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의민주주의제도는 서로 상충하는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 개인 또는 집단과 국가 사이의 이해와 요구를 조화시켜 사회적 의사를 결정하고 실천해 나가기 위한 권력행사의 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의 제도적 표현이 곧 국회이다.
따라서, 국회는 국민의사를 표현하는 기관인 동시에 국가의사를 결정하는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의회는 중세 말의 전제군주정치 아래에서 귀족과 시민의 대표가 정치에 참가하는 하나의 형식으로서 발생하여 대략 세 단계를 거쳐서 발달하였다.
중세 말기부터 근세 초기에 이르는 단계는 귀족과 시민이 정치적 자유와 권리를 신장시켜 의회에 참여하게 된 초기단계로, 16세기 이전의 영국과 프랑스에서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는 형식상으로는 국민대표의 참여의회의 형태를 보였으나, 실제로는 군주 정부의 부속기관에 불과하였다.
의회정치의 두번째 단계는 시민혁명을 통한 입헌정치의 실현을 본 17세기의 영국이나 18세기 말의 프랑스에서 나타난 입헌의회로서, 이때 국회는 헌법상의 독립기관으로서 국가의 필수불가결한 입법기관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의회정치의 세번째 단계는 ‘교양과 재산’을 가진 제한된 일부 유권자가 아닌 전국민이 선거권을 갖는 보통선거제가 실시된 단계로, 이때 비로소 현대적 의미에서의 의회민주주의의 기틀이 되는 전국민의 대표기관으로서의 국회가 자리잡게 되었다.
의회는 영어로 ‘parliament’, 프랑스어로 ‘parlement’라 하여 두 단어가 똑같이 ‘parle(서로 말한다, 대화한다)’를 어간으로 삼고 있으며, 1265년 이래 영국의 의회정치를 비롯하여 서구 제국의 오랜 의회정치사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킨 법의 지배를 확립하게 한 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과정에서 대표제와 다수결의 원리를 구현하기 위하여 정당이 발달되고, 선거에 의한 정권의 교체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특히, 자유로운 정보가 발달한 현대민주사회에서는 의회에 의한 권력의 행사는 다수지배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을 피하고, 소수의 이해와 의견을 존중하여야 한다는 원칙을 수용하는 유연성을 보이고 있다.
정치발전의 과정에서 근대화작업이 늦어진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의회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제도적·이론적 측면이 서구 여러 나라에 비해 뒤떨어져 있다.
100여 년 전부터 서구의 문물을 접하게 된 한민족에게 있어서 민주주의로서의 의회제도는 소수 지식인의 이상이었으며,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제적 권력구조 속에서 의회제도의 정립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더욱이 대한제국 말기에 있어서 정치제도의 점진적 개혁과 국권운영의 기본구조와 규정을 만들어 본 노력도 끝내 일제의 침략으로 좌절되고, 그 뒤 일제의 탄압정치 때문에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정치발전의 기회가 박탈되고 말았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같은 해 7월 17일에 공포된 대한민국 「헌법」에 기초하여 국회가 개설되어 한민족사상 최초로 의회정치를 구현하게 되었다.
그 이후 현재까지 여러 차례에 걸친 헌법의 일부 또는 전면 개정에 따라 제1공화국으로부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으며, 의회의 정치적 구실과 정치발전에 따른 기능도 이에 따라 변천되어 왔다.
국회의 기능에 대하여는 「헌법」 제3장에서 국회에 관한 여러 가지 조항을 규정하고 있다. 입법권은 국회에 있고, 그 구성은 국민의 보통·평등·직접·비밀 선거에 의하여 선출된 의원으로 구성된다.
또한, 국회의원과 정부는 법률안을 국회에 제출할 수 있으며, 국회는 정해진 절차에 따라 법률을 제정한다. 특히, 국회는 국가의 예산을 심의, 확정함으로써 정부의 일을 평가하기도 하며 행정부를 견제하고 있다.
의회의 최소한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하여는 행정부로부터의 종속적인 위치를 벗어나서 적어도 기능의 자율성을 확보하여야 하며, 의회가 독자적으로 의사결정을 하고 있다는 데 대한 국민의 신뢰를 얻어야 할 것이다. 더욱이 의회는 행정부와 상호 견제하고 상호 협조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의회의 대정부적 지위와 기능에 관하여 일반적으로 입법기능·통합기능·심사기능·평가기능을 의회의 중요한 기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근대국가의 정치발전과정에 있어서 행정부의 비대화에 따른 입법부의 정치적 기능이 현저하게 약화되어 온 결과, 지금까지도 정치적 발전을 모색하고 있는 나라, 특히 우리나라와 같은 현실에서는 의회의 기능 정립이 정치발전과 밀접하다고 할 수 있다.
건국 이후 우리나라가 당면한 국내외적 환경은 정부와 국회가 비정상적인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조직관리에 노력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특히, 강력한 추진력과 신속성을 내세워서 의회는 단원제를 택하게 되었고, 법률에 유사한 제반 규정을 만들 수 있는 권한이 행정부에 위임되었다.
그리고 입법과정에 있어서도 정부안이 다수 제출되는 현상을 이루었다. 또한,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당의 연속성이 강제적으로 단절되었고, 전 시대의 정당과 동일한 당명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정당과 국민과의 일체감 형성에는 커다란 차질이 생기게 되었다.
제1공화국으로부터 제5공화국에 이르기까지 동일성을 가지지 못하게 되고 같은 부류의 정치인들이 지속적으로 의회에 진출하지 못하는 경향이 컸다.
따라서, 기반이 비교적 약하고 인물 중심적인 투표성향을 유지하는 국민의 투표행태 때문에 정당별 의회의 구성은 아직까지 국민적 기반에 뿌리깊게 자리잡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50여 년간 국회는 변혁 속에서도 꾸준히 그 기능을 다해 온 경험을 쌓고 있다.
