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국민복지연구회는 1971년의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김종필을 후계자로 추대하려고 김종필계가 만든 모임이었다. 회장에 김용태, 부회장 최영두, 사무총장 송상남 등이며, 시도책임자는 이원만, 예춘호, 신윤창, 이승춘, 오원선, 박종태 등으로 구성됐다. 김용태 회장 명의로 배포된 취지서는 “위대한 사회건설이 꿈일 수 만은 없다. 이제는 악이 구축되고 정의가 승리하며 법이 시행되는 평화로운 사회가 건설되어야 한다. 민족의 오늘과 내일은 젊은 지도층의 어깨에 달려있다”고 했다.
반김종필계는 이 조직이 삼선개헌을 저지하고 김종필을 후계자로 옹립하려는 조직인 것으로 청와대에 보고했고, 이 사실을 보고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을 불러 조사를 지시하며 김종필계의 ‘불충을 엄단’하도록 일렀다. 중앙정보부는 김용태, 최영두 등을 연행 심문했다. 그리하여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이 조직이 김종필의 대통령 옹립과 관련한 정치조직이며, ‘시국판단서’라는 문건을 작성한 것으로 보고했다.
‘시국판단서’에는 ‘복지회는 여당 내 야당’으로 67년의 선거부정은 박대통령의 책임이며, “박대통령의 삼선개헌을 저지하기 위해 저지세력을 확보해야 하고, 박대통령이 더 이상 정치에 야심을 갖지 못하도록 모든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71년 선거에 있어서 우리들의 대안은 오직 김종필 당의장이다.… 71년을 ‘김종필의 해’로 만들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1968년 5월 24일 민주공화당은 긴급 당기위원회를 소집, 김용태(金龍泰), 최영두(崔永斗), 송상남(宋相南) 등을 해당행위자로 제명하고, 다음날 의원총회에서도 제명을 결의했다. 5월 30일 민주공화당 의장 김종필은 모든 공직의 사퇴와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탈당계를 제출했다. 김종필은 6월 5일 당의장직에서 물러났으며, 6월 7일에는 의원직을 상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