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평 ()

이광사 초상/신한평
이광사 초상/신한평
회화
인물
조선 후기, 「이광사 초상」을 그린 도화서 화원.
이칭
일재(逸齋)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35년(영조 11)
사망 연도
1806년 이후
본관
고령(高靈)
주요 작품
이광사 초상, 화조도, 쌍순도, 우경산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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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신한평은 조선 후기 「이광사 초상」을 그린 도화서 화원이다. 조선 전기 문신 신말주의 10대손이자, 신윤복의 아버지이다. 1784년부터 1809년까지 26년간 차비대령화원으로 봉직하며 어용 화사에 3번 발탁되었다. 그러나 왕실 납품용 책가도를 잘못 그려 도화서에서 퇴출당했다. 산수, 인물, 속화, 영모, 초충, 산수, 누각, 문방, 매죽 등을 두루 섭렵했다. 대표작으로는 「이광사 초상」, 「화조도」, 「쌍순도」, 「우경산수도」 등이 있다.

정의
조선 후기, 「이광사 초상」을 그린 도화서 화원.
가계 및 인적사항

본관은 고령(高靈)이고, 호는 일재(逸齋)다. 조선 초기 문신 신말주(申末舟)의 10대손이다. 신말주의 8대손이자 종조부인 신세담(申世潭), 9대손이자 당숙인 신일흥(申日興), 11대손이자 아들인 신윤복(申潤福) 모두 화원이었다. 신윤복 외에 아들 신윤수(申潤壽)와 고명딸을 두었다.

주요 활동

1784년(정조 8)부터 1809년(순조 9)까지 26년간 차비대령화원으로 봉직했고, 4차례 사과(司果), 사정(司正)에 부록되었다. 특히 차비대령화원 신분으로 어진 제작에 3차례 참여했다. 1773년(영조 49) 영조의 곤복(袞服) 2본, 1781년(정조 5) 정조 익선관본(翼善冠本), 1791년(정조 15) 정조 원유관본(遠遊冠本) 제작에 동참한 것이 그것이다.

1788년(정조 12) 정조의 하명으로 이종현(李宗賢)과 함께 책가도(冊架圖)를 그려 제출했으나, 형편없다는 평과 함께 도화서에서 파면당하고 귀양갔다. 1789년(정조 13) 사도세자의 영우원(永祐園)을 수원 화산으로 옮기는 천봉도감청(遷奉都監廳)에 소속되었다. 1791년(정조 15) 정조 원유관본 어진 제작에 참여할 때 녹취재에 응한 차비대령화원이 모두 파면당했고, 같은 해 5월 5일에는 차비대령화원 중 그의 그림을 없애버리라고 한 기록도 남아 있다.

산수, 인물, 속화, 영모, 초충, 산수, 누각, 문방, 매죽 등 여러 분야를 두루 섭렵했다. 특히 어진도감에 3번 참여할 만큼 초상화를 잘 그렸다. 1774년(영조 52)에 그린 「이광사 초상(李匡師 肖像)」[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광사 초상」을 포함한 그의 작품은 현재 10점 미만으로 전해진다. 그중에서 「화조도(花鳥圖)」, 「쌍순도(雙鶉圖)」, 「우경산수도(雨景山水圖)」가 1788년(정조 12) 작이다. 풍속화로는 「자모육아도(慈母育兒圖)」가 남아 있어 신윤복이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여속도를 그렸음이 확인된다.

참고문헌

원전

『내각일기(內閣日記)』

단행본

『한국역대서화가사전 상』(국립문화재연구소, 2011)

논문

이원복, 「일재 신한평의 화경」(『동악미술사학』 1, 동악미술사학회, 2000)
관련 미디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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