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화합벽 ()

회화
개념
그림과 글씨가 서로 대등하게 배치된 서화첩 혹은 두루마리 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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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그림과 글씨가 서로 대등하게 배치된 서화첩 혹은 두루마리 족자.
개설

글씨와 그림이 짝을 이루어 마치 반쪽짜리 구슬이 하나로 합쳐지듯 온전한 하나를 이루었다는 뜻이다. 합벽(合璧)은 ‘둥근 옥을 합치다’의 뜻으로서 ‘아름다운 것 둘을 합침’ 혹은 ‘두 개의 반쪽짜리 구슬을 하나로 합침’을 말한다. 여기서 ‘벽(璧)’은 ‘둥근 고리 모양(環狀)의 옥’을 뜻하지만, 후세에 널리 옥의 통칭으로 쓰였으며, 또 ‘아름다운 사물’을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합벽’이라는 표현은 『한서(漢書)』,「율력지(律歷志)」에도 보이는데, “해와 달은 마치 옥을 합친 것 같고 오성(五星)은 꿰어 놓은 구슬(連珠)과 같네(日月如合璧 五星如連珠)”라고 하여 절후가 잘 맞아서 조금도 어긋남이 없이 조화를 잘 이루었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서화합벽은 서예 작품과 그 내용에 상응하는 회화 작품이 어우러져 더할 수 없이 좋은 상태 혹은 그런 작품을 말한다.

연원

서화합벽의 형식이 성립하게 된 것은 문학과 서예, 그리고 회화의 밀접한 관련성에서 기인한 것이다. “마힐(왕유)의 시를 음미해 보면 시 속에 그림이 있고, 마힐의 그림을 관찰해 보면 그림 속에 시가 있다(味摩詰之詩 詩中有畫 觀摩詰之畫 畫中有詩)”라며 문학과 그림이 상호 보완의 관계 속에서 시흥(詩興)과 화취(畵趣)를 돋우는 효과에 주목하였던 북송(北宋) 시대의 소식(蘇軾)은 문인화론을 내세우며 시서(詩書)와 더불어 화(畵)를 문인 문화의 한 축으로 편입시켰다. 이에 따라 시·서·화 삼절은 문인들이 지향한 이상적 문인상이 되었고, 시·서·화가 어우러진 작품의 제작도 활발하였다.

남송대에 당시(唐詩)의 유행과 더불어 시 구절과 시의도(詩意圖)를 화첩에 나란히 배치하거나, 부채의 앞뒷면에 각각 배치하여 그림과 시서(詩書)를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이 성행하였는데, 이는 서화합벽의 예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서·화가 짝을 이루어 작품이 제작되고 감상된 것은 중국에서 오랜 전통이었지만, ‘합벽’이 서화에 관련된 용어로 사용된 것은 청대(淸代)에 간행된 『석거보급(石渠寶笈)』과 『어제시집(御製詩集)』 등에 실린 서화작품 목록에서 비롯되었다. 1744년에 간행된 『석거보급』의 목차에는 서책(書冊)·서축(書軸)·서권(書卷)·화책(畵冊)·화축(畵軸)·화권(畵卷) 등과 더불어 서화합벽책(書畵合璧冊)·서화합벽권(書畵合璧卷)·서화합벽축(書畵合璧軸) 등이 따로 분류되어 있어서 당시 서화합벽이 하나의 독립된 형식으로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이들 분류에 포함된 작품은 주로 문징명(文徵明)·동기창(董其昌) 등 명대(明代) 오파(吳派)의 작품인 점이 주목되며, 「동기창 서화합벽책(董其昌書畫合璧冊)」, 「당인·왕총 서화합벽권(唐寅王寵書畫合璧卷)」, 「심주·문징명 서화합벽권(沈周文徴明書畫合璧巻)」 등이 언급되었다. 문징명을 비롯한 오파의 여러 화가들이 고전적 명시문(名詩文)을 회화 주제로 적극 다루었으며, 이 때 원문을 필사한 서폭(書幅)을 그림과 함께 배치하여 서와 화가 짝을 이루도록 한 제작 형식이 크게 유행하였는데, 이러한 작품을 지칭한 것이었다. 즉, 서화합벽의 작화 형식은 명대 오파에서 비롯되어 청대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석거보급』 범례에 ‘서화합벽은 화가와 서가의 공력이 모두 대등하여 쌍미(雙美)를 이룬 작품’이라는 설명이 있고, 서·화의 연대가 크게 다르거나 비중이 다를 경우는 포함되지 않았음 또한 언급되었다. 이 때 글씨를 쓴 사람과 그림을 그린 사람은 각각 명서가(名書家)와 명화가(名畵家)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한 사람이 그림과 글씨를 모두 담당한 경우도 있다. 서화합벽의 제작은 청대에 더욱 활발해져서 금농(金農)과 나빙(羅聘)의 『사제합벽첩(師弟合璧帖)』을 비롯한 다양한 서화합벽이 제작되었다.