(1) 의회제도의 변천과정
미군정청의 관리하에 실시된 1948년 5월 10일의 총선거는 우리나라 최초의 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선거였으며, 그 당시 정당과 선거에 관한 우리의 모든 지식을 동원하여 대처하였던 정치적 중대행사였다.
1인1구의 소선거구제에 1인1표의 단순투표제를 채택하였으며, 이것이 행정구획인 군 단위의 정치권력 분산의 시작이었다. 모두 200개의 선거구 가운데 제주도의 2개 선거구를 제외하고 198인의 제헌의원을 선출하였고, 제주도는 다음해인 1949년 5월 10일에 선거를 실시하였다.
혼란과 유동적인 사회구조 속에서 구성된 제헌의회는 그 해 5월 말 이승만(李承晩)을 국회의장으로 선출하였으며, 7월 12일에 대한민국 「헌법」을, 10월 2일에 「국회법」을 제정하였다. 오늘날의 「국회의원선거법」의 모체가 되는 「선거법」을 1950년 4월 12일에 제정하였다.
권력구조의 골격을 이루며 정치권력의 행사에 있어 기본원칙이 되는 「헌법」 및 「국회법」·「국회의원선거법」은 일찍이 제정되었으나, 정치권력의 지방분산을 위한 「지방자치법」의 제정은 상당히 늦어졌다.
또한, 6·25전쟁에 따른 국정과 지방정치의 혼란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한민족이 추구하는 자주적·민족적 권력구조의 형성은 상당히 지연되고 있었다.
의회제도는 국정에 한하여 논의될 뿐 지방의회에 대한 관심은 극히 미미하였다. 또한, 제헌국회에 의하여 제정된 「헌법」 및 「국회법」·「국회의원선거법」은 정권이 바뀌거나 정치변혁이 있을 때마다 크게 수정되어 왔다.
한편으로 1960년대에 제정된 「정당법」 및 「정치자금법」은 의회제도의 커다란 변혁을 초래한 것으로 주목할 만하다. 제헌국회의원선거를 포함한 제1공화국에서의 국회의원선거제도는 근본적으로 소선거구제로서 직선제뿐이었다.
특히, 제헌국회에서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승만은 재선을 위한 국민의 지지기반을 동원하려고 대통령과 부통령의 직접선거를 내용으로 하는 이른바 발췌개헌을 하였다.
제1차 개정헌법에는 “국회는 민의원과 참의원으로 구성한다.”, “참의원의 임기는 6년으로 하고 2년마다 의원의 3분의 1을 개선한다.”라고 규정하였다.
따라서, 의회제도를 제헌국회의 단원제로부터 양원제로 근본적으로 개혁한 셈이다. 그러나 「참의원선거법」은 1958년 1월 제정되었으므로 그 이전인 제3대와 제4대의 국회는 민의원으로만 구성되었다.
선거법상 국회의원의 후보자 선출과 그 등록에 있어서는 정당의 기능을 최소한으로 줄이려는 의도가 있었고, 따라서 무소속 출마의 가능성이 높아졌다. 국회의원 후보등록은 선거인이 추천하는 형식을 취하는 선거인 추천제로 개정, 출마자의 승낙서를 첨부하게 하였다.
따라서, 중앙선거관리위원회나 선거구의 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제3대 국회의원총선거 때부터 입후보자의 정당공천제가 채택되었다.
1960년의 4·19혁명 이후 제2공화국에서는 헌법을 개정하여 정부형태를 내각책임제, 의회를 민의원과 참의원의 양원제로 하였다. 제1공화국의 단원제가 가지고 있던 소선거구제는 민의원선거에 적용하게 하고, 참의원선거는 대선거구제로 하여 총 58개 의석으로 정하였다.
특히, 참의원의 피선거권은 30세로 연령을 높이는 등 비교적 보수적인 직능대표제적 요소를 보완하였다. 국회의원후보자는 본인이 직접 선거관리위원회에 후보자등록을 신청하거나 타인인 유권자가 추천하여 등록하려는 경우에만 후보자의 승낙서를 첨부하도록 개정되었다.
1961년의 5·16군사정변으로 탄생하게 된 제3공화국에서는 또다시 국회를 단원제로 하는 헌법으로 개정하고, 국회의원후보자들은 반드시 정당의 공천을 받도록 하였다.
이는 제3공화국이 대통령중심제 정부와 정당정치의 강화를 꾀하려는 권력구조를 마련한 것이다. 선거권은 만 21세 이상에서 20세로 낮추어 국민의 지지기반을 확대하는 정당정치적 양상을 보였다.
의회의 선거구는 소선거구제로 정하고 전국구에서 의원총수의 3분의 1을 선출하게 하였다. 1972년 유신헌법에 의하여 성립된 제4공화국은 헌법을 개정하는 동시에 단원제국회를 유지하였으며, 선거구를 2인1구의 중선거구제로 개혁하였다.
양당제를 지향하는 강력한 대통령중심제를 마련하였고, 국회의원의 3분의 1은 대통령이 제출한 후보자명단에 따라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하였다. 따라서, 국회의원의 3분의 2만이 지역구에서 직접 선출되게 하였다.
이와 같은 유신체제하의 국회의원은 지역구의원은 임기 6년, 전국구의원은 임기 3년으로 하여 통일주체국민회의는 3년마다 전국구의원을 찬반투표로 선출하였다. 의원의 후보등록은 정당의 공천을 받아 신청하게 하였으며 무소속 출마도 허용하였다.
