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1774년 작. 사방건(四方巾)을 쓰고 흰 도포(道袍)를 입고서 두 손을 앞으로 모은 부좌상(趺坐像)인데, 옷자락 부분을 그리지 않고 무릎 부근에서 화면을 마쳐 흉상에 가깝게 되었다. 묘사기법은 18세기 후반에 제작된 연거복(燕居服) 초상화의 일반양식을 따랐다. 얼굴에는 그의 개성이 잘 나타나 있는데, 이광려(李匡呂)가 쓴 「원교선생묘지명(圓嶠先生墓誌銘)」에 “몸과 얼굴이 두텁고 크니 쳐다보면 천연스럽고 귀중(貴重)하며··· 또 음량(飮量)이 크고 목소리가 우렁찼다”는 구절이 이해된다. 사방건의 묘사도 치밀하고 옷주름의 표현도 자세하지만, 사방건 속의 머리 부분이 얼굴에 비해 작아 비례감이 떨어지고 옷주름 사이의 음영이 강해 다소 번잡해 보인다. 화면 오른쪽에 있는 필자미상의 제(題)에 의하면, 이 초상은 부령(富寧)에서 신지도(薪智島)로 이적(移謫)해 온 이광사의 70세 초상으로 갑오년(영조 50) 겨울, 화사(畵師) 신한평이 그린 것으로 되어 있다. 신한평은 1773년 영조의 어진(御眞)을 모사할 때 수종화사(隨從畵師)로 참여했던 공로로 신지도 만호(萬戶)에 제수되었는데, 그 일로 신지도에 잠시 들렀다가 귀양살이하던 이광사의 초상을 그리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 때 신한평은 이광사의 신지도 친우 황치곤(黃致坤)의 초상도 그렸다. 귀양살이하는 사람의 초상으로는 드문 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