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11월 8일 신민당 원내총무 김영삼은 1971년 대통령선거에 나설 신민당후보지명에 출마할 것을 선언했다. 이날 오전 서울 외교구락부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김영삼은 “박정권의 불법적이고 강압적인 삼선개헌 강행 이후 오늘의 내외정세를 냉정히 분석하고 수많은 당내외 동지들의 의견들을 종합한 끝에 71년선거에 신민당이 내세울 대통령 후보에 출마하기로 했다”고 선언했다.
당시 김영삼은 ‘40대기수론’의 근거로 “첫째, 5·16군사쿠데타로 등장한 현 집권세력, 다시 말해서 71년 총선거에서 싸울 상대세력이 야당의 평균 연령보다 훨씬 젊다는 사실이다. 둘째, 해방 후 25년간의 야당의 법통을 이어온 오늘의 야당은 국민적인 지지를 받은 훌륭한 지도자를 내세워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려 했으나, 그 지도자들의 노쇠에서 온 신체상의 장애로 두 차례나 평화적 정권교체라는 민족적 과업을 일보직전에 좌절하고만 쓰라린 역사를 지니고 있다”며 정권교체를 위해 젊은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뒤이어 김대중과 외부에서 영입된 이철승 등이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에 출마함으로써 ‘40대기수론’은 더욱 설득력을 얻게 되었다. 신민당 유진산 총재는 ‘40대기수론(40대후보론)’을 가리켜 “정치적 미성년(政治的 未成年)”이나 “구상유취(口尙乳臭: ‘입에서 아직 젖 비린내가 난다’는 뜻으로 아직 어리다는 의미)”라며 견제하였으나 대세가 되어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에는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이 후보로 출마하였다.
‘40대기수론’이 과열되자 유진산 총재는 자신에게 후보지명권을 요구했으나 김대중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하고, 9월 28일 신민당 중앙상임위원회 회의에서 유진산은 김영삼 후보의 지지를 호소하였다. 1970년 9월 29일 오전 1차 투표에서 과반수 득표자가 없어, 오후에 치러진 2차 투표에서 김대중이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