제3공화국에서는 국회의원이 대통령·국무총리·국무위원·지방의회의원 등 법률이 정하는 직을 겸할 수 없게 하였으나, 제4공화국의 유신체제하에서는 국무총리 및 국무위원을 겸직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1981년의 제5공화국은 양당제의 정당정치를 지양하고 다당제의 의회구성을 꾀하였으며, 대통령중심제와 내각책임제의 요소를 복합적으로 갖춘 권력구조를 마련하였다. 정당의 강화를 전제로 한 국회의 기능을 다소 바꾸면서 제3공화국의 전국구와 제4공화국의 지역구를 결합한 제도로 개혁하였다.
국회의 구성은 지역구의원 184인과 전국구의원 92인으로 하고, 지역구는 제4공화국의 2인1구의 중선거구제를 채택하였다.
특히, 전국구의원의 경우 각 정당이 작성한 후보자명부 가운데 지역구 선거결과에 따라 제1당이 된 의회의 다수당이 92인 가운데 3분의 2를 차지하고 나머지 3분의 1은 각 정당의 의석획득수에 비례해서 배분하도록 되어 있다.
의원후보등록은 두 가지로 구분된다. 지역구의 경우 정당의 당원은 소속정당의 공천을 받아서 선거공고일로부터 5일 이내에 지역구관할 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하여야 한다.
정당원이 아닌 경우에는 후보자등록을 위하여 선거구의 행정지역 내에 거주하는 주민등록이 된 유권자 500인 이상 700인 이내가 기명날인한 추천서를 후보자등록시에 첨부하도록 하여, 정당 중심적인 의원후보자의 충원제도와 지역에서 인망이 있는 개인도 의회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였다.
전국구후보의 등록은 정당이 당에서 결정한 후보자명부와 본인의 승낙서를 첨부하여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신청하도록 되어 있다. 제5공화국의 의회는 92개 선거구에서 각 2인씩, 그리고 전국구에서 92인을 당선시킴으로써 274인의 의원으로 구성되었다.
지난 의정 50여 년을 보면 의원수 200인 내외의 단원제가 가장 오래 지속되었으나 상원이라 할 수 있는 참의원제의 요망도 있었다. 건국 초부터 국정의 신속한 처리를 위하여, 또한 국가의 단위로 보아서 큰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200여 인의 의원을 중심으로 한 단원제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현재까지 변하여 오는 과정에서 원로의원 또는 다선의원의 수는 극히 적었는데, 이는 새로 세워지는 정권마다 이전의 기성정치인을 제거하려 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운영의 역사도 그다지 길지 않지만 의원의 충원과정이 정권의 변화와 연관되어 있어 의회의 전통이나 정치적 가치의 축적에 특유한 양상을 가지고 있다.
의회를 구성하는 정당 자체가 민주정치의 기본적인 집단이기는 하지만 정당의 발전마저도 정치적 변혁 때마다 정치인의 이합집산현상을 드러내었기 때문에 의회의 정당적 구성에 있어서도 꾸준한 맥의 형성이 어려웠다. 따라서, 제도가 내실화할 수 있는 토착화과정이 상당히 유동적이다.
특히, 군소정당이 많던 초기의 의회와 야당·여당으로만 대립되었던 국회의 이분현상, 이에 따른 흑백논리적 대립, 정당간의 대화나 협상의 기피 등의 현상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의회의 대화적 기능, 민의수렴의 수단과 같은 기능이 아직도 정착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민주주의제도를 토착화하여 정치적 안정을 꾀하고 정치적 발전을 희구하는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는 점진적으로 제도의 운영이나 구성에서 보다 민주적으로 되어가고 있다.
(2) 정당체계의 변혁
정당은 의회제도에 있어서 처음부터 절대적인 정치적 기능을 맡아왔다. 민주정치의 대의적 성격은 결국 정당의 발전과 구실에 따라서 뚜렷하게 부각되는 것이다.
의회를 구성하는 것은 국회의원이며, 이 국회의원은 원칙적으로 정당에 속하고 있는 정당의 소속원이다. 따라서, 정당정치를 기초로 한 의회의 대표성을 실현하게 된다.
정당은 의원의 소속에 따라 원내 정치단체를 구성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국회의원은 공정한 선거에 의하여 당선된 의회의 구성원으로서 국민을 대표하게 마련이다. 서구와는 달리 우리나라의 정당은 의회의 발전과 국민의 선거권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발전된 것이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한국민은 처음부터 대의정치적 민주주의제도를 수용하였고, 일정한 연령 이상의 모든 국민에게 한꺼번에 선거권이 부여되었다.
의회나 정당의 기능이 정치적으로 발전된 바 없이 그대로 대중적 민주선거로부터 의회를 구성하게 되었기 때문에 정당의 난무와 유권자의 지지를 획득하려는 정당의 지나친 활동은 매우 비정상적인 것이었다.
제1공화국 초기에 있어서 우리나라의 정당체계는 다당 난립과 무소속의원의 다수 진출로 인하여 자연히 지배적인 정당이 나타나지 못하여 정치권력의 종합적 표현은 당시 의회를 중심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서 제헌국회의 선거에 참여한 정당은 48개나 되었으며, 417인의 무소속후보자 중 85인이 당선되어 국회의원 총 200인 중 42.5%가 무소속의원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 아래에서 정치적 통합과 대화는 당을 중심으로 하기보다는 의회조직과 기능을 통하여 실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국회사무처의 직원수나 기능이 커지고, 일반적으로 정당이 담당하여야 하는 것까지 국회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국회를 구성하였던 정치단체 가운데 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55석을 차지하여 의원정수의 27.5%가 되었고, 한국민주당 29석, 대동청년단 12석, 조선민족청년단 6석, 대한독립촉성농민총동맹 2석, 그 밖에 부산 1·5구락부를 비롯, 교육협회민족통일본부·조선공화당·유도회·대한노동총연맹·조선민주당·대한청년당·한국독립당·단민당 등 11개의 정당단체가 각 1석, 그리고 무소속이 85석이었다.
