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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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인물
해방 이후 육군헌병총사령부 부사령관, 경남지구 계엄사령관 등을 역임한 군인. 경찰.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22년
사망 연도
1964년
출생지
대구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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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해방 이후 육군헌병총사령부 부사령관, 경남지구 계엄사령관 등을 역임한 군인. 경찰.
내용

1922년 경상북도 대구에서 출생하였다. 대구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지원병으로 근무하였다. 1946년 1월 15일 남조선 국방경비대가 창설되었을 때 제1연대에 사병으로 입대해 하사관으로 근무하였다. 이후 조선경비사관학교( 육군사관학교의 전신) 제1기로 입교하여 1946년 6월 15일 소위로 임관하였다. 1948년 10월 19일 여순사건 발생 당시 제5연대와 1949년 국군 제3사단 22연대를 이끌었다. 한국전쟁 직후 육군헌병총사령부 부사령관에 임명되었고, 경남지구 계엄사령관, 부산지구방위사령관 등을 역임하였다.

1951년 2월 9일부터 11일까지 국군 제11사단(사단장: 최덕신 준장) 9연대(오익경 대령) 30대대(대대장: 한동석 소령) 병력이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 일대에서 비무장 민간인 719명을 학살한 ‘거창민간인학살사건’( 거창사건)이 발생하였다. 3월 29일 국회에서 거창 출신 국회의원 신중목에 의해 사건의 진상이 폭로되었고, 3월 30일 국회와 내무 · 법무 · 국방부의 합동조사단이 구성되었다. 4월 7일 합동진상조사단은 신원면으로 오던 도중, 경남지구 계엄민사부장 김종원 대령이 9연대 정보 참모 최영두 소령에게 부하들을 공비로 위장 매복시켜 합동조사단에 공포를 쏘아 현장 접근을 방해하도록 지시하고 실행하였음을 밝혀냈고, 결국 김종원은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대통령 특사로 석방된 뒤 군에 복직과 동시에 불명예 파면 뒤 경찰로 이직하였다.

1952년 7월 전북경찰국장을 시작으로, 서남지구전투사령관, 경남경찰국장, 경북경찰국장, 전남경찰국장 등을 거친 뒤 경찰 총수인 치안국장 등을 역임하였다. 치안국장 재직 시절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1956년 9월 28일 발생)의 배후로 밝혀져 파면된 뒤 구속되었다. 재판에서 법정모독죄가 추가되는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징역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던 도중 1961년 12월 당뇨병으로 병보석 석방된 뒤 1964년 1월 30일 병이 악화되어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거창양민학살사건자료집』1 (한인섭, 서울대학교 법학연구소, 2003)
『조봉암과 1950년대』하 (서중석, 역사비평사, 2000)
『전쟁과 사회: 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김동춘, 돌베개, 2000)
집필자
노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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