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 이후 국방부는 후방에 흩어져 있던 인민군 병력과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국군 제11사단을 창설했고 육군본부 작전명령에 따라 제9연대와 제13연대 · 제20연대를 예하부대로 두었다. 제11사단은 1950년 10월 4일부터 1951년 3월 30일까지 경상남도 일부와 전라남도 ·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전역에서 작전을 벌였다. 거창사건은 토벌작전의 제4기에 해당하는 1951년 2월 1일부터 3월 31일 사이에 발생한 것이다.
6·25전쟁 발발 이후 유엔군이 참전해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반격을 개시하자 인민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거창군 신원면은 국군의 서울 탈환 이후 1개월이 지나서야 행정이 회복되기 시작했고, 거창경찰서는 1950년 9월 27일 수복되었지만 신원지서는 11월 5일이 되어서야 경찰이 복귀했다. 사건이 발생할 당시는 중국인민지원군이 전쟁에 개입해 정부가 1·4후퇴를 한 후 국군과 유엔군의 전면적 반격이 이뤄지고 있었다. 그리고 거창군 신원면 일대는 국군과 경찰이 이 지역을 수복하기 위해 토벌작전을 전개할 무렵이었다.
제11사단의 토벌작전 개념은 견벽청야(堅壁淸野)인데, 이는 최덕신(崔德新) 사단장이 제시한 것이었다. 이 작전은 군이 꼭 지켜야 할 전략거점을 점령한 후 군 보급로를 확보하는 데 역점을 두고, 인민군이나 빨치산이 주민들로부터 식량을 확보하거나 인력과 물건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산간벽촌의 물자를 옮기고 가옥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제9연대장 오익경(吳益慶)으로부터 사단의 작전개념을 구체화한 작전명령 제5호를 지시받은 3대대장 한동석(韓東錫)은 1951년 2월 5일 작전에 들어가 신원면 일대로 진격했다. 3대대는 별다른 저항없이 신원면을 수복한 후 인근 지역인 함양군과 산청군 경계로 전진했는데, 2월 8일 신원지서가 빨치산의 공격을 받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3대대는 연대장의 명령을 받고 다시 신원면으로 들어와 2월 9일 청연마을에서부터 주민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2월 10일 대대는 덕산리 내동에서 밤을 보내고 아침 일찍 과정리 면소재지로 이동해 대현리 · 와룡리 · 중유리 마을에서 가옥에 불을 질러 태우고 가축과 양식을 강탈했으며 주민들을 과정리로 몰아가던 중 날이 저물자 주민 100여 명을 탄량골 하천 계곡에서 학살했다. 군인들은 2월 11일 와룡리 · 대현리 · 중유리 일대 마을 주민 1,000여 명을 신원국민학교에 모두 모이게 한 후 이 가운데 군인과 경찰 · 공무원 가족을 돌려보내고 다음날 517명을 박산골에 끌고 가 총살했다. 당시 총살당한 주민은 15세 이하 남녀 어린이가 359명, 16~60세가 300명, 60세 이상 노인 60명(성별: 남자 327명, 여자 392명)으로 총 719명이었다.
이 사건에 대해 부산 피난 국회에서는 논란이 벌어졌다. 1951년 3월 29일 거창 출신 국회의원 신중목(愼重穆) 의원은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해 회의를 비공개로 요청한 후 거창사건을 공개했다. 국회는 신중목 의원의 보고 이후 사건의 중대성에 비추어 국방 · 내무 · 법무장관과 함께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출석을 요청해 진상을 규명하고 대책을 논의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국회에 출석하지 않고 국내 제반사항에 대해 거창사건이 해외에 보도되지 않도록 비밀리에 조사해 시정케 해달라는 서한만을 보냈다. 다음날 제55차 본회의에 출석한 장면(張勉) 총리와 조병옥(趙炳玉) 내무장관, 김준연(金俊淵) 법무장관, 신성모(申性模) 국방장관은 거창사건의 진상을 둘러싸고 각각 엇갈린 보고를 했다.
한편 거창사건이 국회에 알려지기 전인 2월 26일 신성모 국방장관은 헌병사령관과 경남경찰국장 등을 이끌고 비공식 현지조사를 실시했다. 이와 별도로 내무부는 장영복(張永福) 경무관이, 법무부는 김준연 장관의 지시로 부장급 검사 2명이 각각 현지조사를 실시하였으나 3부의 조사내용은 모두 달랐다. 국회는 각 부의 보고가 다르고 사안이 중요한 만큼 위원회를 구성해 현지조사를 실시하기로 결의안을 채택했고, 1951년 3월 30일 본회의 의결을 통해 거창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거창사건특별조사위원회와 내무 · 법무 · 국방부가 합동조사단을 구성해 파견하기로 의결했다. 4월 1일 오후 3시 조사단은 국무총리와 관계 장관들이 내무부 차관실에서 위원회 조사단 활동에 따른 제반 문제를 논의한 후 4월 3일 신원면 사건현장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현장에 도착하기 전 조사단은 거창군 남상면과 신원면 사이 계곡에 공비를 가장한 군인들의 총격으로 거창경찰서로 되돌아왔다. 경남계엄사령부 민사부장 김종원(金宗元)은 매복한 9연대 수색중대 40여 명의 병사들에게 공비로 가장해 국회조사단이 올라오면 사격은 하되 사람이 맞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국회조사단은 거창경찰서에서 행정부 조사관과 국회조사관이 선정한 한동석 대대장을 비롯한 거창경찰서장과 형사, 신원면장, 그리고 신원면 현지 주민 등 모두 12명에 대한 증언조사를 벌였으나 김종원 대령의 방해로 사건의 실체는 밝히지 못하였다.