결국 제헌국회에서는 정당간의 체계적 연결이 형성될 수 없었고, 또한 다수가 무소속이어서 정당간의 의회지배를 위한 경쟁도 심각하지 않았다. 이는 정당의 중요성을 체험해 보지 못한 채 대한민국의 기본 정치권력을 장악하게 된 대통령 이승만의 등장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의회 중심적 정치 경쟁마저도 시작되지 않았다.
후일에 한민당의 후신인 민주국민당을 포함한 야당의 세력이 의회 내에서 규합하여 대통령의 권한에 대응하게 되자, 국회는 여당과 야당의 양대진영으로 구분되면서 여당으로서 자유당이 구성되었다. 결국 대통령 이승만을 중심으로 창당된 자유당은 행정부에 대한 의회 내의 지지세력으로서 시작된 셈이다.
이와 같은 경향은 이후 우리의 정당정치에 크게 영향을 주게 되었다. 한편, 정당은 인물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그 인물이 정치권력의 중심에서 제거되는 과정에서 정당마저도 사라졌고, 유권자의 정당동일시와 같은 투표행태도 기대하기 어렵게 되어가고 있다.
자유당의 공천에 의하여 출마하게 되는 제3대 국회의원총선거 이전에는 역시 무소속의원이 60%나 되는 129인으로서 민주국민당 23인, 대한국민당 23인, 국민회 13인 등 정당의 이름으로 국회를 구성한다는 원리는 정착되지 못하였다.
또, 1948년 5·10선거로부터 1954년 5월 20일의 제3대 국회의원총선거까지의 6년간은 6·25전쟁과 이에 따른 민족의 남북이동의 혼란 속에서 정당 차원의 정치상황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6·25전쟁이 끝나고 정국이 또다시 정치권력을 향하여 경쟁하게 되었을 때 건국 후에 새롭게 정치적 경험을 얻게 된 대통령 이승만은 강력한 대통령중심제하에서 자유당을 창당함으로써 의회의 정부 지지를 위한 기초를 이루려 하였다.
이러한 자유당의 창당은 정당간에 일정한 세력을 유지하면서도 대화와 타협을 통하는 의회 중심의 체계적 경쟁체제가 아닌 강력한 지배적 정당체제를 모색하게 된 시초이다.
자유당이 창당되고 국회의원후보를 공천하기 시작하면서 제3대 국회는 그 구성이 정당적 차원에서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지나친 지배적 정당으로 등장한 자유당은 총 의석 203석 가운데 114석을 차지하여 과반수를 넘었고, 무소속이 67석이었으며, 민주국민당의 15석을 포함해 대한국민당·국민회·제헌국회의원동지회 등 4개의 정당단체가 22석을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하에서의 국회는 자유당의 지배 밑에서 정당 위주로 운영되었고, 제도적으로 배분된 정치권력의 체계적 운영이 어려웠다. 말하자면 민주주의제도가 정해놓은 대로 그 운영이 정착되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정당의 공천을 받으면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정당의 기능이 새롭게 인식될 수 있었다.
1958년의 제4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자유당 127석, 민주당 78석, 통일당 1석, 그리고 무소속 27석으로 총 233인이 당선되었다.
이에 따라 비교적 정당간의 체계가 잡혀갔으며, 적어도 여야간의 구도로 전향되고 있었으나, 여당인 자유당이 압도적으로 다수를 차지한 상황과 장기집권으로 인한 정치적 환경은 정당체계의 원활한 행태를 기대할 수 없게 하였다.
1960년 여름에 성립된 제2공화국은 내각책임제적 정치권력의 배분과 민의원 및 참의원의 양원제를 택하였다. 따라서, 국회와 정부의 양면을 정당을 중심으로 하여 통제, 운영한다는 정당 중심적 권력구조를 구성하였다.
새로운 의회제도하에서 민주당은 민의원의석 233석 가운데 절대다수인 177석을 차지하였고, 무소속이 47석, 그리고 자유당 2석, 통일당 1석, 한국사회당 1석, 사회대중당 4석, 헌정동지회 1석으로 자유당이 무너지면서 민주당이 의회에서 절대적 지배정당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참의원의 경우에서도 총 의석 58석에서 민주당 31석, 무소속 20석, 자유당 4석, 그리고 기타 3석의 배분을 보였다.
의회의 구성이 상하 양원 모두 1개 정당에 의하여 지배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부는 내각책임제적 구성을 하여야 하므로 정당의 원활한 운영이 정국의 안정과 발전을 기할 것이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그러나 민주당은 집권정당으로서 정치체계를 운용할 기회를 제대로 갖지 못한 채 5·16군사정변으로 정권이 바뀌었다.
결국 정당체계는 또 한번의 단절을 겪어야 했고, 제3공화국의 집권정당으로 등장하게 된 민주공화당은 비교적 양당제적인 정당체계의 구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의회의 통제를 정당 중심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1963년 11월에 실시된 제6대 국회의원총선거에 따라 원내 정당세력은 민주당 13석, 민정당 41석, 민주공화당 110석, 자유민주당 9석, 국민의 당 2석으로 국회의원은 총 175인이었다.
제3공화국의 국회구성은 제6·7·8대의 국회의원선거를 거쳐 명백히 양당제적 체계를 유지하여 왔고, 민주공화당이 압도적인 과반수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그 뒤 야당인 신민당의 세력도 점차 성장하게 되어 양극의 여야대립으로 인한 심각한 갈등관계가 의회 내에서 벌어졌으며, 의회와 정부 간의 관계도 대립적인 경향을 띠게 되었다.
