용주사의 불화 제작을 주관하였다. 이때 김득신과 이명기가 감동(監董)으로 함께 종사했다.
1791년(정조 15) 9월, 정조 어진 원유관본(遠遊冠本) 제작에 또다시 동참화사로 선정되었다. 그 공로로 충청도 연풍 현감을 제수받고 1792년(정조 16) 정월부터 1795년(정조 19) 정월까지 3년간 직을 수행했다. 1795년 도화서로 복귀한 뒤, 혜경궁 홍씨 회갑연과 참배 행사의 전모를 정리한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의 삽도 제작 주관자로 추천되었다. 1796년(정조 20)에는 화성 완공을 계기로 궁중 내입용 「화성추팔경도(華城秋八景圖)」 병풍 등을 그렸다.
1800년(정조 24), 김홍도를 특별 대우해 주던 정조가 갑작스럽게 승하하자 그의 입지에도 변화가 생겼다. 1804년(순조 4) 5월 5일 단오절에 규장각 차비대령화원으로 차정되어 그간 면제받던 녹취재에 응해야 했던 것에서 그를 둘러싼 환경의 변화를 단적으로 읽을 수 있다. 이후 병고와 가난으로 인한 생활고에 시달렸던 것으로 보이며, 1805년(순조 5) 동짓날에 절필작으로 추정되는 「추성부도(秋聲賦圖)」를 그렸다. 「추성부도」 제작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806년(순조 6) 초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대 최고의 화원 화가로서 산수화, 도석인물화, 풍속화, 화조화 등 모든 화목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정조는 “회사(繪事)에 속하는 일이면 모두 홍도에게 주장하게 했다.”라고 할 만큼 그를 총애했다. 서른 살이나 어린 그를 가장 아꼈던 강세황은 김홍도의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에 대해 ‘신필(神筆)’이라 평가했고, 『단원기』에서는 천지개벽 이전의 혼돈한 상태를 깨뜨려 연다는 뜻의 ‘파천황(破天荒)’이라 적었다.
또한 조희룡(趙熙龍)은 『호산외사(壺山外史)』에서 김홍도가 신선에 능했다고 평한 바 있는데, 리움미술관 소장 8폭 병풍인 「군선도(群仙圖)」는 이러한 평을 증명해 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김홍도의 회화는 크게 40세를 전후로 나눌 수 있다. 전기는 도화서 화원으로 그림에 전념하던 시기이고, 후기는 두 차례 지방관 생활을 하며 다양한 화목을 소화하던 시기이다. 정조의 화원이었던 그는 이미 40세 이전에 문인 사대부와 여항 문인의 그림 주문을 받았다.
예컨대 1773년(영조 49) 정범조(丁範祖)에게 「신언인도(愼言人圖)」를, 1779년(정조 3) 어용빈(魚用賓)에게 「송월도」를 주었고, 1778년(정조 2)에는 역관 이민식(李敏埴)을 위해 「서원아집도」 부채를 그렸다. 34세 여름에 완성한 「서원아집도」는 중국 북송의 정원 아회(雅會) 장면인 서원아집을 도해한 주3이다.
그의 화필은 연풍현감을 지낸 50대 이후 더욱 무르익었다. 봉명사경으로 금강산 일대를 주유하며 그린 금강산도를 보면 정선, 심사정, 김응환의 화법을 토대로 하되 개성 있는 필묵으로 한국의 실경을 재현했음이 확인된다. 또한 당시 문인 사대부 관료 및 일반 백성의 생활상을 알려주는 풍속화류도 적지 않게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