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봄은 1979년 10월 26일부터 1980년 5월 17일 사이에 전개된 민주화 운동 시기이다.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의 봄에 비유한 명칭이다. 1979년 10·26사건의 발생으로 국회에서 계엄령 해제와 유신헌법 개정 논의에 합의하여 유신철폐와 민주주의 실현에 대한 국민적 기대가 팽배해졌다. 그러나 전두환 등 신군부는 12·12군사반란을 일으켰고, 이에 맞서 학생들은 1980년 봄부터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신군부는 비상계엄에 저항하며 일어난 광주 5·18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권력을 장악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10 · 26사건 직후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 소장은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아 군부를 장악하고 정치적 실세로 등장했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등장한 신군부는 1980년 5 · 17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정권을 사실상 장악했고, 비상계엄에 저항한 광주시민들의 민주화 운동을 강경 진압했다.
‘서울의 봄’이라는 표현은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의 봄’에 비유한 것이다. 서울의 봄은 신군부가 광주 5 · 18민주화 운동에 군인을 투입해 수많은 희생자를 남긴 채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종결되었다.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가 박선호, 박흥주 등과 함께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살해하면서 10 · 26사건이 발생했다. 이날 박정희는 KBS 당진 송신소 개소식과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한 후 궁정동 안가에서 차지철 경호실장과 김계원 비서실장,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연회를 가졌다. 연회 도중에 김재규는 박정희의 가슴과 머리에 총탄을 쏘았고, 박정희는 국군 서울지구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사망했다.
박정희 대통령 사망 직후인 1979년 12월 6일 최규하 내각은 긴급조치를 해제하면서 개헌 논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긴급조치로 활동을 하지 못하던 재야인사들이 복권되었고, 유신체제가 끝나고 민주화가 이뤄질 것이라는 기대가 국민들 사이에 팽배해 있었다.
윤보선 등 시민사회 원로들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유신헌법 폐지와 민주적 선거를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1980년 5월 여야는 같은 달 20일 국회를 열어, 계엄령 해제와 유신헌법 개정 논의를 진행하기로 합의했다. 5월 1일부터 전국 각지에서 민주화 일정 제시와 전두환의 퇴진 등을 요구하는 대규모 대학생 시위가 발생했다.
한편, 대통령이 살해 당하자 정국은 혼란에 휩싸였고, 수사과정에서 보안사령부가 권력의 핵심 기관으로 합동수사를 도맡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수사를 책임진 합동수사본부장에 오르면서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은 11월 중순부터 군부를 장악할 계획을 세우고 정승화 총장과 상급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하나회를 중심으로 반란 세력 조직에 나섰다. 이렇게 군부 내 하나회를 중심으로 하극상을 준비한 전두환 등 신군부는 12 · 12군사반란을 일으켜 군부를 장악했다.
군부를 장악한 신군부는 1980년 1월 군 장성들의 대대적인 물갈이를 통해 12 · 12군사반란을 비판하는 장성들을 전역시키거나 보직 변경을 단행했다. 1980년 4월 14일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은 공석 중이던 중앙정보부장까지 겸임하게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 사망 이후 국민들은 민주적 선거에 의해 대통령이 선출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재야진영이던 김영삼과 김대중의 정치 행보에 주목했다. 그러나 전두환을 중심으로 군부의 실세로 떠오른 정치군인들은 최규하 정부를 압박하면서 집권 시나리오를 진행했다.
신군부의 정권 장악에 맞서 학생들은 1980년 봄부터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점차 민주헌법의 제정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크게 일어났는데, 5월에 접어들자 학생들은 최규하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와 신군부의 정권장악 의지를 규탄하며 거리로 나왔다.
5월 14일과 15일 서울지역 대학생들은 계엄령 상황임에도 시내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에 신현확 국무총리는 15일 담화문을 발표해 국회와 협의해 모든 정치 일정을 최대한 앞당기겠다며 학생들에게 자제를 요청했다. 학생들은 정부의 발표를 믿으며 향후 논의를 지켜보기로 했지만 신군부가 중심이 된 정치 상황은 국민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신군부는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5월 초부터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비상계엄 전국 확대와 국회 해산, 비상기구 설치 등을 골자로 하는 시국수습방안을 마련했다. 신군부는 5월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5월 20일로 예정되었던 임시국회를 무산시키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했다.
이에 따라 모든 정치 활동이 정지되었고, 김대중과 김종필을 비롯한 정치인과 재야인사들이 체포되었으며, 김영삼은 연금되었다. 대학에는 휴교령이 내려졌고, 전국의 각 대학과 주요 도시에는 공수 특전단을 비롯한 군부대가 투입되었다. 또한 신군부는 5월 17일 단행된 조치에 항거해 일어난 광주 5 · 18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결국 서울의 봄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신군부는 5월 24일 김재규 등 박정희 살해와 관련된 사람들을 대법원 판결 확정 후 즉결심판으로 처형했고, 8월 최규하 대통령도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박정희 대통령 사망 이후 국민들은 유신체제에서 벗어나 민주주의 사회로 이행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1980년 서울의 봄은 이러한 민주화의 물결이었다. 그러나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는 국민들의 민주주의 요구를 무력으로 탄압하고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결국 서울의 봄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