마침내 1972년 10월 정부가 유신체제를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시켜 1973년 2월에 제9대 국회의원선거를 치렀다. 새로운 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당선되는 국회의원으로 구성되는 유신정우회의 발족으로 제9대 국회는 삼분되었다.
즉, 제9대 국회의원선거 결과 총 219석 가운데 민주공화당 72석, 신민당 58석, 유신정우회 73석, 민주통일당 2석, 그리고 무소속이 14석을 차지하여 정당체계는 인위적으로 다당제화하였으며, 무소속의 재등장으로 정당체계에 많은 변수를 가미한 셈이다.
제10대 국회는 제9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민주공화당·신민당·유신정우회의 3분파로 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무소속의원의 수는 감소하고 신민당의원수는 증가하였다. 원내에서의 정당체계는 유신정우회를 포함한 3당체계인 것처럼 보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여야간의 이원적 대립투쟁이 전개되어 국회의 정상적 운영에 커다란 지장을 초래하였다.
대통령 박정희(朴正熙)의 강력한 행정부 주도형 정치 때문에 의회는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고, 따라서 여야의 강경대립체계 속에서 정부와 의회의 관계는 주로 정부 우위의 현상이 많았다.
특히, 유신정권시대에 들어와서는 박정희의 1인체제로 운영되어 왔기 때문에 정당을 통한 의회의 운영이나 의회를 통한 행정부의 통제를 시도하지 못하였다. 결국 국회나 정당은 똑같이 행정부의 지도 아래 운영된 것으로 판단된다.
1979년 10·26사태로 의정은 또 한번의 단절을 겪게 되었고, 새로운 헌법에서 새로운 정치질서를 주장하는 인물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새로운 인물들로 구성된 민주정의당이 151석으로 집권당으로 등장하였고, 민한당은 과거의 야당세력을 규합한 정당으로 신민당과 민주당 구파를 모두 계승하여 82석을 차지하였다.
민주국민당은 전 정권의 집권당인 민주공화당 출신 의원들로 결속된 정당으로 25석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민사당과 군소정당의 하나인 신정당이 원내에 진출하였으나, 뒤에 합당하여 신정사회당을 구성, 제4당이 되었다.
제5공화국 출범 후 정치활동규제를 받던 정치인들은 꾸준히 민주화운동을 전개한 결과 1984년 5월 18일 야권 정치인들과 재야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결성하여 민주화운동의 구심적 역할을 하였다.
1985년 2월 12일에 치루어진 제12대 국회의원선거 결과 총 276석 중 민주정의당 148석, 신한민주당 67석, 민주한국당 35석, 한국국민당 20석을 차지하였다.
정치활동규제에서 해금된 야당 정치인들이 선거를 불과 25일 앞두고 창당한 신한민주당이 신당 돌풍을 일으키며 제1야당으로 등장했다. 신한민주당은 선거 후 민주한국당 소속 의원들이 대거 탈당, 합류함에 따라 103석을 확보함으로써 여당인 민주정의당과 양대정당 구도를 형성하게 되었다.
신한민주당은 양심수 및 구속학생 석방 등 정치현안의 해결과 직선제 개헌투쟁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개헌논의는 여당은 의원내각제를, 야당은 대통령직선제를 고수함에 따라 난관에 봉착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에서 전두환 대통령은 1987년 4월 13일 호헌조치를 통해 일체의 개헌논의를 중단시키고 1988년 2월 정부를 이양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국민 각계 각층에서는 4·13호헌조치가 장기집권의 음모라고 비난하면서 개헌요구의 강도를 계속 높여갔다. 1987년 6월 10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박종철군 고문살인은폐조작규탄 및 호헌철폐대회를 전국 22개 도시에서 일제히 개최하면서 국민들의 민주화요구는 절정에 달하였다.
6월 29일 민주정의당 노태우 대표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포함한 8개 항의 6·29민주화선언을 발표함으로써 국회에서 실질적인 개헌논의가 시작되었다. 그 결과 여야 합의로 10월 27일 국민투표를 거쳐, 10월 29일 대통령직선제 개헌인 제9차 개정헌법이 공포되었다.
1988년 4월 26일 치루어진 제13대 국회의원선거는 총 299석 중 민주정의당 125석, 평화민주당 70석, 통일민주당 59석, 신민주공화당 35석, 한겨레민주당 등 기타 정당이 10석을 차지하였다. 1988년 2월 출범한 제6공화국은 총선 결과 우리 헌정사상 최초로 여소야대 국회를 맞게 되었다.
그 결과 국정감사가 16년 만에 부활되는 등 국회의 위상이 제고되고 의정사상 최초로 청문회제도를 도입, 제5공화국에 대한 청문회를 TV와 라디오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하였다.
여소야대 정국에서의 정부와 여당은 국정운영에 있어서 어려움을 겪게 되자 1990년 1월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은 3당통합을 선언하고 216석의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을 창당하여 2년여 만에 여대야소의 정국으로 반전되었다.
1992년 3월 24일 치루어진 제14대 국회의원선거는 총의석 299석 가운데 민주자유당 149석, 민주당 97석, 통일국민당 31석, 무소속이 21석을 차지하였다.
1993년 2월 25일 출범한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 초기에 국회는 과거 비민주적이고 권위적인 군사정권의 잔재를 청산하고자 국가보안법과 국가안전기획부법을 개정하고 정치관계법을 개정하였다.
그 밖에 금융실명제 및 부동산실명제의 실시, 공직자의 재산공개를 통한 공직사회의 기강 확립 등 각 분야에 걸친 개혁작업을 뒷받침하였다. 또 1995년 6월 27일 우리 헌정사에서 30여년 만에 부활된 지방자치는 풀뿌리 민주주의 정착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는 의정활동의 TV 생중계 등 국회운영제도를 개선하였다.
