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청학련사건 이후 활발해진 반유신 민주화운동을 결집하기 위해 1974년 11월 27일 이병린, 함석헌, 천관우, 김홍일, 강원룡, 이희승, 이태영의 7인 위원회를 중심으로 재야인사 71명이 참여한 가운데 ‘민주회복국민회의’를 발족시키고, 「민주회복 국민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문은 “현행 헌법은 최단시일 안에 합리적 절차를 거쳐 민주헌법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며 “반정부 행동으로 말미암아 복역·구속·연금 등을 당하고 있는 모든 인사들을 사면석방”할 것 등을 요구했다.
이어 1974년 12월 25일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윤보선·백낙준·이인·정구영·이희승·김홍일·유진오·김재준·김수환·이정규·윤제술·정일형·강신명·정화암·정석해·진헌식·홍익표·김대중 등을 고문으로, 윤형중(상임대표), 함석헌, 이병린, 강원룡, 천관우, 김정한, 이태영, 김영삼, 양일동, 김철 등을 대표위원으로 선임하고, 홍성우·함세웅(대변인)·한승헌·김병걸·김정례 등을 운영위원으로 선임하였다. 그 외 지속적 활동을 위해 사무국을 설치하고, 1975년 3월 초까지 7개 시도지부와 20개 시군지부를 결성했다. 국민회의의 결성에는 재야 인사들이 중심이 되었던 민주수호협의회가 큰 역할을 했으나 김영삼·양일동 등 야당 총재들이 참여함에 따라 재야와 야당이 함께하는 반유신운동단체로의 성격을 보였다.
국민회의가 전국으로 확대되어 가고 반유신 민주화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자 정부는 이 조직을 강력하게 탄압했다. 국민선언에 참여한 국립대학의 교수들은 곧바로 대학에서 추방되었다. 1974년 11월 27일 서울대 백낙청 교수가 파면되고, 경기공전의 김병걸 교수가 권고사직 되었다. 사립대학 소속의 안병무·문동환·박봉랑·서남동 교수 등에게도 경고가 내려졌다. 1975년 1월 17일 국민회의 대표위원 이병린 변호사가 간통 혐의로, 3월 22일에는 운영위원 한승헌 변호사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고, 10월 21일 김윤식과 계훈제는 긴급조치 위반혐의로 구속되었다. 이외에도 생업에 대한 불이익이나 경찰과 수사기관이 국민회의 지부 관계자들을 미행하고, 불법 연행하거나 집을 수색하는 사례가 발생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