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4년(정조 8)부터 1809년(순조 9)까지 26년간 차비대령화원으로 봉직했고, 4차례 사과(司果), 사정(司正)에 부록되었다. 특히 차비대령화원 신분으로 어진 제작에 3차례 참여했다. 1773년(영조 49) 영조의 곤복(袞服) 2본, 1781년(정조 5) 정조 익선관본(翼善冠本), 1791년(정조 15) 정조 원유관본(遠遊冠本) 제작에 동참한 것이 그것이다.
1788년(정조 12) 정조의 하명으로 이종현(李宗賢)과 함께 책가도(冊架圖)를 그려 제출했으나, 형편없다는 평과 함께 도화서에서 파면당하고 귀양갔다. 1789년(정조 13) 사도세자의 영우원(永祐園)을 수원 화산으로 옮기는 천봉도감청(遷奉都監廳)에 소속되었다. 1791년(정조 15) 정조 원유관본 어진 제작에 참여할 때 녹취재에 응한 차비대령화원이 모두 파면당했고, 같은 해 5월 5일에는 차비대령화원 중 그의 그림을 없애버리라고 한 기록도 남아 있다.
산수, 인물, 속화, 영모, 초충, 산수, 누각, 문방, 매죽 등 여러 분야를 두루 섭렵했다. 특히 어진도감에 3번 참여할 만큼 초상화를 잘 그렸다. 1774년(영조 52)에 그린 「이광사 초상(李匡師 肖像)」[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광사 초상」을 포함한 그의 작품은 현재 10점 미만으로 전해진다. 그중에서 「화조도(花鳥圖)」, 「쌍순도(雙鶉圖)」, 「우경산수도(雨景山水圖)」가 1788년(정조 12) 작이다. 풍속화로는 「자모육아도(慈母育兒圖)」가 남아 있어 신윤복이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여속도를 그렸음이 확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