1996년 4월 11일에 치루어진 제15대 국회의원선거는 총 의석 299석 가운데 신한국당 139, 새정치국민회의 79석, 자유민주연합 50석, 무소속 16석, 통합민주당 15석 등이었다. 이 기간중 한국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 29번째 회원국으로 정식 가입했다(1996년 12월 12일).
그러나 1년이 채 가지 못해 외환위기에 따른 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신청(1997년 11월 21일)을 하게 되었고 국제통화기금으로부터 개혁을 강요받게 되었다. 그 과정에 제15대 대통령선거(1997년 12월 18일)에서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사상 첫 선거를 통한 여야간 정권교체를 이룩하였다.
정당체제는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 난립의 양상을 보이다가 점차적으로 의회가 양극화되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정당별로 대립되는 것보다는 정부를 지지하는 여당과 이에 반대하는 세력으로서의 야당으로 구분되는 한국정치의 양극화 경향을 보여 준다.
더욱이 정치적 안정을 기한다는 의미에서 여당세의 확장을 노려 선거 때마다 야당과의 당적 경쟁이 치열하게 되고, 양당의 득표차가 점차로 적어지기 때문에 대립의 긴장감은 상당히 고조된다.
제5공화국에서의 제11대 국회의원선거와 제12대 국회의원선거에 있어서 원내의 여야간 대립상황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의회제도와 관련하여 정당체계를 고찰하여 보면, 당과 의회의 관계, 당과 행정부의 관계에 있어서 우리나라는 제1공화국에서 자유당 중심의 당적 정치체계가 겨우 성립된 셈이고, 제2공화국에서는 민주당이 내적 세력의 통합을 이루지 못하여 원내에서의 파벌적 대립 때문에 내각과 의회의 관계설정을 하지 못한 채 5·16군사정변을 당하게 되었다.
제3공화국에서는 공화당이 의회를 지배할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조직을 가지고 있었으나, 제4공화국에서는 행정부의 정치적 권력이 강화되면서 행정부의 지배에 당과 의회가 순종하게 되었다.
제5공화국에서는 정당의 의회지배보다는 정부에 대한 영향력 행사를 시도하는 당정협의가 생겨났으며, 제12대 국회의원선거 결과 원내 여야대립과 함께 여당의 행정부 지배는 다소 약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제13대 국회의원선거 결과 여소야대의 국회구성으로 국회의 행정부 견제기능이 강화되는 듯했다. 하지만 3당통합으로 정당의 인위적 개편이 이루어져 이후 행정부의 우위가 유지되었고, 지방자치제의 실시로 풀뿌리민주주의가 착실히 정착되어 가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래 국회는 변화와 지속 가운데 새로운 전통을 축적하였다. 전체적으로 보아 민주적인 제도와 전통을 마련하는 일련의 정치발전을 이루었다.
정부수립 초기에 외래제도와 정치적 이념을 수렴하려는 정치인들은 본인들이 지니고 있는 전통적 가치관과 행태 때문에 아직도 미숙한 점이 많은데도 민주화라는 정치발전을 목표로 삼고 있었을 뿐 아니라 새로운 제도의 정착에 대한 노력을 계속하여 왔다.
이와 같은 노력 속에서 국회는 앞서 지적한 대로 행정부에 대한 적절한 기능수행을 해왔다. 의회는 권력분립론에 따라서 정치권력의 절대화를 막고 정치권력으로부터의 시민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려는 제도이기 때문에 우리 국회도 통치권의 자의적 행사를 제한하고 국민의 의사를 집약하여 정책에 반영하려고 노력해 왔다.
국회의 입법활동은 국민의 자유의사를 정책에 반영하는 수단이며, 이는 또한 행정부에 대한 의회의 견제기능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국회는 처음부터 입법기관으로 시작하여 법률을 제정하고, 제정된 법률에 따라서 국정을 집행하도록 함으로써 행정부를 통제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국회가 행정부와의 관계에 있어서 그 동안 실제로 어떤 기능을 수행해 왔는가를 분석, 평가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국회가 지금까지 추구하여 온 입법기능은 가장 중대한 특성이기도 하다. 입법을 통하여 정책목표 설정기관으로서의 국회는 법률을 직접 제정하기도 하였지만, 행정부로부터 제출되는 법률안을 수정하여 최종적으로 법제화하기도 하였다.
결국 입법기능은 현행 「국회법」상의 제도로서 재의법률안(再議法律案)의 처리상황과 법률안 처리과정을 살펴봄으로써 국회의 본질적 기능을 찾아볼 수 있다.
이는 행정부와 국회의원 및 국회의 각 위원회에서 발의되는 법률안 가운데 국회의 심의를 거쳐서 법률로 통과되는 가결수의 비율로써 나타낼 수 있다. 법률안의 발의자가 국회 또는 행정부인가에 따라서 법률안의 통과 여부가 얼마만큼 용이한가에 대한 판단이 국회의 행정부에 대한 관계로 파악된다고 한다.
제1공화국에서 제4공화국에 이르기까지 대통령이 국회에서 통과된 법률안에 대하여 거부권을 행사한 것은 모두 50건으로 이 가운데 45건의 거부권이 제1공화국의 제1∼4대국회에서 행사되었다. 이는 물론 의회나 정당이 정치체제로서 정착되지 못하였던 시기에 자유당이 집권당으로서 안정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편, 제2∼4공화국에 있어서 대통령 박정희의 거부권 행사는 모두 5건인데, 이는 공화당정권하에서는 국회가 행정부에 대하여 종속적 관계에 있다는 사실과 그 뒤의 유신체제가 가지는 구조적 특징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한편, 법률안의 제출과정에서 볼 때 행정부안과 국회안의 비율과 그 가결상황을 살펴보면, 제헌국회에서 제15대국회 전반기에 이르기까지 국회에 제출된 법률안은 총 9,562건이다.
