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림부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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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2월 25일 육군본부 정보국 산하에 창설되어 대북 침투 공작을 담당했던 특수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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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49년 2월 25일 육군본부 정보국 산하에 창설되어 대북 침투 공작을 담당했던 특수부대.
내용

1949년 2월 25일 서북 출신 367명을 기간으로 육군본부 정보국 특무과장 한왕룡 소령이 부대장을 맡아 출범한 육군본부 정보국 산하 특수부대이다. 이들은 경기도 수원 수색학교에서 훈련을 받은 뒤 2월 26일부터 한왕룡 소령 지휘 하에 경상남도 거제와 경상북도 등지에서 빨치산 토벌작전에 참가했다. 5월 25일 서울로 귀환해 사열식을 전개했고, 이범석 국무총리는 이들이 국방부 제2국 소속 호림부대이며 단원은 557명이라고 하였다.

이 부대의 설치 목적은 “적의 일선 배치 병력을 분산케 하기 위하여 아측도 무장유격대를 적의 후방 깊숙이 침투시켜 적의 병력을 분산 시키는 길이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1949년 6월 20일부터 강원도 횡성에서 대대 편성을 하여 백의곤과 김의주를 각각 제5대대장, 제6대대장으로 하는 2개 대대가 편성됐다. 부대원들에게는 일본군 99식 장총, 탄환 120발, 미군 수류탄 3개가 지급되고 북한 보안대 복장으로 위장했고, 이외에도 경기관총, 지뢰 폭탄, 다이나마이트, 독약, 전선절단기, 북조선은행권 50만원, 사진기 등의 장비가 지급됐다.

호림부대는 1949년 6월 28일 강원도 양양군 서면 진동리 오색리지구로 침투했고, 5대대는 양양군 강현면과 속초면, 6대대는 인제군 북면 서화면으로 침투했다. 이들은 주요 시설(공장, 기업소, 교통선) 파괴, 기관 습격, 주요 인물 살인, 방화, 군사기밀 탐지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호림부대의 침투에 따라 1949년 북한 강원도 인제군은 초비상상태에 들어갔다.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호림부대원 106명은 사살되고, 44명이 포로가 됐다. 이들에 대한 재판은 모란봉극장에서 공개로 진행되어 사형이 선고됐다.

귀환한 호림부대원들은 1949년 7월 12일 육군 호국군에 편입됐는데, 현역 편입을 원치 않는 대원들은 제대하고 나머지는 같은 해 11월 13일 현역에 편입됐다. 이후 그 명칭이 육군본부 영등포학원으로 개칭되고, 부대장은 홍성준 소령이 부임했다. 이후 1949년 9월 15일 빨치산 토벌을 위해 지리산으로 출동, 제3사단에 배속되어 보현산, 팔공산 등지의 빨치산 토벌에 참가했다.

1950년 8월 18일 영등포학원이 해체되자, 대원들은 제3사단에서 팔공산지구, 영덕-강구 방어작전 등에 참가했다. 대대장을 비롯한 간부들이 수도사단으로 전속되고, 대대본부 요원들은 제3사단 수색중대로 배치됐으며 부대원들은 제23연대 제 1, 5, 9, 11중대에 배치됐다.

참고문헌

『한국전쟁』(정병준, 돌베개, 2006)
『6·25전쟁사』1(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4)
『한국전쟁의 유격전사』(조성훈,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3)
『국방사』1(국방부, 1984)
집필자
노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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