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비대령화원은 조선 후기 왕실과 관련된 서사 및 도화 활동을 담당하기 위하여 도화서에서 임시로 차출되는 화원이다. 1783년(정조 7)에 규장각 잡직으로 제도화되었다. 차비대령화원은 도화서 화원을 상대로 한 공개 시험으로 선발했다. 시험은 인물, 산수, 누각, 초충 등 총 8과목이다. 1881년까지 약 100년간의 운영 상황 기록이 규장각 일지 『내각일력』에 남아 있다. 신한평·김홍도·김득신 등 대표적인 화원 화가들이 차비대령화원을 역임했다. 차비대령화원은 조선 후기 화단의 변화를 제도사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恨中錄)』에 의해 ‘差備’를 조선 후기의 왕실에서는 ‘자비’로 읽었다. 차비대령화원은 당대 최고급의 대접을 받았는데, 본래 왕권 강화에 주력했던 영조대 후반경부터 임시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정조가 규장각(奎章閣)을 창설하고 이를 중심으로 강력한 친정(親政) 체제를 구축하고 난 뒤인 1783년(정조 7) 11월에 규장각의 잡직(雜職)으로 제도화되면서 본격화되었다.
제도가 폐지된 경위와 시기는 아직 미상이다. 그러나 1881년(고종 18) 9월까지 약 100년간의 운영 상황이 규장각 일지인 『내각일력(內閣日曆)』의 기록으로 파악되고 있다. 1783년에 마련된 최초의 응행절목(應行節目)에 의하면, 차비대령화원은 정원이 10명으로서 도화서 화원을 상대로 한 공개 시험으로 선발했다. 그리고 춘하추동 사계삭(四季朔)에 매 삭마다 3번씩 시험을 본 뒤, 그 결과를 종합하여 상위 두 사람에게 정6품의 사과(司果)와 정7품의 사정(司正)을 체아직(遞兒職)으로 수여한다고 규정하였다.
시험은 인물(人物), 산수(山水), 누각(樓閣), 초충(草蟲), 영모(翎毛), 문방(文房), 매죽(梅竹), 속화(俗畵)의 8과목을 대상으로 하여 주로 시제(詩題)로 출제하였다. 1차와 2차 시험은 규장각 각신(閣臣)이 출제하고 채점하여 국왕에게 보고하였다. 3차 시험은 국왕의 낙점을 받아 출제한 뒤 국왕이 직접 채점하도록 규정하였다.
그러나 실제 시행 과정에서 시험의 횟수나 시기 등은 상황에 따라 많은 변통이 행해졌다. 심지어 시험 이외에 왕실의 상전(賞典)으로 차비대령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또 규장각 이외의 관청에 차정되는 경우도 있었다. 1867년(고종 4)에 간행된 『육전조례(六典條例)』에 의하면, 정원이 26명인데 16명은 녹(祿)을 받고 10명은 녹 없이 화업(畵業)을 익힌다고 하였다. 1873년(고종 10)의 『내각일력』에는 20명을 선발한다는 기록도 있어 후대에는 제도 자체가 크게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본래 1783년의 응행절목에 구체적으로 명기된 차비대령화원의 소임은 어제(御製)의 인찰(印札) 작업뿐이었다. 그 밖의 내용에 대해서는 포괄적으로 언급하여 중요한 도화(圖畵) 활동은 반드시 차비대령화원이 담당한다고 규정하였다. 『육전조례』에서는 10년마다 행하는 어진도사(御眞圖寫)도 차비대령화원이 담당하는 것이 관례라고 명기함으로써 그 역할도 점차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1783년에서 1881년까지 『내각일력』에 기록된 차비대령화원은 약 104명 정도가 파악된다. 김응환(金應煥), 신한평(申漢枰), 김홍도(金弘道), 이인문(李寅文), 김득신(金得臣), 김하종(金夏鍾), 장한종(張漢宗), 이한철(李漢喆), 유숙(劉淑), 이형록(李亨祿), 백은배(白殷培), 유운홍(劉運弘) 등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화원 화가들이 모두 차비대령화원을 역임하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 차비대령화원은 조선 후기 화원들의 재직 실태의 일단을 상세히 알려준다. 그리고 조선 후기 화원화(畵員畵) 제작 실태의 일부를 구체적으로 알려 준다. 또한 조선후기 화단의 변화를 제도사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