내용

우리나라에서 ‘서화합벽’의 용어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조선후기 신위(申緯, 1769∼1845)의 『경수당전고(警修堂全藁)』에서이다. 1772년 6월 신위는 동기창의 『서화합벽첩』을 빌려 자신은 글씨를 그의 아들은 그림을 임모하였다는 내용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서화합벽’의 용어가 사용되기 훨씬 이전부터 서화합벽의 작품 제작은 이루어졌음을 문헌기록과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다.

서화합벽첩의 구체적인 사례를 조선 초기의 기록에서도 살필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나만갑(羅萬甲, 1592-1642)이 소장하고 있던 석경(石敬)의 화첩을 예로 들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석경의 그림 10폭은 "까만 바탕에 황백(黃白)의 금가루를 써서 붓질을 한 것이었고, 좌측에 각각 시를 첨부하였는데, 그 시들이 모두 한 시대를 울린 명가(名家)의 작품이었다"라고 언급되어 조선 초기 대표적 화가 중의 하나였던 석경의 그림과 여러 문인들의 시문(詩文)이 어우러진 서화합벽첩(書畵合璧帖)이었음을 알 수 있다.

17세기 중엽부터 중국 오파(吳派)의 작품들이 조선에 전래되면서 서화합벽은 하나의 작품 경향으로 본격적으로 자리잡았다고 할 수 있다. 신익성(申翊聖)이 심양에서 구해 온 「상림부도(上林賦圖)」는 구영(仇英)의 그림과 문징명의 글씨가 짝인 된 서화합벽축이었고, 문징명이 그림과 글씨를 모두 제작한 「귀거래사도」 또한 서화합벽축이었다. 1606년에 명의 사신으로 내조한 주지번(朱之蕃)이 가지고 온 『천고최성첩(千古最盛帖)』은 명시문(名詩文)을 쓴 주지번의 서예작품 20점과 이에 상응하는 그림이 짝을 이룬 서화합벽첩이었다. 또한 『당시화보(唐詩畵譜)』, 『시여화보(詩餘畵譜)』와 같이 명시를 수록하고 이에 상응하는 시의도 판화를 삽화 형식으로 삽입하되 시와 화가 대등한 비중을 차지하는 형식의 시화집 성격의 판본이 조선에 전래되어 서화합벽첩의 유행을 자극했다고 여겨진다.

현존하는 조선후기 서화합벽첩의 예로 당대(唐代) 사공도(司空圖)의 시를 해서·행서·전서·예서 등 각체로 쓴 이광사(李匡師)의 서예와 이에 상응하는 정선의 시의도가 짝을 이룬 서화합벽첩인 『사공도시품첩(司空圖詩品帖)』을 들 수 있다. 조선후기 대표적 서가(書家)와 화가(畵家)의 서·화가 대등하게 배치되어 서화사적 의의가 큰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또 『표옹선생서화첩』은 강세황의 글씨와 그림이 짝을 이룬 서화합벽첩으로서 여기에는 동기창의 서화합벽첩을 임모한 작품도 포함되어 있어 명말 서화합벽첩과의 관련성을 시사해준다.

조선말기에는 청의 영향으로 서화합벽의 제작이 보다 다채로워졌는데, 김정희(金正喜)와 권돈인(權敦仁)의 「산수도」(일본 고려미술관)의 경우 김정희의 글씨와 권돈인의 그림이 짝을 이루어 ‘합벽’을 이루었음을 김정희가 제발에서 밝혔다. 시사(詩社)가 성행하고 서화가들의 모임이 활발해진 일제 강점기에는 ‘합작’과 ‘합벽’이 혼용되어 사용되기도 하였고 둘의 구분이 모호한 경우도 많아졌다.

의의와 평가

아름다움을 나란히 뽐낼 수 있는 명가(名家)의 서화가 서로 짝을 이룬 서화합벽은 시·서·화 삼절을 이상으로 삼아 예술적 성취로 전개된 서예와 회화의 상호 조화와 각각의 정수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서화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경수당전고(警修堂全藁)』
『택당집(澤堂集)』
『석거보급(石渠寶笈)』
「일제강점기 시사활동과 서화합벽도 연구―산벽시사 서화합벽도를 중심으로」(김예진, 『미술사학연구』제268호, 2010)
「중국시문을 주제로 한 조선 후기 서화합벽첩 연구」(유미나, 동국대학교대학원 미술사학과 박사학위 논문,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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