일반적으로 국회의원의 법률안 제출은 국회에 주어진 기능 및 정당체계와 커다란 관련이 있다. 즉, 국회의원이 발의한 법률안은 전체의 40% 안팎에 불과하였다.
이는 의회제도를 구성하는 정당체계 및 선거제도와 관련이 있는데, 행정부의 강력한 지배와 국회의 자율적 정당체계가 이루어지지 못한 채 원내 경쟁을 추구하는 정상적인 국회운영보다는 정당에 대한 행정부의 직접지배를 추구하는 대통령중심제에 그 연유가 있었다고 본다.
예를 들면, 대통령 이승만의 강력한 정치권력의 행사와 자유당과 민주당이 여야로 갈려 양극대립을 하고 있었을 때인 제4대국회에서 의원발의안이 37.3%이었으며, 제8·9대국회 사이의 원내 대립관계에 있어서 행정부가 지배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을 때는 31.6%, 24.3%이고, 유신체제 말기인 제10대국회 때는 불과 3.9%였다.
물론 정당과 행정부 간의 사전협의가 있은 뒤에 행정부의 이름으로 발의되는 경우도 있겠으나, 행정관료 중심의 법률안제출 경향이 짙을 때는 정당과 행정부의 지도자 사이에 정치적인 갈등이 심하였다. 이러한 경우 국회의 기능은 별로 활발하지 못하였다.
둘째, 국회의 기능으로 국민의 의사를 반영하고 수렴하는 의미에서의 통합기능을 들 수 있다. 물론 국민의 의사를 수렴하는 것이 반드시 국회의 창구로 일원화되는 것은 아니고, 정당의 조직을 통해서도 가능하며 행정부의 민원을 통해서도 가능하다.
그러나 의회민주주의하에서 국회가 국민적 통합을 유도할 수 있을 때 그 국가는 보다 민주적인 정치발전으로 지향하는 국가라고 평가된다.
민의의 수렴이 행정부로부터 국회로 옮겨질 때 그만큼 민주화의 정도가 높아진 것으로 평가된다. 국회의 통합기능을 살펴보기 위하여 국회에 제출되는 청원과 진정서의 처리상황을 살펴보면 국민의 국회에 대한 견해를 볼 수 있다.
또한, 국회의원이 가지고 있는 대표성에 관한 인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국회의원의 자기의 대표성에 대한 인식은 국회의 기능을 알아보는 데 있어서 중요한 변수의 하나이다.
특히, 국회는 입법부로서 국민들의 직접적인 요구를 체제 내에 투입시켜야 하기 때문에 국회의원의 대표관이 통합적 기능으로 중요한 것이다. 지금까지의 연구결과가 충분하지는 않으나, 최근의 한 연구는 국회의원들을 대상으로 하여 스스로 대표한다고 판단하는 집단을 전체국민·선거구민·정당이라는 3개의 집단 가운데서 선택하게 하였다.
이 연구에서 밝혀진 국회의원의 대표관은 의원이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는 가치나 신념을 표출시킨 결과라고 볼 수는 없으나, 현실적으로는 국회와 행정부나 정당과의 관계를 알아볼 수는 있다.
제11대 국회의원을 표본으로 한 이 연구는 국회의원들이 자신을 당선시켜 준 선거구민 및 정당을 대표하고 있다는 관념이 약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지역구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81.2%가 국민 전체를 대표하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어 지역이익의 대표성에 대한 인식이 낮음을 알 수 있다.
전국구의원의 경우에는 72.2%가 전국민을 대표한다고 답변하였는데, 정당의 이름으로 전국구에 후보자로 되었음에도 다만 28% 정도가 정당을 대표한다고 한 것은 정당의 통합적 기능 발휘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된다.
국민으로부터 국회의 기능을 바라보는 통합적 기능면에서 볼 때 국회가 국민과 직접 접촉하여 국민들의 다양한 요구를 들어준다고 생각하면서 이것이 정책으로 반영될 것이라는 국민의 신뢰도는 청원이나 진정제도의 활용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이것이 국회의 통합기능의 일면이기도 하다.
역대 국회에서의 청원상황을 보더라도 국민의 대국회관 추세를 찾아볼 수 있다. 제헌국회로부터 시작하여 제6대 국회에 이르기까지 청원의 접수 및 처리건수가 증가하고 있었으나, 유신체제의 제4공화국에서는 감소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물론 청원서의 접수나 처리절차에 있어서 그 통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제8대 국회와 제10대 국회에 있어서의 감소현상은 국회의 기능과 대정부적 역할에 있어서 약한 국회임을 보여준다.
즉, 유신국회에 있어서 모두 259건의 청원이 접수되었는데, 이는 월평균 2.8건으로 다른 시기보다 아주 적은 수이다. 국민이 보기에 입법기능의 약화는 물론 입법부에 대한 신뢰도가 저하되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청원제를 중심으로 볼 때 국회의 기능이 약화되는 반면 정당체계가 양극화되는 경우 대통령을 중심으로 행정부의 권한이 확대되어 가기 때문에 국민의 국회에 대한 신뢰도가 약해진다는 것이다.
국민이 국회에 제출하는 진정서의 추세를 통하여 국민의 대(對)국회관을 살펴볼 수 있다. 진정서는 청원보다 형식과 처리방식이 간단하기 때문에 진정서에 의하여 국회에 국민으로서의 요구와 희망을 제출하는 경우가 많다.
