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 무장투쟁은 1946년 대구에서 촉발된 10월 인민항쟁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10월 항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미군정의 탄압 속에서 합법적인 활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산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이들은 우익세력과의 대결에서 밀려나 무장투쟁을 계속하기 위해 산으로 들어갔는데, 이들은 ‘산사람’이라고 불렸다.
1947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이후 남조선노동당은 무장투쟁 전술을 채택했는데, 이는 남로당의 활동이 미군정에 의해 비합법적인 것으로 간주되면서 투쟁 전술이 변했기 때문이었다. 야산대는 이후 빨치산으로 변해갔는데, 1948년 여순사건을 거치면서 군인들이 합류해 더욱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무장세력으로 재편되었고, 이후 인민유격대로 발전하게 되었다.
야산대는 합법적인 투쟁을 할 수 없었던 남조선노동당이 무장투쟁을 벌이면서 만든 조직이었다. 1946년 10월 항쟁 이후 간헐적으로 이어져 오던 투쟁은 1948년 2·7구국투쟁을 계기로 본격적인 무장투쟁의 형태로 나타났다. 이 투쟁은 전국에서 벌어졌는데 서울에는 ‘행동대’, 지방에는 무장투쟁 세력인 ‘야산대’가 조직되었다.
대구지역 야산대의 사례를 보면, 1개 군에 50∼100명 정도가 편성되었는데, 이 규모는 지역마다 차이가 많았다. 이들이 갖춘 장비는 주로 지서를 습격해서 탈취한 무기가 대부분으로, 소총과 장도 정도였다. 야산대의 구성원을 살펴보면, 일제강점기 징병·징용으로 끌려가 군복무를 한 경험이 있거나 10월 항쟁에 참가한 탓에 미군정과 경찰의 감시와 추적을 받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1946년 10월에만 해도 남조선노동당은 합법적 정치활동을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에 야산대는 단독정부 수립 반대나 인민공화국 지지투쟁 등의 당 활동을 원만히 보장하기 위한 자위수단의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1948년 제주4·3사건과 정부수립, 그리고 여수·순천사건을 계기로 군장병들이 합류함에 따라 본격적인 무장유격대가 조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