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경산수화 ()

평양도
평양도
회화
개념
고려와 조선시대에 우리나라 자연경관과 명승지를 소재로 그린 산수화. 실경화 · 실경도.
이칭
이칭
실경화, 실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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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실경산수화는 고려와 조선 시대에 우리나라 자연경관과 명승지를 소재로 그린 산수화이다. 주로 실용적 목적에 따라 제작되었다. 고려 시대에 제작된 전공지의 「제주도」, 이녕의 「예성강도」 등이 높이 평가받는다. 실경의 전통은 조선 초로 이어져 명승·명소, 처소나 별장 주위의 경치를 그렸다. 명승·명소를 그린 산수화 중 「금강산도」는 중국 황실과 사신들의 선물용으로 빈번하게 제작되었다. 실경산수화는 조선 후기 완성된 진경산수화 발달의 토대가 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작품으로는 이신흠의 「사천장팔경도」, 조세걸의 「곡운구곡도첩」 등이 있다.

정의
고려와 조선시대에 우리나라 자연경관과 명승지를 소재로 그린 산수화. 실경화 · 실경도.
연원 및 변천

‘실경화(實景畵)’라고도 칭하며, 주로 실용적 목적에 따라 제작되었다. 그리고 조선 후기 특유의 시대적 배경과 화풍에 의해 완성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 발달의 토대가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1007년(목종 10)에 제작된 전공지(田拱之)의 「제주도」, 「서산도(瑞山圖)」를 비롯해 북송(北宋) 화단에서도 높이 평가하였던 이녕(李寧)「예성강도(禮成江圖)」「천수사남문도(天壽寺南門圖)」, 그리고 작자미상의 「진양산수도(晋陽山水圖)」, 「송도팔경도(松都八景圖)」, 「금강산도」 등이 그려졌다.

내용

이러한 전통이 조선 초기로 이어져 새 왕조의 기상과 위용을 드높이려는 의식과 사대부들의 ‘승경낙도(勝景樂道)’하는 풍조가 밀착되며 더욱 확산되었다. 이 시기를 통하여 소재도 다양해져서 명승명소(名勝名所)와 별서유거(別墅幽居), 야외아집(野外雅集) 등의 유형이 성립되며 전개되었다.

명승명소를 소재로 한 그림은 중국 황실과 사신들의 선물 등으로 빈번하게 제작된 「금강산도(金剛山圖)」가 주종을 이루었다. 그리고 새로운 도읍지 한양 주변의 명소들을 비롯해 지방관들이 부임지 근처에서 특별히 선정한 경치들과 탐승하였던 명산대천의 절경들이 많이 그려졌다.

대표작으로는 「신도팔경도(新都八景圖)」, 「양화도사시도(楊花渡四時圖)」, 「삼각산도」, 「장의사도(藏義寺圖)」, 「신륵강산도(神勒江山圖)」, 「관동도(關東圖)」, 「이호십육경도(梨湖十六景圖)」, 「동계팔경도(東溪八景圖)」, 「함흥십경도(咸興十景圖)」, 「북관십경도(北關十景圖)」, 「서경산천누관도(西京山川樓觀圖)」, 「평양도(平壤圖)」, 「성천도(成川圖)」, 「박연폭포도(朴淵瀑布圖)」, 「발암폭포도」, 「금천완월도(錦川翫月圖)」, 「임강완월도(臨江翫月圖)」, 「지리산청학동도」, 「두류산도(頭流山圖)」 등이 있다.

별서유거 그림은 왕유(王維)의 「망천도(輞川圖)」와 주자(朱子)의 유거지를 그린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 등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사대부들이 자연을 벗삼아 전원생활을 즐기고 인격을 찬양하던 처소나 별장 주위의 실경들을 선양하기 위하여 그린 것이다. 그리고 후손과 후학들에 의해 정신적 고향으로 추앙되어 제작되기도 하였다.

문헌기록으로 확인되는 화제로 「남원별서도(南原別墅圖)」, 「향산향의별서도」, 「이감사별서도」, 「하전원도(河田園圖)」, 「저자도도(楮子島圖)」, 「화석정도(花石亭圖)」, 「사가정도(四佳亭圖)」, 「정진도(鼎津圖)」, 「매계도(梅溪圖)」, 「도산도(陶山圖)」, 「사계정사도(沙溪精舍圖)」, 「고산구곡도(高山九曲圖)」, 「곡운구곡도(谷雲九曲圖)」 등이 있다. 조선 중기에 이르러 중인층 위항문인(委巷文人)들에까지 파급되면서 이징(李澄)에 의해 유희경(劉希慶)의 임장(林莊)과 침류대(枕流臺)의 경관이 그려지기도 하였다.

야외아집 그림은 사대부들이 동료들과 함께 경치 좋은 장소에 모여 시와 술을 즐기며 친목을 도모하던 광경을 그림으로 기록하여 두고두고 길이 새기기 위하여 제작되었다. 실경 풍속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야외계회도가 주를 이루었으며, 이 밖에 「한강유람도(漢江遊覽圖)」, 「기성평수도(箕城萍水圖)」, 「웅연범주도(熊淵泛舟圖)」, 「사천장팔경도(斜川莊八景圖)」 등이 그려졌다. 또한 조선 중기부터는 「백록추량도(白麓追凉圖)」, 「삼청동상송도(三淸洞賞松圖)」와 같은 위항문인들의 아집 장면을 그린 사례도 등장했다.

실경산수화를 그린 화가는 이녕, 최경(崔涇), 배련(裵連), 안귀생(安貴生), 이신흠(李信欽), 이징, 한시각(韓時覺), 조세걸(曺世傑) 등 대부분이 화원(畵員)이었다. 조선 중기부터 김시(金禔), 이경윤(李慶胤), 조속(趙涑)과 같은 문인화가들에 의하여 조금씩 다루어지기 시작하였다.

화풍은 현재 전하는 작품이 매우 드물어 구체적으로 확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기록적이고 기념적인 제작 의도를 구현하기 위한 화면 구성과 동시에 정형산수 화풍의 영향을 수용하며 전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7세기 후반경에 이르러 점차 사상 등이 가미되고 남종화법(南宗畵法)의 영향이 확산되면서 조선 후기를 통하여 크게 꽃피는 진경산수화풍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현황

현재 남아 있는 작품으로는 작자미상의 「관서명구첩(關西名區帖)」(개인 소장), 이신흠의 「사천장팔경도」(개인 소장), 조세걸의 「곡운구곡도첩」(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한시각의 「북관수창록」(개인 소장), 작자미상의 「함흥십경도」 등이 있다.

참고문헌

『한국회화사』(안휘준, 일지사, 1980)
「조선시대 관서관북 실경산수화 연구」(박정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1)
「조선시대 별서도 연구」(조규희, 서울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6)
「조선중기 실경산수화 연구」(김현지, 홍익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1)
「남구만제함흥십경도」(홍선표, 『미술사연구』2, 미술사연구회, 1988)
「한시각의 북새선은도와 배관실경도」(이태호, 『정신문화연구』34,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
「고려시대의 일반회화」(홍선표, 『한국미술사』, 예술원, 1984)
「조선왕조실록소재회화관계기록의 성격」(안휘준, 『조선왕조실록의 서화사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3)
「겸재진경산수화고」(최완수, 『간송문화』21, 한국민족미술연구소, 1981)
「구곡도의 발생과 기능에 대하여」(유준영, 『고고미술』151, 한국미술사학회,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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