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건설·후통일론 (·)

현대사
개념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 군사혁명위원회가 내건 통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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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 군사혁명위원회가 내건 통일론.
개설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 군사혁명위원회혁명공약에서 반공체제 재정비와 강화를 위한 방안을 밝혔다. 주요내용은 “민족적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해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배양에 전력을 기울이는” 것이었다. 이 내용은 각계각층의 무분별한 통일방안 논의와 통일운동의 확산을 정부가 막고, 통일을 미래의 과제로 두겠다는 발상이었다.

유엔이 감시하는 기구 내에서 한반도 인구비례에 의한 남북한 총선거라는 기존의 통일방안은 유지되고 있었지만, 군사혁명위원회는 통일문제를 더 이상 공론하기 보다는 먼저 경제자립과 실력배양이 우선이라는 입장을 밝힌 것이었다.

내용

1963년 출범한 박정희 정부는 군사혁명위원회의 ‘선건설후통일론’의 입장을 그대로 이어 받았다. 박정희 정부는 남북한이 군사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해 있는 상황에서 국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채 이뤄지는 통일에 대한 논의는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했고, 경제건설로 실력을 갖춘 다음에 통일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내세웠다.

1966년 1월 18일 국회에 보낸 대통령 연두교서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의 지상명제는 바로 조국통일”이라고 전제했지만, “우리가 지향하는 조국 근대화야말로 남북통일을 위한 대전제요, 중간목표이다. 통일의 길이 근대화에 있고, 근대화의 길이 경제자립에 있는 것이라면 경제자립은 통일의 첫 단계가 된다”고 강조했다.

연원 및 변천

1960년대 내내 이어져 온 경제건설 우선론은 1972년 10월 유신 이후에도 이어졌다. 박정희 대통령은 ‘선건설후통일’ 이라는 ‘통일역량배량원칙’을 제시했다. 그는 남북문제의 효율적인 추진을 위해 대통령 권한을 강화하는 명분으로 유신헌법을 채택하였고, 1973년 6월 23일 「평화통일 외교정책 선언」에서 대화에 의한 통일정책을 제시했다. 이것은 남북한이 평화공존의 단계를 거쳐 서로 신뢰를 회복한 이후 교류와 협력을 증대해 정치 · 외교적 결합을 이룬다는 입장이었다.

또한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사에서 ‘평화통일 3대 기본원칙’을 제시했는데, 이것은 ‘선평화후통일’의 정책기조를 유지하면서 일관성 있게 추구해 나갈 것을 강조한 것이었다.

의의와 평가

5·16군사정변 이후의 ‘선건설후통일’론은 이후 먼저 경제발전을 이룬 다음 남북한 교류와 협력을 통해 신뢰를 구축하며, 이로부터 민족동질성을 회복한 후, 통일을 이룩하자는 기능주의 통일정책과 통일방안의 바탕이 되어 왔다. 하지만 ‘자립경계’와 ‘조국근대화’를 앞세우는 이와 같은 통일논의와 통일방안 기조는 정부가 통일에 대한 논의를 독점하고 민간 부문의 통일운동을 탄압하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참고문헌

「1960년대 정치세력의 통일논의 전개와 성격」(이주봉, 『한국사학보』50, 2013)
「1953∼61년 통일논의의 전개와 성격」(홍석률,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7)
통일부 북한자료센터(www.unibook.uni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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