진정서 처리제도는 제3공화국이 들어선 제6대국회부터 실시되었는데, 전체 접수건수는 1만 5860건이고 이 가운데 처리된 것은 1만 1012건으로 69%에 달한다.
제3공화국에는 1일 평균 3.8건(제6대 국회)과 2.3건(제8대 국회) 정도였으나, 제4공화국에 들어서서는 1일 1.5건 정도로 진정건수가 격감되었다. 이와 같은 추세는 국민의 국회의 기능에 대한 신뢰가 약해졌음을 나타낸다.
제5공화국이 정식으로 출범하기 직전의 입법회의와 제5공화국의 제11대 국회에서는 그 처리건수 및 접수건수가 크게 늘어난다. 이러한 추세는 의회에 대한 새로운 역할 기대가 표현된 것으로 분석된다.
셋째, 국회의 기능으로서 중요한 또 하나의 기능은 행정부를 견제하기 위한 입법부의 심사·평가 기능을 들 수 있다. 이는 대표민주주의의 기본원칙에 따라 행정부의 공공사업정책을 통제하고 감독하는 기능으로, 국민과 직접 관계가 있는 공공정책에 대하여 국회가 통제능력을 가지는 것이다.
국회의 위원회를 통하여 정책수립이 이루어지지만 행정부에 의하여 정책이 집행된 뒤에 통제기능을 수행할 수 있고, 통제 자체의 의미도 입법부가 행정부에 대하여 행하는 충고의 성격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현대 행정국가에서 국회의 견제기능은 여러 가지 정치적 의미를 띠고 있다.
국회의 행정부에 대한 견제·통제 기능은 예산·결산의 심의, 국정감사 및 조사보고, 건의안과 결의안의 제출 등으로 표현된다.
예산·결산 심의를 통한 행정부에 대한 통제는 현실적으로 상당히 약한데, 행정부가 강력한 정당의 지지를 받고 있으면서 정당과 행정부의 협의가 사전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아 심의기간이 짧아질 뿐 아니라 정부가 제출한 예산안을 대폭 수정한 경우도 없었다.
물론 새로운 정권이 성립될 때마다 집권당의 지지가 중요성을 가지기 때문에 여당이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국회가 행정부에 대하여 어느 정도 통제기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특히, 제3공화국의 공화당과 제5공화국 초기의 민정당이 이러한 통제기능을 행사하였다. 국정감사권 또는 국정조사권에 의한 행정부에 대한 견제기능은 제3공화국 이래 약화되어 가고 있는데, 제1공화국에서는 29건, 제2공화국에서는 13건, 제3공화국에서는 12건의 국정감사권이 발동되었다.
제4공화국 때는 국정감사권이 폐지되었으며, 제5공화국에 들어서서 국정감사권의 각 위원회 기능을 대폭 약화시킨 국정조사권이 신설되었다. 그러나 제6공화국에 들어서면서 여소야대의 위상 강화와 함께 국정감사권이 부활되었다.
국회는 국무총리를 비롯한 국무위원의 해임결의안을 포함한 각종 결의안과 건의안을 통하여 행정부에 대한 견제기능을 행사할 수 있다. 역대 국회에 제출된 건의안과 결의안의 수와 가결비율도 격감되고 있다.
이는 행정권의 강화를 나타낸다기보다는 국회운영이 국회 중심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정치권력구조상 행정부의 수뇌와 집권당의 지도자가 강력한 협의체적 기능을 발휘하게 되면서 정당과 행정부가 사전에 직접 협의하는 경향이 우세함을 나타내 준다.
따라서, 국회가 여야간의 정당체제로 정상운영이 이루어지면 이 같은 원내 회피의 경향이 감소될 것이다.
의회는 대화를 전제로 한 정치제도로서 국민의 의사가 원내에서 토의되고 대화를 거듭하는 가운데 국회의 성장·발전이 이루어진다고 본다. 정치발전의 측면에서 민주주의 정치제도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국회의 중요성이 인식되어야 하며, 정치과정에 있어서 국회가 정치체계 내의 중심과정이 되어야 한다.
국민이 국회라는 제도 안에 수용되고 개개인의 자유가 보장되며, 평등한 사회를 이룰 수 있을 때 비로소 현대적 의미의 의회제도의 완전한 실현을 이룰 수 있다.
1948년 이래 우리가 도입한 국회제도는 50여 년의 짧은 경험을 통하여 중요도를 더해 가고 있다. 그러나 국회가 국민의 대표기관으로서 자리잡기 위해서는 몇 가지 요건들이 갖추어져야 한다.
첫째, 국회를 구성하는 절차인 선거제도가 보다 민주적으로 정착되어 자유롭고 평등한 정치사회를 이루어야 한다. 선거제도 자체가 바로 국민의 정치의사를 결정하는 틀을 이루기 때문이다.
둘째, 선거를 시행하고 이를 통하여 정권을 획득하려는 정당의 개별적 구조와 조직은 물론, 정당체계의 원만한 운용이 선행되어야 한다. 정당체계의 운영과 내용을 결정하는 「정당법」 및 「정치자금법」도 민주적인 개선이 이루어져야 한다.
셋째, 국회의 구성이 정당의 활동과 구조에 의하여 커다란 영향을 받기 때문에 정당의 체질과 조직강화가 요청된다. 국회가 정치발전과정에 있는 우리의 정치현실에서 그 중요성을 더해 가고 있으며, 국회제도도 점진적으로 정착되어 가고 있음은 사실이다.
짧은 민주주의의 역사를 가진 우리의 의회제도는 정치발전이 지속되고 국민 대다수가 정치체계 속에서 민주적이고 평등한 절차에 의하여 참여할 수 있을 때 정착될 수 있을 것이다.