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여통(汝通), 호는 송석(松石). 전라도 무장(戊長)에서 출생하였고, 1864년에 이응록(李膺祿)으로, 이어 1871년에 이택균(李宅均)으로 이름을 두 번 개명하였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 화원 가문 출신으로, 증조부 이성린(李聖麟), 조부 이종현(李宗賢), 부친 이윤민(李潤民), 숙부 이수민(李壽民) · 이순민(李淳民) 등 일가가 모두 화원이었고, 그의 아들 세 명도 모두 화원이었다. 벼슬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1877년과 1883년에 화사 군관(畵師軍官)으로 지방에 파견되어 근무하였다.
이형록(李亨祿)은 도화서 화원으로서 1827년부터 1863년까지 다수의 궁중 행사에 동원되어 도화(圖畫) 업무를 담당하였다. 1827년의 존호도감〔純祖純元王后上號都監〕, 1830년 효명세자 예장도감(孝明世子葬禮都監), 1834년 창경궁 영건도감(昌慶宮營建都監), 1835년 순조 국장도감(純祖國葬都監), 1843년 효현왕후 빈전혼전도감(孝顯王后殯殿魂殿都監), 1855년 익종 수릉 천봉도감(翼宗綏陵遷奉都監), 1863년 수빈 휘경원 천봉도감(綏嬪徽慶園遷奉都監) 등에 차출되어 일하였다.
어진 화사로 1852년과 1861년의 철종 어진 도사에 참여하였다. 또한 1833년부터 1863년까지 30년 동안 규장각 차비대령화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녹취재에서 성적이 가장 우수한 사람에게 주는 사과(司果) · 사정(司正)에 여러 차례 부록(付祿)되어 회화적 기량을 인정받았다.
이형록은 조부 이종현과 부친 이윤민에 이어 3대째 책가도로 이름을 날렸다. 이형록은 서양식 투시도법을 적용시켜 입체감이 살아 있는 책가(선반)에 서책과 문방구 · 기명 · 화훼 등을 진열한 책가도를 잘 그렸고, 이 외에 책장 없이 서책과 기물을 화면에 분산 배치한 새로운 형식의 책거리 그림도 그렸다.
현존하는 이형록의 작품은, 책가도에 이형록, 이응록, 이택균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인장이 있어 그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형록의 인장이 남은 것으로는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의 「책가도」 8폭 병풍(1863년 이전)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책가도」 8폭 병풍(1863년 이전)이 있으며, 이응록의 인장이 남은 것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책가도」 10폭 병풍(18641871)이 있다. 이택균의 인장이 남은 것으로는 통도사성보박물관 소장의 18641871년 10폭 병풍(1871년 이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