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때 아버지가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옥사하였으나, 1632년 인조반정 성공으로 집안의 명예를 회복하였다. 하지만 조속은 훈록(勳祿)을 사양하고 호구지책의 벼슬만 하며 입신양명은 멀리하였다. 청백리로 유명하였으며, 가난에도 불구하고 고금의 명화와 명필을 수집하고 감상하는 것을 즐겼다.
같은 시기에 활동한 문신 이후원(李厚源)은 조속의 서화에 대해 “단청은 조화를 얻었고 학식은 천인을 꿰뚫었다. 필법은 극진함을 다하여 휘두르는 붓은 신(神)과 같다.”라고 상찬하였다. 그는 은일적 삶을 그대로 반영한 간일한 구도의 수묵사의화조화(水墨寫意花鳥畵)와 묵매화 및 산수인물화 분야에서 독자적 양식을 완성하였다. 일례로, 까치가 매화 가지에 앉아 있는 장면을 포착한 「고매서작도(古梅瑞鵲圖)」[간송미술관 소장]는 힘이 넘치는 비백(飛白)의 필력과 까치의 균형 잡힌 자태에서 높은 격조를 보여준다.
또한 이유원(李裕元)이 『임하필기(林下筆記)』 권30 「아조화종(我朝畵宗)」에서 “조선의 화법에 대해 말하자면 안견, 이경윤, 김시, 이정, 조속이 산수를 잘 그렸고, 최경과 김명욱은 인물을 잘 그렸고, 조지운과 이영윤은 영모를 잘 그렸고, 어몽룡은 매화를 잘 그렸다.”라고 한 내용은 조속의 산수화가 남다른 경지에 올랐음을 시사해 준다.
그가 그린 청록산수의 「금궤도(金櫃圖)」는 신라의 김씨 시조인 김알지(金閼智) 설화를 그린 것으로, 인조 정권의 정통성을 지지하는 정치적 의도를 지녔던 것으로 해석된다. 또 「호촌연응도(湖村煙疑圖)」[간송미술관 소장]는 『고씨화보(高氏畵譜)』[1603]에 실린 고극공(高克恭) 작품을 방(倣)한 것으로, 그가 남종문인화풍의 수용에 있어 선구자적 위치에 있었음을 알려준다. 『영사첩(永思帖)』[개인 소장]의 「고군산도도(古羣山島圖)」는 미완이지만, 금강산을 유람하며 실경을 그린 것이다. 진경산수화의 초기 작례로서 주목된다. 산수화 방면에서 청록산수화풍, 안견파 화풍, 절파 주1, 남종문인화풍, 실경사생풍 등의 다양한 화풍을 구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속과 조지운의 작품이 각각 12점, 4점이 실린 『창강유묵(滄江遺墨)』이 현전한다. 신라 비석을 비롯하여 안평대군, 한호 등의 진적(眞蹟)과 금석문(金石文)을 엮은 『금석청완(金石淸玩)』은 금석학의 선구자적 면모를 보여준다. 그 외 저서로 『창강일기(滄江日記)』가 있다. 사후 이조참판으로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