이승만 정부와 국방부는 조사단에 대한 위장공비 사건으로 국회의 압력에 직면해 4월 24일 국무회의에서 거창사건의 책임을 물어 국방 · 법무 · 내무장관을 사직토록 했다. 국회의 압력이 거세지자 이승만은 결국 신성모의 사표를 수리하였고, 5월 7일 이기붕(李起鵬)을 국방장관에 임명하였다. 국방장관이 이기붕으로 바뀐 뒤 헌병사령부는 5월 하순경부터 사건을 본격적으로 수사했다. 대대장 한동석은 5월 28일 구속되었고, 이어서 오익경과 3대대 정보장교 이종대의 조사결과가 보고되어 수사가 계속되었다.
군 검찰은 오익경과 한동석, 3대대 정보장교 이종대(李鍾大)를 기소했고, 제1차 군법회의가 1951년 7월 28일 대구고등법원에서 개정하였다. 김종원은 군법회의가 진행 중이던 9월에 국회조사단 피습사건으로 추가 기소되었다. 수사와 기소를 거쳐 군법회의가 열렸고 심리 끝에 12월 16일 선고 공판을 열었다. 강영훈(姜英勳) 재판장은 김종원 피고의 문서위조죄에 대해서는 무죄를, 공무집행방해죄에 대해서는 유죄를 인정해 징역 3년(징역 7년 구형)을 선고했다. 9연대장 오익경은 살인죄와 군무불신임초래에 대해 유죄가 인정돼 무기(사형구형)를 선고받았다. 3대대장 한동석은 살인죄와 군무불신임초래죄에 대해 유죄가 인정되어 징역 10년(사형구형)을, 이종대는 무죄(징역 10년 구형)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들을 1년도 되지 않은 다음해 모두 특별사면했고 특히 김종원은 경찰의 간부로 다시 등용되었다.
1960년 4·19혁명 이후 민주화된 시기에 유족들을 중심으로 진상규명 운동이 일어났고 유골을 한 곳에 모아 봉분을 만들고 위령비를 세웠다. 유족들은 1951년 2월 사건 발생 당시 신원면장이었던 박영보(朴榮輔)를 잡아 실신시키고 생화장하는 일을 벌이기도 했는데, 그만큼 유족들의 분노와 한은 깊었다. 1960년 4대 국회는 거창사건을 비롯해 한국전쟁기 학살사건을 조사하려고 했으나 형식적인 피해신고 접수에만 머물렀다. 그러나 국회는 정부를 상대로 학살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특별법 제정과 피해자 구제조치 등 권고안을 채택하는 성과도 보였다. 그렇지만 이런 노력은 이듬해 5·16군사정변으로 인해 모두 좌절되었는데, 유족들이 박산골에 세운 비석은 군인들의 지시에 따라 징으로 쪼여져 땅속에 묻혔고 유해는 흩어졌다.
1987년 민주화가 성취되고 유족들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김영삼(金泳三) 정부가 들어선 이후인 1996년 관련 특별법「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되어 명예회복과 위령사업을 벌이게 되었다. 이 법률에 따라 사망자 피해유족을 확정하고 거창군 내에 위령시설을 설치했다. 이 사건에 대한 국군과 경찰의 가해와 민간인 피해는 언론보도와 유족들의 증언으로 명백히 밝혀졌으나 1951년 군사재판과 1960년 제4대 국회 조사, 그리고 특별법에 의한 명예회복 조치에도 불구하고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진상조사’는 이뤄지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거창사건은 이승만 정권과 군사정권 하에서 진상이 은폐된 채 묻혀 있다가 1987년 민주화 이후 명예회복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정부가 피해자 인정과 명예회복 조치로 기념관을 건립하였으나, 공식적으로 사건의 진실을 조사한 적이 없는 상태로 남아 있다. 6·25전쟁 중에 일어난 많은 민간인 학살처럼 이 사건 역시 군이 작전이라는 명목 하에 주민들을 의도적으로 살해한 집단학살로서 대규모 인권침해 행위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